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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자신에게서 찾는’ 것에 관한 최근 깨달음

글/ 대륙 대법제자

[밍후이왕] 최근 한 시기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한 단락 설법에 대해 느낀 것이 참 많았다. “하지만 당신은 나의 이 한 마디 말을 기억하라. 두 사람 사이에 모순이 발생했을 때 제3자가 보게 됐다면, 제3자도 ‘나 자신은 어디에 잘못이 있는가, 왜 나에게 보게 했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미국동부법회설법) 여기에 대해 적어 보는데 여러분들이 참고하기를 바란다.

사례 1: 다른 학습 소조에서 수련생D는 가정관을 1,2년 지났지만 잘 넘지 못했다. 모두들 그를 만날 때마다 그에게 이 일에 관해 쉼 없이 얘기하면서 그가 힘써 이 관을 넘을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말만 시작하면 D는 매우 속상해 하면서 눈물이 앞을 가렸다. 다른 수련생들은 할 수 없이 심한 말도 했지만 D는 그 당시에는 조금 나아진 것 같았지만 지나면 또 전과 다름없었다. 나는 이러한 상황을 보고 여러 사람들 마음이 모두 이 일에 이끌렸다는 것을 느꼈다. 만약 여러 사람들이 모두 이 마음을 내려놓지 못한다면 D의 상황은 철저히 개변되기가 어려울 것이다. 여러 사람들과 이 견해를 교류한 후 일정한 시간이 지나자 모두 제고됐으며 수련생 D도 관을 넘게 됐다.

이 일은 보기에 나와 아무런 연관이 없는 것 같다. 동시에 수련생 A도 외지 업무가 적응되지 않아 포기하려고 했는데 나와 수련생 B는 속인의 방법으로 수없이 말을 해가면서 그를 설득했다. ‘일 찾기도 쉽지 않는데 주인이 사납게 대하는 것은 좋은 수련환경이다’하는 등등을 얘기했는데 마지막엔 내 마음도 움직였다. 왜 이 일을 말하는데 그 일도 나오지? 나는 갑자기 내가 옆 학습소조와 유사한 잘못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A의 일에는 자신이 수련해서 제거해야 집착이 있으니 A의 떠나고 남는 것에 대해 더 이상 마음에 두지 않았다. 다만 그에게 한 번 가서 조금이라도 제고된 것이 있다면 그냥 간 것이 아니라고 알려주었다. 마지막에 A도 주인의 꾸지람 앞에서 그 전보다 많이 나아졌다.

사례 2: 수련생 C에게는 26살이 된 딸이 있는데 C가 아침에 그녀보고 일어나 출근하라고 소리치다가 결국 딸을 화나게 만들곤 한다. 나는 듣고 나서 수련생C가 딸에 대한 정이 너무 강한데 성인이 된 자식은 본인 스스로 자기를 관리하게 해야 한다고 얘기했다. 이후에 어느 날 점심때 나는 만들어야 할 자료가 있어서 12시 전에 아이를 데려와 같이 밥을 먹지 못했다. 그 날 집에서 발정념을 하는데 효과가 아주 좋았다. 그제야 나는 자신이 아이를 데리러 가는 것과 발정념을 잘하는 가운데서 자기도 모르게 아이를 데리러 가는 것을 선택했다는 것을 깨달았는데 아이에 대한 정은 수련생 C보다 약한 것이 아니었다. 아이에게 20분 기다리라고 하는 것과 발정념을 잘하는 것 가운데서 어느 것이 더 중요한 지는 아주 명백하게 보아낼 수 있다. 그 날부터 초등학교에 다니는 딸은 갑자기 점심을 먹으러 혼자 갈 수 있다고 하면서 내가 같이 가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자신의 사람마음을 제거하니 외부적인 환경도 이에 따라 변화되었다.

