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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마음에 드는 생명이 되자

글/ 경지(敬紙)

[밍후이왕] 꿈속에서 나는 일 분배 때문에 아주 강렬한 질투심이 일어나 놀라 깨어난 적이 있었다. 깨어나 침대에 앉아 반나절이나 말을 하지 못했다. 이 마음은 이미 아주 오래 되었고 나도 이것이 사상 중에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집착이라는 것을 알고 끊임없이 깨끗이 청리하고 배척했으나 꿈속에서의 표현은 아직도 매우 강렬해 자신의 수련에 크게 실망하게 한 것이다.

속인 중에서의 일은 모두 모르던 데로부터 알며, 생소한 데로부터 익숙하게 된다. 보통 어떤 한 부분에서 잘하기 시작하면 누구나에게 모두 존중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점차 자신이 점점 능력이 있다고 느낄 때 교만하기 시작한다. 비록 표면적으로 자랑하지 않지만 마음은 이미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기 시작하며 이 사람은 되고 저 사람은 되지 않는다고 느끼기 시작한다. 시간이 길어지고 일하는 것이 갈수록 익숙해질 때 교만심이 또 팽창하기 시작해 다른 사람을 깔보는 것으로 변하여, 다른 사람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고 존중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이 자신보다 조금 나은 것을 보아도 지려 하지 않는다. 오래되면 버리기 힘든 질투심이 형성된다. 표현되는 것이 자신조차 괴롭게 하지만 또 그런 생각을 버리려 해도 버릴 수 없어 정말 고통스럽다.

되새겨보면 내가 매번 일을 바꿀 때 모두 이런 과정이 있었다. 겸손한 데로부터 교만하고 다시 질투로 발전한다. 수년 동안 줄곧 이런 악순환을 벗어나지 못했고 심지어 이런 사유를 지니고 수련생과 왕래했다. 수련 시간이 길어짐에 따라 자신이 법에 대한 이해가 다른 사람보다 낫다고 인식해 언어 중에서도 다른 사람을 깔보는 말투를 지니는데, 어떤 때 수련생이 법리를 깨달았고 행위가 개변된 표현을 볼 때도 역시 배척하는 태도를 품고 있다. 사실 이것은 이미 일종 질투심의 표현이다. 시간이 길어지니 심지어 수련생들과 접촉하기 원하지 않고 제자리 답보하며 제고할 수 없어도 자신이 수련이 잘되고 높이 수련됐다고 여겼다. 이런 현상을 옅게 말하면 질투심이고 깊게 말하면 바로 일종 자심생마의 표현이다. 나는 비록 이 문제의 엄숙성을 인식했으나 역시 버릴 수 없었는데 이것이 비로소 내가 가장 고민하는 것이었다.

사부님의 최근 발표한 경문 ‘자심생마에 주의하자’를 보고 나는 한 가지 이치를 알았다. 신은 겸손한 생명을 좋아한다. 예수는 자신을 종으로 부르고 시시각각 하나님을 칭송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고 했다. 다시 나 자신의 악순환을 보니 겸손을 몰랐고 속인 중의 능력을 사람들이 칭찬하는 표준으로 삼았는데 도리어 이것이 질투심을 만드는 토양이고, 사람을 능력으로 선별하는 자체가 바로 착오인 것을 생각하지 못했다.

나의 심리변화 과정을 회고하니 아무것도 모를 때는 사람에 대해 온화하고 성실하며 심지어 비평도 겸손하게 접수하고 표면적으로 ‘진선인(眞善忍)’을 해냈다. 하지만 교만심이 일어난 후 표현해낸 선은 위선적이 됐다. 비록 표면적으로 누구를 깔보지 않지만 마음속으로는 오히려 비교하며 말과 본심이 다를 수 있는데 입은 선하나 마음은 악하다. 다시 발전해 내려가면 질투심이 형성된 후 선은 이미 사라졌다. 시작에는 온 입이 허위이고 자기의 ‘진경(眞經)’을 함께 나누기 싫어하며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은 모두 가짜 경험이다. 그러니 인(忍)은 더 말할 것도 없이 마음속으로 다른 사람의 성취에 대해 원망이 나타났다. 이것이 한걸음씩 ‘진선인(眞善忍)’을 이탈한 과정이 아니겠는가? 이것이 한걸음씩 자심생마로 가는 과정이 아니겠는가! 내가 우주특성을 이탈하면서 생활은 순조롭지 못했고 수련에 마난도 많아졌는데 신이 이미 나를 도와주지 않기 때문이며, 나를 인도한 것은 신이 아니라 업력이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업력이 가져온 쟁투심과 과시심은 한 걸음씩 나를 아득하고 미약하게 하며 심지어 수련에 대해 바른 믿음을 잃게 하는데 이것이 바로 가장 두려운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이 악순환을 뛰어 넘는가? 나는 마땅히 시종 겸손을 유지해야 한다고 느꼈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겸허(謙虛)해야 하며 그래야만 일을 잘할 수 있을 것이다.”(전법륜 제2권-어떻게 보도할 것인가) 우선 겸손은 자신을 신의 일면에 서게 한다. 신은 겸손한 생명을 좋아하기 때문에 나는 겸손은 인(忍)의 또 다른 층의 표현이라고 깨달았다. 순조로울 때나 역경일 때를 막론하고, 지위가 높거나 낮거나를 막론하며, 능력이 크거나 작거나를 막론하고 겸손은 우리들에게 ‘인(忍)’을 이탈하지 못하게 한다. 사실 겸손은 자신에게 양호한 심태를 주고 쟁투를 피하게 한다. ‘전법륜’에서 말씀하셨다. “쟁투심을 버리지 않으면 역시 질투심이 생기기 쉽다.” 쟁투심은 속인 중의 명, 리, 정의 집착으로 일으킨 것이 아닌가? 명이나 이익을 막론하고 심지어 정(情)도 모두 버려야 한다. 사람과 서로 다투면서 누구도 누구에게 지지 않으려 하는데 이것이 바로 악이다. 이것이 바로 그런 “대자연과 싸우다”란 당(黨) 문화가 아닌가? 일체를 업신여기며 신과 부처를 멸시한다. 그러나 우리가 겸손할 때, 누구에 대해서나 모두 겸손해야 하며 잘난 체 하는 것이 없으면 사람을 대하는 것이 자연히 사근사근하다. 또 수련인이라면 자만할까 봐 두려운데 사람의 용량은 유한하기에 일정한 경지에 이르면 용량을 확대해야만 제고할 수 있다. 일단 자아에 만족하면 심성은 제고할 방법이 없으며 경지도 승화할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의 부족함도 볼 수 없다. 만약 겸손할 수 있다면 다른 사람과 자신에 대해 성심으로 대하며 심성 용량이 저도 모르는 사이에 승화 제고될 수 있다.

개인의 현재 일부 인식이다.

문장발표: 2011년 2월 2일
문장분류: 수련마당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2/2/2/25260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