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종언(鍾言-중국대륙)
[밍후이왕] 우리의 자아는 바로 우리가 현재 생각하는 자신이다. 하지만 바로 한 시기 생명역사와 한 무더기 관념의 조합이고 한 무더기 긁어모은 사람의 사상이다. 우리가 ‘자아’를 움켜쥐고 놓지 못할 때는 바로 집착심, 관념과 각종 명, 이, 정을 가득 담은 것을 부둥켜안고 있는 것이다. 다만 사람이 자아를 부둥켜안고 놓지 않으면 두 가지 선택이 있다. 하나는 자아에 조종되어 나쁜 일을 하고 또 하나는 자아를 덮어 감춰 표면적인 선한 행동으로 순정함을 장식한다. 하지만 더욱 높은 표준으로 볼 때 그 자아를 내버리지 못하면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의 구별은 다만 표면상 정도의 차이일 뿐으로 그 본질은 같다. 다만 어떠한 사람은 자제력이 있어 하지 못했을 뿐이다! 대부분 바로 당신의 ‘자아’ 중의 관념과 집착심이 다른 사람보다 적기 때문이다!
사부님께서는 “만약 인류가 자신과 우주를 새롭게 인식하고 굳어진 관념을 개변할 수 있으면 인류에게는 비약(飛躍)이 있을 것이다”(전법륜-논어)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지금 진정으로 법 중에서 법을 인식하는 위력을 체험할 수 있다. 현재 대체로 개변할 수 없고 승화할 수 없을 때를 만나면 나는 바로 법에서 인식하고 법에 비추어 안으로 찾는다. 이것은 하나의 가로막을 수 없는 승화의 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본문 작가
(전편에 이어서)
사실 자아는 우리가 매생 매세에 직접 경험한 사람의 사상에서 긁어모은 것이다. 우리는 거의 각종 생명으로 환생했다. 무사, 숙녀, 수재, 부자, 노예 등이다. 우리는 이런 여러 사회 인물을 체험한 동시에 자신에게 이 사회인물에 적응하는 사람 사상을 긁어모았다. 하지만 이 사람의 사상은 사실 바로 우리가 통상 말하는 자아이다. 하지만 이 자아는 후천적으로 형성된 것이다.
사람이 태어나면 모든 기억은 지워지는데 우리가 세간에 온 후 근본적으로 자신이 누구인지, 우주 어디에서 생겨났는지 등 선천적인 자신에 대해서는 전혀 모른다. 우리가 세상에서 천천히 자라고 늙어가며 또 점점 자신의 확고한 자아 관념이 형성될 때 우리는 점점 진정으로 선천적 자신을 잃어버리게 되고 점차 삼계 내 미혹 속에 빠져든다. 이 미혹 속에서 우리는 자아의 제한 속에서 여전히 만물을 인식하고 자아를 인식하고 ‘자아’를 자기로 여기고 애한정구(愛恨情仇) 중에서 기쁨과 슬픔, 이별과 만남을 누린다.
조용히 생각해 보면 선천적인 나는 도대체 누군가? 사실 하나 개오하지 않은 사람은 근본적으로 이 문제에 대답하기 어렵다. 우리가 자신이 누구인지 알 때면 바로 하나 개오한 각자가 아닌가? 오직 사부님께서 법에서 우리에게 알려주셨다. 하지만 우리의 선천적인 자신은 현재 우리로 말하면 다만 하나의 멀고먼 전설이고 알지 못하는 생소함, 이해할 수 없는 성결함, 세간에 존재할 수 없는 자비이다.
우리 이 삼계에 정말로 ‘자아’라는 한 생명이 있다. 사실 내가 말하는 정, 그것도 온 삼계를 뒤덮은 하나의 생명이다. 그러면 거대한 삼계에 존재하는 ‘자아’는 우리에 대해 말하면 그도 하나의 신이다. 그 생명은 바로 세간의 모든 사람을 도와 자신의 의식을 형성하게 한다. 자아는 우리 인류가 자신이 배운 모든 지식과 각종 인생경험이 합쳐진 것으로 만약 자아라는 의식이 없으면 정상적으로 인간세상에서 생활할 수 없다. 자아의식은 인간세상에서 형성된 후 하나의 봉쇄된 사람의 껍질이 됐다. 우리는 이미 그 ‘자아’를 우리 본인으로 착각하고 있다.
나는 자아가 세간의 모든 중생을 미혹시킨 것을 발견했다. 자신이 매 일생 매 일세의 ‘자아’는 모두 자신이다. 하지만 정확하게 선천적 자신이 아니다!