사례 3: 한 수련생 이모가 있었는데 구세력에 의해 장기간 병마의 시달림을 받았다. 생사는 두렵지 않지만 신체적 고통을 감당하기 두렵다는 뜻을 드러냈다. 나는 그 당시 그에게 지적해주고 그 이모와 함께 법을 학습했으며 그의 ‘남을 이끌려는 마음’을 찾아냈다. 또한 그는 정진하지 못하는 수련생이 이것저것 무서워하며 불만족 하는 것이 원망스러워 차라리 그에게 진상자료를 가져 주지 않겠다고 했는데 이러한 행위는 실은 구세력을 도와주는 것이고 정진하지 못하는 수련생을 구세력 편으로 밀어내는 것이었다. 나는 그 당시 만약 나라면 어느 수련생이 주동적으로 자료를 요구하면 설령 열 번을 가더라도 꼭 가져다 줄 것이라고 했다. 그 수련생이 아무리 불평해도 그것은 다만 그의 수련 중의 하나의 좋지 못한 상태인데 대법의 한 개 입자로서 정체를 잘 원용하면 우리 수련생도 점점 더 잘할 것이라 믿는다고 했다.

최근 문제를 보면 자기를 생각하는 것이 습관이 됐다. 그래서 단체연공시간이 아니면 ‘파룬장법(法輪樁法)’에 대해 스스로 마음속에서 어렵고 두려워하는 마음이 생기는데 고생을 두려워하는 전형적인 집착심이었다. 이 문제를 돌파하자 혼자서 포룬(抱輪)을 할 때 갑자기 홀가분하기 그지없었다. 또한 애당초에 떨어진 수련생을 찾으러 갈 때 처음에는 사부님의 ‘오스트레일리아 수련생에 대한 설법’ 동영상을 갖고 갔는데 그 수련생은 떨어진 다른 수련생도 부르려고 했지만 나는 두려운 마음 때문에 한명 한명씩 하려 했다. 하지만 걸어 나온 적이 없는 수련생은 짝이 있는 환경이 필요하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해 두 번째 주에 다시 갔을 때 그 수련생은 자기도 좋다는 것을 알지만 지금은 감히 수련하지 못하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맥이 빠져서 다시는 꾸준하게 그들을 찾아가지 않았다. 사실 우리가 떨어진 수련생을 이끌어 주지 않는다면 다른 형식에서 보면 그들을 구세력이 안배한 길로 가게 하는 것과 같은데 이는 이모 수련생이 자료를 가져다주지 않는 행동과 똑같은 것이다.

사례 4: 어느 날 아침 아이가 일어나지 못했는데 아침밥도 먹지 못한 채 등교시간이 됐다. 나는 여기에 불만이 있었지만 꾹 참고 있었다. 학교에 도착하자 아이는 지각할까 봐 조급해하면서 나보고 빨리 준비하라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끝내 참지 못하고 불만을 터뜨렸다. “지금에 와서야 급한 줄을 아는구나. 아침에는 뭐 했어?” 말이 나오자 곧 후회했다. 돌아온 후 생각해 보았는데 요즘 아이는 자기 스스로 관리를 잘했는데 이런 일이 아주 적었다. 오늘은 왜 이러지? 생각해 보니 그제야 자신이 줄곧 새벽 연공을 잘 견지하지 못했는데 오늘 아침 3시부터 세 번이나 깨어났지만 졸려서 일어나 연공하지 않았다. 원래 남을 말하려는 것을 되돌려 자신을 보니 결점이 하나도 적지 않았다.

비록 다른 사람들 사이의 모순을 내가 보는 것도 나와 관계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최근에 상대적으로 엄중한 한 가지 문제에 봉착했을 때 첫 번째는 이것이 다른 사람의 문제라고만 보았다. 이는 먼저 자신에게서 찾는 사유습관이 아직 형성되지 않았다는 것을 설명한다.

