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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년 동안 혼자 수련하면서 적막을 극복한 체험

글/ 대륙 대법제자

[밍후이왕] 막 법을 얻었을 때 나는 20여세의 꽃다운 나이에 외모가 예뻤다. 게다가 기품이 있고 학력도 높았기 때문에 속인 사상의 교란으로 인해 마음속에는 아름다운 사랑에 대한 갈망을 계속 내려놓지 못했다. 비록 이 몇 년 동안 이 방면에서 어떠한 그릇된 일을 하지 않았고 또 어떤 이성과 어떠한 비정상적인 교제를 하지 않았지만 여러 번 정의 교란을 받았다. -본문 작자

존경하는 사부님 안녕하세요!수련생 여러분 안녕하세요!

나는 1999년 3월 초에 법을 얻은 노제자이며 법을 얻을 시기에 대학 연구생이었다. 법을 얻고 얼마 후 사악은 미친 듯이 박해를 시작했다. 당시 몇 명만 알고 지냈던 수련생들도 수련을 하지 않거나 사는 곳이 달라져 서로 왕래할 수 없었다. 그때부터 나는 거의 혼자 수련하는 상태였다. 13년 동안 비록 옆에 수련생이 없었지만 나는 사부님께서 시시각각 보호해 주시고 점화해 주심을 알고 있었다. 법이 늘 옆에 있음은 나의 수련의 최대 보장이 됐고 끊임없이 정진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적막, 고독함을 제거하는 마음

사부님께서는 ‘무엇이 대법제자인가’ 중에서 과거에 산굴에서 수련하는 사람들에 대해 말씀하셨다. “그는 어떠한 일을 겪어도 상의할 사람이 없으며 또한 말을 나눌 사람도 없었으며 모두 그 스스로 바른 깨달음 속에서 걸어 지나와야 하는데 걸어 나오지 못한다면 곧 끝장인 것으로 얼마나 어려웠겠는가! 가장 두려운 것은 장기간 적막 속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은 무엇을 가장 두려워하는가? 적막이다. 적막은 사람을 미치게 할 수 있고, 적막은 사람으로 하여금 과거의 일체를 잊어버리게 할 수 있으며, 적막은 심지어 사람으로 하여금 언어를 잊어버리게 할 수 있는데 가장 두려운 고통 중 하나이다.”(무엇이 대법제자인가)

비록 나는 산굴에서 수련하지 않았지만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고생을 깊이 체험할 수 있었다. 십 몇 년 동안 긴 수련 중에서 나는 주위 환경 때문에 적막하지 않았고 고독하지 않았지만 어떠한 일에 부딪혔을 때 교류할 사람이 없어서 적막하고 고독했다. 십 몇 년 동안 많은 시간에 일을 하는 이외에 나는 여러 도시 셋방에서 법공부하고 연공하며 발정념하고 진상자료를 제작해 밖에 나가서 배포하고 또 법을 실증하는 문장을 쓰기도 했다. 일을 하는 이외에 나와 거의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법을 읽는 이외에 나는 늘 며칠 동안 말을 하지 않는다. 기억에 몇 번이나 장기 휴가를 내고 다시 회사에 출근하면 자신의 언어 능력이 떨어지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정말 어떻게 말을 하는지 몰랐다.

