简体 | 正體 | 대법서적

明慧법회|1993, 1999, 2011, 생명의 3차례 비약(4)

글/ 종언(鍾言) 중국대륙

[밍후이왕] 선천적 자신이 다시 나올 때 우리 마음은 자비가 되고 이런 에너지로 이후에 무엇을 해도 전부 자비가 된다. 주머니에 동전을 넣으면 당신이 쓰는 것은 바로 동전인 것처럼, 주머니에 금화를 넣으면 당신이 쓰는 것은 금화다. 우리가 이전에 머릿속에 모두 집착과 관념이기에 다른 사람을 잘 대하고 어떻게 노력해 수련하며 온 얼굴에 웃음을 띠고 다른 사람을 대해도 그것은 여전히 전부 집착과 관념이다. 그 때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 다만 집착과 관념이기 때문이다.

– 본문작가

(전편에 이어서)

우리 이 도시 수련생 중 이미 일부 사람들은 함께 앉아 있을 때 모두 텅 비어 조용한(空靜) 상태이고 동심(同心)이 되었다. 만약 그 중 어떤 한 사람이 무엇을 하려 할 때 기타 모든 사람은 다 자신의 아름다움을 무조건 바쳐 지지한다. 다른 사람이 무슨 일을 하려 할 때도 함께 무조건 지지한다. 이러한 마음을 합친 상태는 완전한 신임이고 생명을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수 있는 상태로 이것은 전에 그런 ‘자아’를 내려놓지 못한 상태에서는 완전히 불가능하다. 사실 다만 신불(神佛)의 상태에 도달해야만 완전한 신임에 도달할 수 있다. 사람은 사람을 신임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일종 생사를 서로 의지하는 신임을 초월했다. 이전에 우리는 차라리 자신의 허황한 ‘자아’와 관념을 믿을지언정 법의 선택과 안배를 믿지 않았다. 우리는 이전에 ‘자아’를 믿었지만 자아는 확실히 우리에게 많은 고생을 하게 하는데 그는 사람을 고해(苦海) 중에 빠지게 한다.(사람이 미혹 중에 있을 때는 종종 ‘자아’가 초래한 고생을 인식하지 못한다. 반대로 자아나 관념, 집착 등을 위해 일체를 지불해도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는다.)

지난 7월 자아에 대한 비밀을 알게 된 후에도 나는 가끔씩 같은 우를 범했다. 나는 과거 수십 년 동안 세간에서 조금씩 형성된 ‘자아’의 모자를 다시 집어다 썼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즉시 현실 속 내가 진정으로 수련하는 경지에 있다고 믿지 않았고 일체 진실은 다시 허황한 것으로 변했으며 마치 깊은 산속 마을에서 꿈을 꾸다 깨어난 사람 같았다.

몇 년간 기복의 변화가 아주 큰 수련과정에서 ‘자아’의 작동 하에, 대부분 수련인이 가장 내려놓기 힘든 것이 수련 중 자신의 위덕과 수련 중 층차라는 것을 나는 깨달았다. 전부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수련을 높게 하길 바라고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수련을 뛰어나게 하는 것을 바라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 수련인은 자아의 작동 하에 쉽게 수련을 하나의 장사로 간주하고 이전에 대법 서적을 몇 번이나 읽었는지, 얼마만한 연공을 했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을 구했는지를 계산할 수 있다. 수련인 중에서 자신이 큰 형님으로 되기를 바라고 혹은 협조인으로 되길 바란다. 위덕을 건립하는 3가지 항목에 참여를 희망하는 동시에 자신의 유일무이(獨一無二)한 작용이 부각되기를 희망한다. 얼마나 신성한 일이라도 우리는 자아를 잊을 수 없다.