최근에 남편(수련생)은 신사신법(信師信法)에 대해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나는 처음에 크게 놀랐고 여러 번 교류도 했는데 효과가 좋지 못해 마음이 조급해졌다. 이후에 이 조급해하는 데는 정(情)의 요소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에게서 주위 수련생의 표현이 모두 출세간법(出世間法)의 상태가 같지 않다는 얘기를 반복적으로 들었는데 주요하게는 신체가 고에너지 물질로 완전히 전화되지 못했다는 것을 가리킨 것이다.(물론 여기에는 구세력의 저애도 있다.) 그래서 갑자기 자신이 한동안 속인의 것에 빠졌는데 그 시간이 짧지 않다는 것이 생각났다. 법학습과 연공이 남편보다도 못했으며 하는 행동은 본질적으로 “신사하지 않고 신법하지 않는”(不信師信法) 것이었다. 그의 그러한 위험한 말은 나를 일깨워 주었다. 이렇게 안으로 찾은 후 나는 정말로 부끄러웠다. 다행히 이후에 내 마당이 바로잡혀졌고 집 환경도 차츰 바른 방향으로 바뀌었다.

또 예컨대 나에게 자료를 주는 수련생이 미적거린다고 여겼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실은 자신이 늦게 출발하고 또한 평소에 일을 할 때 계획을 세우면서 질질 끄는데 아직도 나태한 마음을 제거하지 못한 것이었다. 이러한 것들을 하나하나 다 얘기하지는 않겠다. 아울러 자신을 생각하고 자신에게 찾는 과정에서 심성이 뚜렷하게 제고되는 것을 느꼈으며 최근에야 어떻게 하는 것이 진정한 수련인지를 깨달은 것 같다.

몇몇 대법제자가 그들 아이들과 지내는 모습과 자신의 집 상황을 결합해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문제에 대해 조금 언급하려고 한다. 아이하고 얘기할 때 탓하고 불평하는 것이 많은데 보통 우리는 남하고는 이렇게 하지 않는다. 내가 여러 번 안으로 찾은 결과 예를 들면 아이가 너무 느리고, 나태하고, 자주 지각하고, 연공을 적게 하고, 법학습이 적은 것 등을 탓하는 이런 문제들은 우리 자신에게서도 모두 보아낼 수 있는데 많은 경우 아이들은 우리들의 거울이다. 나는 또한 우리 상태만 좋아지면 아이를 이끌어 좋은 변화가 있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날 “불광이 널리 비치니, 예의가 원만하고도 밝도다(佛光普照, 禮義圓明)” 를 읽었는데 갑자기 이것이야 말로 우리 수련자가 주위 사람하고 지내는 정상적인 상태인데 여기에서 말하는 주위 사람은 가까운 사람이든 먼 사람이든 상관이 없다.

공능에 대해 얘기하면 나는 자료를 배포할 때 의식적으로 한줄기 에너지를 자료에 내보내는데 “자료를 받는 사람의 신체에 있는 공산사령을 제거해 구원을 받게 하자”라고 말이다. 이것은 주동적으로 신통을 이용하는 데서 내가 생각한 것이다. 또 한 번은 임시로 자료를 가져다주는 시간을 조절했는데 나는 수련생이 집에 있고 밖에 나가지 말라고 일념을 내보냈다. 그 수련생은 내가 문에 들어서기 전에 갑자기 내가 오후에 올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비록 열려서 닦는 수련생이 아니지만 우리는 모두 신통을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데 “갈수록 우리 현대화한 도구에 의존할 뿐이어서”(전법륜) 이런 것을 생각하지 못한다. 그 날 나는 이 단락의 법을 읽으면서 갑자기 이 점에 대해 깊이 느끼게 됐고 많은 때에 나의 사유는 여전히 사람의 단계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이상의 나의 약간의 깨달음으로 수련생이 모두 “법을 배우고 법을 얻어 배움을 견주고 수련을 견주나니 일마다 대조하여 해 내어야 수련이로다”(홍음-착실한 수련)처럼 하기를 바란다.

적절하지 못한 곳이 있다면 지적해주시기 바란다.

문장발표: 2012년 1월 7일
문장분류: 수련마당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2/1/7/249156.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