오랫동안 나는 ‘만약 내 옆에 가족이나 친구가 같이 수련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다면 내가 무슨 문제가 있어도 그들과 교류할 수 있으니’라고 생각했다. 특히 일찍 박해를 직면하면서 직장을 잃고 예전 동료도 잃어버렸다. 알고 지내던 모든 사람들은 나를 설득하고 심지어 욕을 하고 구타했다. 거처도 없는 상황에서 나는 늘 혼자서 눈물로 얼굴을 씻었다. 수련, 일, 공부, 생활 각 방면에서 부딪힌 어떠한 문제에서도 나를 진정하게 이해해주는 사람이나 교류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때 나는 마침 학교를 막 졸업해 생활 경험도 매우 적었고 매우 단순했으며 법에 대한 이해도 매우 얕았다. 많은 때, 자신이 고통에 억압당해 붕괴되는 것 같았다. 어떤 때는 정말 참을 수 없으면 잘 아는 사람과 말을 해봤지만 내가 대법제자인 것을 모르는 사람과의 대화는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발견했다. 나와 잘 아는 친구에게 말했을 때 그들은 모두 속인이고 말하는 것은 모두 속인의 것이며 속인의 이치, 속인의 사상, 속인의 처리방법이었다. 왕왕 그들과 말할수록 마음은 더욱 풀리지 않았다. 다른 한 방면은 대법제자로서 곤란에 부딪혀 넘어가지 못했을 때 반영해 나온 많은 마음은 모두 부정적인 것이었다. 만약 함부로 그들에게 말하면 그들은 대법에 관념이 생길 것이며 반대로 나에게 수련을 포기하라고 설득할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이후에 더욱더 다른 사람과 말하기 싫었다. 몇 년 동안 나는 정말 괴로웠고 게다가 법공부를 중시하지 않았다. 비록 자신은 매우 ‘정진’한다고 여기고 매일 바쁘게 지냈지만 법공부는 느슨했다. 특히 1999년 사악이 막 박해한 이후에 졸업 논문을 준비하는 동안 1~2달 동안 법공부를 하지 않았다.

휘청거리거나 험난한 것을 많이 겪은 후에야 나는 법공부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다. 2003년 나는 법을 외우기 시작했다. 중간에 박해 당했던 약 1년 이외에 이 몇 년 동안에 나는 멈추지 않았다. 각종 사람 마음이 점점 옅어지고 옆에 같이 교류하는 수련생이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도 점점 옅어졌다. 특히 법을 외우는 과정에서 원래 풀리지 않고 이해되지 않는 문제들이 모두 쉽게 해결됐고 사부님께서도 법의 아름다움을 끊임없이 나에게 펼쳐주셨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법을 외우는 과정에서 나는 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미묘함과 기쁨을 체험할 수 있었고 점차 나는 외로움은 무엇인지 모두 잊어버리게 됐다. 나는 만약 내가 혼자 수련하는 중에서 법을 실증하고 중생을 구도하고 원만을 향해 걸어가는 길을 개척하도록 결정됐다면 나는 반드시 이 길을 잘 걸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전에 풀리지 않는 문제에 부딪히거나 혹은 마음이 괴로울 때, 늘 사람을 찾아 말하고 싶었다. 동창이든, 친구든 말을 하면 홀가분해질 것 같았다. 법을 외운 후, 천천히 이런 마음도 없어졌다. 특히 이후 몇 년 동안 어떠한 힘든 일, 풀리지 않는 일에 부딪히면 나는 사부님의 법상을 마주보면서 사부님께 말씀드린다. 기쁜 일에 부딪혔을 때도 나는 즐겁게 사부님께 알려드린다. 울거나 웃으면서 사부님 법상을 보면서 사부님과 대화할 때 나는 마치 아이 같았고 마치 아버지에게 속마음을 말하는 것 같았다. 그때는 마음이 매우 든든했고 나는 확실히 사부님께서 시시각각 내 옆에서 나를 보살펴주시고 보호해 주신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으며 마음속 일체를 사부님께서 모두 알고 계시는 것 같았다. 사부님께서는 바로 나의 뒷심이고 보장이었다. 기왕 이렇게 된 이상 내가 어찌 들어주는 사람이 있고 없음에 집착하는가? 그러므로 이후 몇 년 동안 나는 매일 충실히 지냈고 계속 낙관적이고 기쁜 마음을 유지했다. 매우 어려운 고비를 직면했을 때, 극히 고독하고 외로운 느낌이 가끔 있기도 했지만 나에게 거의 영향은 없었다.