나는 줄곧 어떠한 한 생명이라도 위대한 것을 추구하면 안 되고 다만 법에 용해되어야 한다고 인식한다. 수련은 정말로 장사가 아니다. 대법에서 수련 층차, 얻은 것과 지불을 계산하지 않고 완전히 대법을 신임해 뒤돌아보지 않고 용감히 나아가(義無反顧) 대법에 용해해야 한다. 누가 만약 수련의 앞에 바로 만장심연(萬丈深淵)이 있다고 하면 나는 당신에게 “그렇습니다. 나는 바로 전문적으로 만장심연으로 뛰어내리러 왔어요!”라고 대답한다. 공포, 방황, 추측, 사유, 시간, 계산, 독선을 내려놓고 마치 용맹한 전사처럼 모든 것을 내려놓고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경지의 승화를 받아들여야 한다. 두려움을 내려놓고 결심을 내리는 것이 관건이다! 사부님께서는 “사람마다 모두 도를 얻기란 불가능한 것이다. 연마(煉)를 견지해 나갈 수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또 여전히 당신이 수련해 낼 수 있는가 없는가를 보아야 하고, 또한 당신이 결심하고 수련할 수 있는가 없는가를 보아야 하는데, 사람마다 성불(成佛)한다는 이것은 불가능하다”(전법륜)고 말씀하셨다.

요즘 나도 생각했는데 10여년 마난에서, 체조를 하는 것과 같은 감수에서 나는 왜 여전히 넘어지지 않았는가? 나는 이미 생명 중 하나밖에 없는 금과 같은 수련하려는 마음을 내 생명에서 파서 대법 속에 놓았다. 확고하게 대법을 수련하는 불성은 금과 같은 마음이다. 내가 전에 수련할 때 왜 제고가 그렇게 빨랐을까. 그것은 그때 나는 비록 출가하지 않았지만 출가했다는 마음을 품었고 다만 속인의 생활 상태를 유지한 것으로 빈 공간을 찾아 연공하고 밥을 빌어먹었으며 그만일 뿐이었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너무 속인의 유위(有爲)적인 일에 개의하면 바로 자아의 일종 표현이다. 예를 들면 한 수련생이 총 협조를 주도해 어떤 일을 하면 대법의 안배도 잇따르고 사부님과 뭇신은 위에서 이 일을 보살피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자아를 내려놓지 못하고 ‘피협조인’으로 참가하면 자주 각종 충돌이 생겨 영원히 동심(同心)으로 협력할 수 없게 되고 모순이 발생할 수 있다. 나는 지금에야 알았는데 ‘동심’은 진실하고 신성한 존재다.

다른 공간에는 정말로 ‘동심(同心)’이 존재한다. 우리가 천상에 있을 때 사부님께서는 각 창궁의 주(主)들이 온 것을 알고 계신다. 심지어 서로 극히 먼 곳에서 와서 다시는 만날 수도 없고 혹은 무슨 관계도 없는 우주의 주(主)들이다! 이러한 생명들이 하세해 수련하기 시작한다면, 그리고 거기에 자아의 교란이 가해지면 정말로 누구에게도 순종하지 않게 된다. 하지만 그들이 정말 대단한 생명인 것은 사실이다. 그리하여 사부님은 ‘동심’을 무수한 몫으로 나누어 서약을 한 매 한 우주의 왕들에게 주었다. 이로 인해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 어떠한 관련도 없었던 우주의 생명들이 정말로 하나의 ‘동심’을 품게 됐다. 때문에 오늘날 대법 안에서 사심 없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거나 조건 없이 가장 선한 마음으로 자신이 내키지 않아하는 수련생을 지지하지 못하는 사람은 아직 사심이 있기 때문이고 사람의 껍질에서 빠져나오지 못했기 때문이며 아직 꿈속을 헤매면서 깨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전에 허스(合十)할 때 일종 아주 좋은 예의라고 느꼈다. 하지만 지금은 허스할 때 완전히 신성하고 순정하며 아름다운 상태를 느낀다. 허스할 때 가장 아름다운 마음으로 상대방을 공경하기 때문이다!