우리의 자아는 바로 우리가 현재 그런 생각하는 자신이다. 하지만 바로 한 시기 생명역사와 한 무더기 관념의 조합이고 한 무더기 긁어모은 사람의 사상이다. 우리가 ‘자아’를 움켜쥐고 놓지 못할 때 바로 집착심, 관념과 각종 명, 이, 정을 가득 담은 것을 부둥켜안고 있는 것이다. 다만 사람이 자아를 부둥켜안고 놓지 않으면 두 가지 선택이 있다. 하나는 자아에 조종되어 나쁜 일을 하고 또 하나는 자아를 덮어 감춰 표면적인 선한 행동으로 순정함을 장식한다. 하지만 더욱 높은 표준으로 볼 때 그 자아를 내버리지 못하면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의 구별은 다만 표면상 정도의 차이일 뿐으로 그 본질은 같다. 다만 어떠한 사람은 자제력이 있어 하지 못했을 뿐이다! 대부분 바로 당신의 ‘자아’ 중의 관념과 집착심이 다른 사람보다 적기 때문이다!
사회가치관 추구에 대한 자아도 하나의 고통스러운 망념이다. 본질적으로 말하면 우리가 일단 어느 한 종류의 사회인물을 자신으로 허락하면 그 인물은 우리의 생명을 위태롭게 한다. 예를 들면 내가 본래 수련의 길에 들어설 때 진념을 움직였다. 대법이 좋다고 생각하고 오직 순정하게 수련하면 기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후에 이르러 같지 않았다. 예를 들면 사부님께서는 이미 대도무형의 한 가지 수련의 길을 걷는 것을 채용한다고 명시하셨다. 그러나 사람은 고독함을 견디기 힘들다! 수련 중에 사람은 아마 여전히 몰래 마음속에 자신을 어떤 인물로 상상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사람들 마음속에 우리 자신의 견해가 유지되는 이런 인상을 기대한다. 하지만 이것은 이미 자아의 한 가지 표현이다. 우리는 아마 다른 사람이 나에 대해, 수련을 잘하고 아주 정진하는 것으로 생각해주기를 기대하며 진일보 이런 자신의 인상이 사라질까 봐 근심한다. 그러면 한 단계, 만약 우리 수련의 내적 품성이 이미 안 될 때, 하지만 우리는 반드시 자주 수련생 중에 나타나야 하는데 아마 다른 사람에게 나는 이미 조용히 법공부를 할 수 없게 됐다고 알리지 못하고 자신이 수련을 잘한다는 이런 인상을 유지함을 보호한다. ‘나는 이미 조용히 법공부하고 수심(修心)하지 못하며 머릿속에 각종 집착심과 온갖 잡념이 혼란스러운 상태에서 세 가지 일을 한다! 하여튼 나는 수련 행위의 수량을 축적한다!’ 왜 이렇게 될까? 그것은 자아가 한 나쁜 일이 아닌가? 마음도 조용히 할 수 없는데 아직 그런 명과 정에 대한 집착심을 추구하는 것을 그치지 않는다. 수련생과 마찰을 해결할 수 없게 됐는데도 아직 청성하지 않고 주동적으로 자아의 통제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면 누가 우리의 생명을 지배하고 있는가?
사부님께서는 “만약 인류가 자신과 우주를 새롭게 인식하고 굳어진 관념을 개변할 수 있으면 인류에게는 비약(飛躍)이 있을 것이다”(전법륜-논어)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지금 진정으로 법 중에서 법을 인식하는 위력을 체험할 수 있다. 현재 대체로 개변할 수 없고 승화할 수 없을 때를 만나면 나는 바로 법에서 인식하고 법에 비추어 안으로 찾는다. 이것은 하나의 가로막을 수 없는 승화의 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모든 물질은 사부님께서 제거해 주셨다. 우리는 일을 할 때 확고함을 유지하고 법에 입각해 우리 몸에 숨겨진 경직된 관념이 무엇인지 인식해야 한다!
우리는 속인 상태에 처해 있을 때 매우 가련하다. 사람은 오직 무수한 의식 내원이 머릿속에 생겨난 후 의식 결과를 느낄 수 있지만 그 의식의 내원은 어디에서 생긴 것인지 도저히 알 수 없다. 억만년 이래 ‘자아’는 사람을 도와 머릿속에 한 가지 세간의 자아의식을 형성시켰다. 우리는 대법수련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씻어버리는 과정에서 천천히 우리의 불성을 충실하게 하고 우리의 마성을 억제시키며 우리의 정념으로 대법에 대한 인식과 이해를 증가시킨다. 그리고 점차 안으로 찾아 무엇이 ‘자아’인가를 분별해 “무사무아(無私無我), 선타후아(先他後我)의 정각(正覺)으로 수련 성취해야 한다.” 우리가 자아를 완전히 내려놓은 후 그런 수련은 완전히 자비이고 그 때 우리는 이미 완전히 정에 대한 집착을 단절한 것이다.