이전에 나는 인터넷에서 수련생들이 어떤 곤란에 부딪히면 주위 수련생들에게 발정념으로 도와달라고 요청하는 것을 보았다. 나도 이전에는 매우 부러웠고 곤란에 부딪혔을 때 다른 수련생이 발정념으로 도와주길 간절히 바랐다. 어느 날 나는 갑자기 알게 됐다. 사부님께서 계시는데 나는 왜 사부님께 도움을 청하지 않는가? 이것 또한 자신의 정념을 확고히 하는 하나의 과정이 아닌가? 곤란에서 고비를 넘기지 못할 때 스스로 매우 뒤떨어지고 사부님을 생각할 수 없었으며 사부님께 도움을 청하는 담력이 없었다. 이것은 구세력이 안배한 변이된 사상이 아닌가? 또 다른 수련생도 사부님의 제자이고 수련생들의 도움이 작용을 일으키는 것은 사부님의 위력이 아닌가? 그렇다면 나는 일의 경중(輕重)을 뒤바꿀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 점을 알고 난 후 나는 수련생들이 다른 수련생들에게 발정념을 요청하는 것을 부러워하지 않았고 또 넘기지 못하는 문제에 부딪히면 직접 사부님께 청했다.

법 외우기를 통해 수련의 길에서 장기간 견지

혼자 수련하는데 직면하는 또 하나의 큰 어려움은 왕왕 자신을 느슨히 하기 쉽고 특히 시간이 길어지면 자신의 의지를 느슨히 하면서 정진하지 못하는 것이다. 심지어 환경이 느슨해질수록 더욱더 안일해지기 쉽다. 십 몇 년 동안 수련에서 나도 가끔 게으른 마음이 있었다. 하지만 이런 상태는 하루, 이틀이면 바로 넘어갈 수 있었다. 전체적으로 말하자면 수련의 길에서 나는 줄곧 시간을 다그쳤다. 비록 이틀에 한 번 잠을 자거나 하루에 단 2,3시간 잠을 자는 수련생과 비교하면 나는 매우 큰 거리가 있다. 하지만 나도 거의 매일 시간을 쪼개면서 자신의 매 1분, 매 한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수련의 마음을 느슨히 하지 않았다. 이 점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사부님의 절묘한 안배가 있었기 때문이다.

박해가 막 시작한 후 몇 년 동안 나는 두 번이나 사악에게 박해를 당했다. 거대한 압력, 사악한 형세에서 많은 기타 정법의 길에서 계속 걸어가고 있는 대법제자와 똑같이 나도 자신을 느슨히 할 수 없었다. 이후 이 몇 년 동안 환경이 느슨해졌지만 나는 자신을 느슨히 하지 않고 오히려 법을 외우면서 이로움을 얻었다.

2005년 박해에서 보석으로 나온 후, 나는 사악이 거주지를 감시한다는 이유로 1년 동안 불법적으로 신체 자유를 구속당했다. 그 1년 동안 나는 법을 외우기 시작했고 법을 외우는 그 순간 마음을 굳게 먹었다. 아무리 어려워도 나는 ‘전법륜’을 한 글자도 틀리지 않게(이후에는 또 한 문장부호도 틀리지 않도록 요구) 외우려고 했다. 그러므로 지난 이 몇 년 동안 신경문을 외우고 1년에 한번 집으로 돌아가 부모님을 뵈는 이외에 나는 거의 매일 법을 외우거나 혹은 법을 외워 썼다. 처음에는 몇 번이나 외웠는지 외운 숫자를 세 보았지만 이후에는 세보지 않고 10번만 외워 쓰기로 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나는 여전히 ‘전법륜’을 100% 완벽히 외울 수 없다. 또 전혀 도달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여러 차례, 나도 한 글자도 틀리지 않게 외운 적도 있고 심지어 전체 단락, 전체 문장을 한글자도 틀리지 않고 외울 수 있었다. 하지만 며칠 건너뛰어서 외우면 또 외울 수 없었다. 또 많은 때는 이번에 외울 수 있었지만 다음에 외우면 또 외울 수 없었다. 때로는 또 외우는 것이 너무 뒤떨어졌고 심지어 외울 수 없는 상태도 있었다. 계속 목표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는 계속 이렇게 외웠다. 법을 외우기 시작한 그 몇 년 동안 박해 압력에서 세월은 매우 느리게 지나가는 것 같았다. 이후 이 몇 년 동안 시간에 대해 어떠한 관념도 없어졌다. 매일 출근하고 여유 있는 시간에 법을 외우고 법을 외우는 틈에 발정념을 하고 동시 진상자료를 제작하고 자료를 배포하거나 혹은 문장을 썼으며 이후에 또 인터넷 항목에 참여하기도 했다. 갑자기 어느 날 되돌아보니 자신이 법을 외우면서 생각밖에 7년이란 시간이 흘러버렸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때 나는 더욱더 사부님의 고심한 배치를 체험할 수 있었다. 사부님께서는 내가 계속 법을 외우지 못하고도 오히려 법을 외우겠다는 모순 속에서 끊임없이 법을 외우고 또 끊임없이 법을 외우는 중에서 나로 하여금 주위 환경의 영향을 받지 않고 수련에 정진하는 의지를 느슨히 하지 않도록 안배하신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남녀 간 정의 교란을 제거