자아를 내려놓고 또 하나의 큰 변화가 있는데 바로 소업 능력이 다르다. 우리 가장 표면의 육체세포를 포함해 온몸의 매 층차 미립자가 고에너지로 대체된 후 소업 능력도 대대로 증가한다. 이전에 우리는 속인의 육체로 소업했지만 이후부터는 바로 완전히 공(功)으로 구성된 신체로 소업한다. 당신의 그 생명은 이미 육체세포가 없기 때문이다. 이전에 속인의 육체세포로 소업을 할 때는 주먹만한 업력도 매우 무서웠다. 가부좌 할 때 만약 1킬로그램의 업력을 밀어주면 고통스러워 죽을 지경이다. 한 속인에게 만약 1톤 업력을 육체에 밀어주면 즉시 죽어버리고 육체도 해체된다. 그러나 일단 온 신체의 매 층차가 전부 공으로 전화된 후 소업은 간단한 일이다. 이전에 사부님께서도 말씀하신 적이 있는데 고층차로 수련한 후 만약 업력이 모자라면 가족과 친구를 대신해 소업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이런 상황이다. 사실 당신의 원시적 생명이 얼마나 높은지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당신의 매 층차의 신체가 수련해 낸 것을 가리킨다. 그렇지 않으면 그렇게 거대한 업력이 내리 누르고 구세력이 업력을 수련하지 않는 신체에 조금 더 많이 밀어주면 그 층차의 신체는 금방 망가진다. 이것은 왜 표면 육체가 고에너지 공으로 전화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말한다. 우리 수련은 기타 법문과 다르다. 자신이 있는 현재 층차에서 인식했는데 우리는 중간에서 양쪽 방향으로 수련한다. 하지만 삼계에 이르러 즉시 늦추어지는데 왜 그럴까? 그 중 한가지 원인은 바로 우리의 육체가 아직 전화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야 온몸이 고에너지로 전화되는가? 자신에 대한 일체 집착심을 버리고 선천적 자신이 생명의 전부를 주재하게 해야 하는데 우리의 가장 표면적인 사상과 신체를 포함해서다.

우리가 후천적으로 형성된 ‘자아’로 법을 인식하는 것과 우리가 선천적 자신으로 법에 입각하여 법을 인식하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그때는 다시 관을 넘고, 소업하며, 모순이 있고, 박해와 반박해 중에 뒤엉켜 있지 않는다. 우리는 끊임없이 중생을 거둬들이고 그들에게 고난의 게임은 이미 끝났다고 알려야 하며 우리의 도선(度船)이 이미 출항하고 있고 우리는 제자리로 돌아가려 한다고 알려야 한다. 집에 돌아갈 사람은 빨리 배에 타라! 집으로 돌아간다. 바로 1만년의 기다림을 통해 오늘 함께 집으로 돌아간다! 집으로 돌아가자! 다음으로 우리의 수련상태는 아마 신기한 상태가 대량으로 나타날 것이다. 다 알고 있지만 반드시 완전히 원만에 대한 집착심을 내려놓아야 한다. 하지만 우리 법문은 점오(漸悟)이고 점오상태와 개공이 오기 전에 우리는 반드시 확고하고 명확하며 광명정대하게 자신의 점오와 개공을 맞이해야 한다. 우리는 그냥 수련만 할 수 없고 영원히 수련하고 원만하지 않을 수 없다!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할 때가 됐다.

높은 수준의 조용함(靜)과 사유하지 않은 상태는 바로 수련인이 자아를 내려놓고 사람의 껍질을 벗어 버린 후에 반드시 나타나는 상태다. 사당이 만약 한 속인을 캄캄한 방에 7일간 가두어 놓았다 풀어주면 나오는 사람은 반드시 미치게 된다. 오늘날 속인은 근본적으로 텅 빈 조용한(空靜) 상태를 참기 어렵다. 그런 적막함과 공(空)은 속인을 미치게 한다. 우리 수련의 경지와 층차가 더욱 높을수록 조용함의 질적 수준은 더욱 높다. 조용함이야말로 고층생명의 진정한 아름다움 상태다. 다만 저층 생명만이 바쁘고 소란스러운 중에서 정욕의 기쁨을 누린다. 만약 한 수련인이 자아를 내려놓으면 점차 완전히 생각하지 않고 조용한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