사부님께서 전에 “우주의 호한(浩瀚)함과 천체(天體)의 홍대(洪大)함은 사람으로서는 탐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니요, 물질의 미세(微)함도 사람으로서 엿보아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인체의 심오함은 사람들이 그 표면만 배워서는 알 수 없는 아득한 일이라, 생명의 방대하고 복잡함은 인류의 영원한 수수께끼로다”(정진요지-궁)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자아를 내려놓은 후 선천적 자신이 밖으로 다시 나올 때는 어떤 상태인가? 만약 우리가 자아를 내려놓고 자아를 초월하고 자아가 우리의 선천적인 자신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겸손하고 경건하고 숭배하는 심태로 사부님과 법을 직면할 때 사부님께서는 우리를 도와 봉쇄된 우리 마음의 모든 철문을 폭파시켜 준다. 우리의 선천적 자신이 완전히 방출되어 나올 때 그 자비의 에너지는 우리로 하여금 기쁘거나 혹은 눈물을 흘리게 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 선천적 자신은 어떠한 집착과 후천적 관념이 없는데 관념이 있어도 다만 우리의 자아일 뿐이다. 사부님께서는 이전부터 자아에 대한 집착심을 내려놓으라고 하셨고 사람에 대한 관념을 내려놓으라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진정으로 할 수 있을 때, 일만 년의 고립무원(孤獨無助)한 집을 떠난 고통스러운 꿈속에서 깨어나 천상의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
자신을 내려놓으면 우리의 마음은 자비가 된다. 사부님께서는 “심생자비(心生慈悲)”(대원만법-동작도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자비는 진정한 에너지다. 이런 에너지가 있은 후 우리가 무엇을 해도 모두 자비이다. 주머니에 동전을 넣으면 당신이 쓰는 것은 바로 동전인 것처럼, 주머니에 금화를 넣으면 당신이 쓰는 것은 금화다. 우리가 이전에 머릿속에 모두 집착과 관념이기에 다른 사람을 잘 대하고 어떻게 노력해 수련하며 온 얼굴에 웃음을 띠고 다른 사람을 대해도 그것은 여전히 전부 집착과 관념이다. 그 때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 다만 집착과 관념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전 20여 년간 수련 중에서 완전히 일체 명, 리, 정, 심지어 생사를 내려놓을 수 있고 철저히 자신을 씻을 수 있었지만 지금껏 ‘자아’가 생명을 주재하는 위치에서 탈출할 준비는 하지 않았다. 이것이야 말로 내가 떨어져 내려온 진정한 원인이다. 나는 ‘자아’가 생명의 통제권을 잃을 것을 두려워함을 알고 있는데, 나의 표면 관념에 그 선천적 자신은 완전히 생소한 하나의 생명이다. 나는 그 선천적 자신을 몰랐고 그 ‘자아’는 내가 어려서부터 익숙하고 내가 조금씩 만들고 조성한 것이다. 나는 ‘자아’를 믿고 내 생명을 생소한 선천적 자신에 감히 맡기지 못했다. 총명할수록 그 ‘자아’는 각종 미묘한 지혜를 이유로 당신의 생명을 신의 일면이 주재하게 허락하지 않는다. 당신이 사람 중에서 바로 그런 총명함이 있기 때문이며 그리고 당신 자아가 완전히 당신의 모든 생각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세상에서 얼마나 되는 대법수련자가 모두 이 세속 중의 집착을 내려놓을 수 있을까. 하지만 얼마나 되는 사람이 자신 생명의 선천적 자신이 주재하게 감히 반환할 수 있는가?
나는 최근 몇 년 수련 중 정법은 하나의 진행과정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인터넷에서 늘 수련생이 자신의 수련과 정법노정은 동시라고 말한다. 사부님의 법이 어디까지 말씀하시면 정법의 진행과정은 거기까지 이르고 천상의 변화도 거기까지 이르며 제자들의 수련도 거기에 이르러 정법진행 요구에 부합된다. 법을 전할 때 학습반에서 사부님께서 매 수련생에게 병을 치료하는 것은 무조건적이었고 심지어 가족을 위해 병을 치료하려 해도 가능했었다.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데 학습반에서 사부님께서 직접 우리들에게 만약 여러분이 가족을 위해 병을 치료하고 싶으면 병 부위를 생각하면 된다고 말씀하셨다.(원 말씀은 아님) 당신 생각해 보라, 학습반에서 그런 특수한 시기에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지 않으면 할 수 있는가? 99년 역시 하나의 큰 승화 시기다. 그 당시 사부님께서는 직접 우리의 생명을 가장 높은 위치로 떠밀어 올려놓으셨다. 그 단계를 경험한 수련생은 다 알고 있을 것인즉, 그 비약의 경지는 평소 수련 상태에서 실현하고 도달할만한 것이 아니다. 그 단계의 승화는 완전히 우리가 대법 요구와 천상의 변화에 따라 행했기에 도달할 수 있었다. 평소 개인이 짧은 시일 내에 그런 위대한 승화에 도달할 수 없다. 금년 7월에 사부님께서는 신경문 ‘대법제자는 반드시 법공부를 해야 한다’를 발표하셨다. 그때 나는 경문을 보고 깜짝 놀랐다. 나는 자신이 10여 년간 체조를 했다고 생각했는데 그 한순간 깊이 자신도 완전히 정법의 진행과정을 뒤따랐다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우리는 현재 또 하나의 큰 비약의 단계라는 것을 깊이 감수했다. 우리는 완전히 철저히 자아를 내려놓을 때가 됐다는 것이다.
(미완성, 계속)
문장발표 :2011년 11월 24일
문장분류: 제8회 법회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1/11/24/248896.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