혼자 수련하는 중에서 직면하는 또 한 가지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속인 환경에서 남녀 간의 정의 교란이다. 막 법을 얻었을 때 나는 20여세의 꽃다운 나이에 외모가 좋았다. 게다가 기품이 있고 학력도 높았기 때문에 속인 사상의 교란으로 인해 마음속에는 아름다운 사랑에 대한 갈망을 계속 내려놓지 못했다. 비록 이 몇 년 동안 이 방면에서 어떠한 그릇된 일을 하지 않았고 또 어떤 이성과 어떠한 비정상적인 왕래가 없었지만 여러 번 정의 교란을 받았다. 몇 년 전, 속인의 교란으로 나도 상대방에게 정욕을 움직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수련인이라는 것을 기억할 수 있었기에 이 면에서 어떠한 수련인 행위에 부합되지 않는 행동을 할 수 없었다. 설령 상대방이 자신을 좋아하고 자신도 상대방을 좋아하는 것을 명백히 알면서도 표면적으로는 오히려 늘 아무런 일도 없는 것처럼 행동하고 심지어 일부로 그를 멀리했다. 또 나의 선천적으로 지닌 고귀함, 우아한 기품은 사람에게 접근하기 힘든 느낌을 주었다. 그러므로 주위에 있는 이성들이 나에게 부당한 언행을 하는 사람이 없었고 거의 나를 존중했다. 이것은 표면으로만 본 것이다. 법에서 봤을 때, 사부님께서 시시각각 배려와 보호가 있었기 때문에 나는 이 방면에서 문제가 나타나지 않았다. 한 가지 예만 들겠다. 2004년 사악의 마굴 속에서 10여 일이 넘는 연이은 심문, 잠을 못자게 하기, 구타 및 여러 가지 견딜 수 없는 괴로움을 겪으면서도 시종 사악의 요구에 협조하지 않았다. 최후에 한 극히 사악한 자가 나를 위협했다. “하룻밤 시간을 더 주겠다. 만약 내일도 말하지 않으면 몇 명 남자들이 찾아와 당신을 어떻게 할 것이다.” 그때 내 머리는 텅 빈 것 같았고 오직 한 가지 생각이 났다. 나는 사부님께서 보살펴주시니 마땅히 무엇이 있어야 하고 무엇이 없어야하며 사부님께서 나를 지켜주신다고 생각했다. 결과 연이어 며칠 동안 그 나쁜 남자들은 심문실에 오지 않았다. 며칠 후 그가 다시 왔는데 내가 여전히 말하지 않는 것을 보고 매우 흉악스럽게 나를 욕했다. “며칠 동안 내 딸이 갑자기 43도까지 열이 나지 않았으면 나는 절대로 너를 가만히 두지 않았을 거야.” 이전에 심문 중에서 그에게 5,6세 되는 딸이 있다는 것을 알았는데 그녀는 그의 일생에서 유일하게 관심을 갖는 사람이고 다른 누구에게도 관심이 없다고 말한 적이 있다. 나는 모두 사부님께서 나를 보호해 주신 것임을 알고 있었다.