만약 우리가 정말로 사람에서 걸어 나와 뒤돌아보면 ‘3가지 일’ 이외의 모든 사람과 일은 전부 속인 중의 일로써 다시는 우리 마음을 사로잡을 수 없다. 일단 자아를 내려놓고 사람과 결별하면 우리는 신불이 세간에 행하는 순정한 상태가 되며 비할 바 없이 장엄하고 내뿜는 것은 자비의 에너지장으로 주위 사람을 스스로 자신도 모르게 개변시킨다.

최근 몇 년간 구세력은 수련생 중에서 적지 않게 사오한 사람을 만들어 냈다. 만약 정말로 그런 순정한 상태에 들어서면 대법을 지키고 사오한 사람을 배척할 수 있으며 아주 큰 변화가 나타날 수 있다. 그런 사오한 사람도 수련하려고 한다. 우리는 이전에는 대부분 사람의 방법으로 무엇을 해야 현재 곤경을 개변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사부님께서는 벌써 “하나의 부동(不動)이 만(萬)가지 움직임을 제약하는 것이다!”(미국중부법회설법)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우리는 왜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안을 수련하여 밖을 안정시키자”(정진요지-안을 수련하여 밖을 안정시키자)는 법리를 실험해 보지 않는가? 도대체 누가 우리 내부에 분쟁이 있기를 좋아하고 완전히 한 마음이 된 상태에 도달하는 것을 싫어하는가? 우리는 왜 감히 사오한 사람을 우리 중간에 남겨 정체의 강대한 순정한 마당으로 그들을 정화하지 못하는가? 그러기에 관건은 우리가 수련해 내야 한다! 우리가 수련해 내지 못하면 바로 시비에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지 않으면 ‘불광이 널리 비추지’ 못할 것이 아닌가?

뒤돌아보면 그때 우리는 어떻게 감히 우리 ‘자아’에 가득 채운 관념과 집착심으로 다른 사람과 얼굴을 붉히고 쟁론하며 심지어 마음이 평온치 않을 수 있는가? 우리가 어떻게 감히 이렇게 고난의 인간 세속에 빠져있는가? 심지어 우리는 이렇게 많은 해를 수련해왔는데 왜 여전히 수련생 중에서 시비를 일으키고 마음이 안정되지 못하며 도처에 뛰어다니는 등등을 하는가. 우리는 자신이 도대체 누구인지 생각해 본적이 있는가? 우리가 이렇게 할 때 이 일을 가동시킨 자아에 깊이 숨어있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우리가 법에 있지 않을 때 돌이켜보면 정말로 작디작은 한 가지 집착심도 제거할 수 없다. 구세력은 수시로 우리 몸에 하나의 작은 집착심을 심어놓아 완전히 우리를 가두어 놓을 수 있다. 정욕을 심어 놓고, 명리를 구하는 마음을 심어놓으며, 환희심을 심어놓고, 과시심을 심어놓는 등등이다. 하지만 완전히 법에 입각해 있을 때 집착심을 제거하려면 너무나도 쉽다.

어떤 생명도 최후에는 작디작은 톱밥 같은 자신을 대법의 쇳물에 넣어 동화시켜야 한다! 그렇다! 어떤 사람이든, 당신이 원만하든 대 신통이 있든, 아니면 얼마만한 위덕이 있든 중생을 얼마나 구도했든지 간에 최후에 당신은 반드시 대법에 동화해야 한다. 우리는 대법의 그 자비하고 순정하고 거대한 진선인(眞善忍)의 에너지로 우리를 쇳물에 녹이는 것처럼 동화시켜야 한다. 하지만 당신을 대법에 동화시키려면 마지막 반드시 완전히 자아를 내려놓아야 한다!

하나의 작은 톱밥처럼 자신을 대법의 쇳물에 넣자!

(끝)

문장발표: 2011년 11월 25일
문장분류: 제8회 법회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1/11/25/248897.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