수련 전, 속인의 말로 하면 나는 착한 여자였다. 하지만 수련 후 법으로 가늠하면 매우 뒤떨어진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릴 때부터 연예소설을 좋아했고 머릿속에는 늘 왕자와 공주의 아름다운 모습을 그렸으며 자신에게 잘해주는 ‘백마탄 왕자’를 찾아 서로 같이 살려고 생각했다. 아울러 사상 중에서 많은 이 방면의 업력이 형성되었다. 수련 초기인 2002년, 사상 업력의 교란 하에 곳곳에서 나를 배려해주고 좋아하고 또 대법을 동의하는 이성과 움직이지 말아야 할 정을 움직였다. 하지만 그는 가족이 있는 사람이었다. 나는 근본적으로 이런 사상이 없어야한다는 것을 알고 행위에서 어떠한 부당한 행동을 하지 않았지만 사상 중에서 이런 업력의 교란은 매우 컸다. 어느 날 저녁, 막 누워 잠이 들었는데 머릿속에서 매우 악한 여자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떠들썩했는데 매우 놀라웠다. 나는 이것은 사상업력이라 제거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컴퓨터를 열고 사부님의 법상을 열었다. 나는 ‘사부님께서 나를 보호해 주시니 아무것도 나는 두렵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해서야 안심하고 하룻밤을 잘 수 있었다. 이후에 또 많은 단련과 심성 교란을 겪게 되면서 비로소 이 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

나는 색욕심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정말 큰 곤두박질을 했다. 2007년 나는 부동산에 부탁해 집을 찾으려 했다. 그 주택 중개사는 한 중년 여성이 운영하고 있었다. 몇 번 만난 후, 그녀는 내가 아주 좋다고 하면서 남자 친구를 소개해주겠다고 했다. 비록 이치로 봤을 때 나는 이런 일을 받아들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행동과 사상에서 그것을 배척하지 않았다. 입으로는 “나는 남자 친구를 만나고 싶지 않아요”라고 말했다. 하지만 오히려 그곳에 앉아 있으면서 움직이지 않았고 그녀 말을 계속 듣고 싶었다. 결국 그녀는 나에게 “상대방은 40여세 남자인데 모 대형 국영기업에서 부문경리로 있어요. 집도 있고 차도 있고 월급은 한 달에 1만 위안이 넘어요. 이혼을 했는데 10여 세 되는 아이가 있어요”라고 말했다. 그녀는 나에게 그 남자는 예쁜 여자만 좋아한다고 말했다. 나는 당시 정말 몽둥이로 심하게 맞은 것처럼 모욕을 당한 느낌이 들었고 매우 실망스러웠고 속상했다.

그녀의 중개사에서 돌아올 때 나는 자신이 큰 곤두박질을 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 교훈은 너무나 컸다. 내가 이 마음을 내려놓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역겨운 일을 초래했음을 알았다. 이후 며칠 동안 나는 모욕을 당했다는 강렬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자신이 반드시 이 마음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때 이후, 나에게 남자 친구를 소개해준다면 나는 단호히 반대했다.

하지만 정말 나에게 뼈에 사무치도록 괴롭게 한 것은 한 수련생에 대한 정이었다. 최근 2년 인터넷에서 법을 실증하는 일을 하면서 나는 나이가 비슷한 이성 수련생을 알게 됐다. 그 수련생은 매우 정진하고 확고한 대법제자였고 일찍 여러 번 베이징에 가서 법을 실증하고 시종 매우 정진했다. 법을 실증하는 일을 단독으로 하기 전에 나는 이미 그를 한 동안 알고 있었고 그에 대한 느낌도 좋았다. 다만 자신이 그와 비교하면 거리가 너무 멀었기 때문에 설령 가끔 그에 대해 좋은 느낌이 있어도 감히 많은 생각을 하지 않았다. 연락하기 시작한지 얼마 후 어느 날, 1초 만에 거대한 정의 물질에 짓눌려 호흡하기도 매우 힘들었다. 뒤이어 그 한 주 동안 나는 완전히 정 때문에 번뇌했다. 음식에 대한 모든 욕망을 잃어버리고 마음속으로 이 수련생만 생각했다. 사부님과 수련도 생각나지 않았고 설령 가끔 생각났지만 사부님께서는 이런 물질로 인해 나와 아주 멀고 아주 먼 곳에 계신 느낌이 들었다. 표면 모습으로 보았을 때 마치 첫사랑에 빠진 소녀 같았고 얼굴에는 늘 사랑에 홀린 소녀처럼 감출 수 없는 웃음을 띄고 있었다. 나는 수련의 각도에서 보았을 때 자신의 웃음이 이상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전에 비록 정에 교란을 당했고 당시 많이 힘들었지만 이번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주 오랫동안 내 사상 중에는 헛된 생각을 하게 됐고 사부님의 어떤 설법도 생각나지 않았다. 게다가 당시 자신의 이런 사상은 잘못된 것이 아니라고 여겼다. 상대방은 수련인이기 때문에 마치 사오한 것처럼 집착심을 따라 이것은 사부님의 안배라고 생각했다. 이런 상태는 계속 2,3개월 동안 지속됐다. 마음속으로는 이런 상태가 잘못됐다는 것을 명백히 알고 있었지만 넘을 수 없었고 넘을 마음도 없었다. 그 정을 내려놓으면 마음을 후비는 고통이 있을 것 같아서 정을 내려놓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어느 날 나는 점점 이런 사상은 내가 아니고 나는 반드시 이 고비를 뚫어야한다는 것을 알고서야 마음을 굳게 먹고 이런 사상을 배척하기 시작했다.

이런 정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나는 수련인의 정념은 극히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첫째 주 내가 밥을 먹을 수 없고 이 물질로 숨을 잘 쉴 수 없을 때, 내 사상 중에서 ‘다른 수련생을 해칠 수 없다’는 일념이 생겼다. 이 일념을 내보낸 후 나는 단번에 숨을 쉴 수 있었고 그런 물질의 압력도 그렇게 크지 않았다. 이후에 많은 때 나는 이런 정에 이끌려 참을 수 없어 그 수련생에게 이런 생각을 표현하려고 할 때, 나는 늘 ‘나는 다른 수련생을 해칠 수 없다. 나는 다른 수련생에 대해 책임지고 자신에 대해 책임지고 또 우리 서로 세계의 중생에 대해 책임지고 더욱 중요한 것은 법에 대해 책임져야한다’는 일념이 나왔다.

이 과정에서 사부님께서는 끊임없이 이런 마음을 제거하도록 나를 도와주셨다. 처음에 고비를 넘기지 못했을 때 그런 거대하고 무거운 압력을 직면하면서 나는 여러 번 사부님 법상 앞에 꿇고 앉아 “사부님, 제자를 도와주세요. 그런 사악한 사상은 제가 아닙니다. 나는 사부님의 좋은 제자가 될 것이며 이런 사념(邪念)에 교란당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하면서 울었다. 매번 나는 모두 사부님의 강대한 가지(加持)를 느낄 수 있었다. 동시 나도 늘 지속적으로 1시간 심지어 더욱 긴 시간 동안 이것들을 겨냥해 발정념을 했으며 뚜렷하게 그것들이 제거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막 시작한 그 몇 개월, 매일 걱정하는 가장 중요한 일은 바로 퇴근해서 집으로 돌아가 그 수련생의 편지를 확인하는 일이었다. 비록 그 수련생은 쓰지 말아야 할 말을 쓰지 않았고 모든 편지도 수련과 법을 실증하는 것과 관계가 있었지만 나는 어쨌든 마음을 내려놓지 못했다. 이후에 점점 나는 연속 2,3일 그를 집착하지 않았고 점점 나는 더욱 긴 시간동안 그를 집착하지 않았다. 1년 반 동안 나는 이런 집착하고 집착하지 않는 과정에서 반복적으로 고비를 넘겼다. 어느 날이 되어서야 나는 그의 이름을 보았는데도 갑자기 생소했고 마치 그와 아무런 일도 발생하지 않았고 그렇게 긴 시간동안 편지를 쓴 것 같지도 않았다. 다만 희미하게 그와 얼굴이 익숙했다는 기억만 남아 있었다. 현재 우리는 여전히 법을 실증하는 일 때문에 서로 왕래하고 협조하지만 나는 이미 매우 평범해졌다. 설령 가끔 나쁜 마음이 반영되어 나왔지만 나는 단번에 그것을 분명히 가리고 아울러 분명히 가리는 동시에 직접 정념을 발해 그것을 제거했으며, 그것은 이미 완전히 나를 교란할 수 없게 되었다.

정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나는 정념을 발하면서 그것은 사실 일종 외래 물질이고 우리가 선천적으로 원래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다. 가장 뚜렷한 체험은 그 수련생과 반 년 동안 왕래하면서 내가 반복적으로 고비를 넘는 중에서 최후에 진정하게 분명히 그 사상들이 내가 아니라는 것을 구분했을 때 나타났다. 어느 날 저녁, 나는 이런 광경을 보았다. 그날 12시 정념을 발하고 나는 누워서 휴식하려고 했다. 잠이 든듯 만듯했을 때 나는 뚜렷하게 자신이 혼자 조용히 침대 위에 누워있는 것을 보았다. 점점, 점점 나는 마치 무엇을 내 몸에 지니고 있는 것 같았는데 이런 느낌은 점점 더 뚜렷해졌고 점점 더 뚜렷해졌다. 최후에 나는 기형적인 긴 머리 여자 귀신을 보았다. 그녀는 바짝 내 몸에 붙어있었고 나의 입과 몸을 마주 대하고 있었으며 마치 나의 다른 한 쪽 육체 같았는데 나와 같이 한 몸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내가 그것을 의식했을 때 나는 매우 역겹고 두려웠다. 나는 “사부님”을 외쳤고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를 읽었다. 나는 그것을 내 몸에서 밑으로 발로 차면서 밀어냈다. 그것은 마치 완전한 형상이 없는 껍질처럼 내 다리 밑으로 내려갔다. 그것은 이렇게 사악했다. 나를 떠날 때 그것은 괴롭게 몸부림치며 길고 긴 손톱이 자라난 검은 귀신의 손으로 내 목을 죄려고 했다. 이튿날 저녁에 겪은 이 일체를 기억하면서 나는 이것이 바로 그 색욕지심, 그런 물질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정말 마치 귀신처럼 나의 공간마당에서 생활했다. 내가 색욕심을 명백하게 알고 색욕심을 제거했을 때, 그것은 도망갈 곳이 없고 소멸될 수밖에 없다.

사람이 고비를 넘지 못할 때, 그런 정을 자신으로 여기는데 사실은 전혀 아니다. 우리가 선천적으로 탄생됐을 때는 이런 사악한 사상이 없었고 다만 후천적으로 길고 긴 세월에서 오염된 것이다. 혹은 사악한 구세력이 고의적으로 이런 사악한 것들을 만들어 낸 것이며, 바로 이 일생에 사용해 이 방면에서 우리를 교란하고 훼멸하려고 한다. 우리가 정말 분명하게 그것을 가려낼 때 그것은 사실 아무것도 아니다.

자아를 포기하는 것을 배우다

사부님께서는 ‘로스앤젤레스 시 설법’에서 “바로 대법제자가 잘못이 있을 경우 남이 말하는 것을 싫어하며 누구도 말할 수 없는데 말만 하면 야단이다. 옳을 때 다른 사람이 의견을 제기하면 좋아하지 않고 틀려도 다른 사람이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며 말을 하기만 하면 바로 좋아하지 않는다. 이 문제는 이미 상당히 심각해졌다”라고 말씀하셨다.

줄곧 나는 자신은 이 방면의 마음이 없다고 여겼다. 하지만 왕왕 모순이 심령을 건드리지 않으면 고험할 수 없다. 최근 2년 동안 수련생과 인터넷으로 협조하는 과정에서 서로 간에 날카로운 모순 충돌 중에서 나는 점점 자신에게 이 방면의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을 알았다. 오랫동안 혼자 수련하는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법을 실증하는 일도 다른 사람과 상의할 필요도 없었고 또 다른 사람의 의견도 구하지 않고 여태껏 자신이 줄곧 결정했다. 나는 보통 자신이 좋다고 여기고 중생구도에 작용을 일으켰다면 열심히 했다. 하지만 수련생과 협조하는 것은 잘하지 못했다. 늘 수련생과 의견이 통일하지 않는 정황에 부딪혔을 때, 자신의 의견이 부당하거나 혹은 수련생에게 질문을 당하면 곧바로 좋아하지 않았다. 나는 기어이 앞다투어 자신의 의견이 맞고 자신의 의견이 괜찮으며 나의 의견만 채용해야 하고 채용하지 않으면 좋아하지 않고 마음에 상처를 입었으며 심지어 수련생과 모순이 생겼다. 또 기타 방면에 부족함이 있었기에 어떤 때는 수련생과의 모순이 매우 깊었다. 비록 법리에서 자신의 의견, 생각을 집착하지 말아야 하고 법을 중히 여겨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당시에는 고비를 넘지 못했다. 나중에 자세히 분석하자 이 배후에 뜻밖에 많은 집착심이 숨어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예를 들면, 체면을 중시하는 마음인데 자신의 의견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얼마나 창피한가라고 생각했다. 자아를 실증하는 마음도 있었는데 습관적으로 자신이 법을 실증하고 문장을 쓰고 진상자료를 배포하든 모두 표면적인 성과를 볼 수 있었다. 작품이 발표되거나 혹은 자료를 배포하거나 혹은 세인이 대법이 좋다는 것을 알고 삼퇴를 하면 성취감이 있고 자신의 고생과 노력이 헛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인터넷에서 진상자료를 제작하면서의 효과는 그렇게 뚜렷하지 않았고 게다가 작품은 모두들과 합작해 완성했기 때문에 무슨 위덕을 세우지 못했다고 여겼다. 또 자신의 의견이 적게 채용되면 위덕이 너무 적다고 여겼다. 자신은 작품 제작 중에서 늘 다른 수련생보다 더 큰 작용을 일으키길 바랐고 이렇게 해야만 위덕을 세울 수 있다고 여겼다. 자신의 의견이 채용되지 않았을 때 시간을 허비했다고 여기면서 실망하고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늘 자신의 의견이 채용되길 바랐다. 이 사상은 특히 엄중했다. 사실 결과적으로는 뿌리에는 여전히 위사(爲私), 위아(爲我)의 마음이 작용을 일으켰던 것이다. 자아를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어떻게 포기해야 하는지 몰랐다. 자신의 의견이 채용되지 않으면 정말 살을 에이고 마음을 후비는 듯한 고통과 괴로움이 있었다.

며칠 전까지 다른 수련생과의 모순이 커지면서 법도 들어오지 않고 상태가 매우 나빠지게 되어서야 갑자기 깨어나면서 진정하게 이 고비를 넘겨야겠다고 결심했다. 진지하게 법공부, 발정념을 하고 안으로 찾고 특히 고통스럽게 고비를 넘는 과정에서 사부님께 도움을 청하자 비로소 관을 넘길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나는 여러 번 사부님의 ‘각 지역 설법2-2002년 미국 필라델피아법회에서의 설법’에서 말씀하신 법을 보았다. “대법제자는 당신들 속인의 세간에서의 수련에 대하여, 당신들은 모두 법리에서 하나의 명확한 인식을 갖고 있다. 바로 속인의 득실(得失)에 집착하지 않으며 당신들이 법을 실증하고 있는 일들을 포함하여서도 여전히 꼭 나의 의견을 내와야 한다는 것이 아니며, 내가 기어코 어떻게 해야만 자신이 비로소 우주 중에서 위덕(威德)을 수립할 수 있다는 이런 것이 아니다. 당신에게 하나의 좋은 방법이 있어서 생각해 내었고 당신이 법을 위하여 책임을 지고 있다면, 당신의 의견을 사용하든 안하든, 당신의 방법을 이용하든 안하든 이것은 결코 중요하지 않다. 만약 다른 사람의 방법이 도달하는 효과가 같으며, 당신은 결코 당신 자신의 것에 집착하지 않으며 반대로 당신이 다른 사람에 동의했다면, 당신이 당신의 방법을 말해내었건 말해내지 않았건 불문하고 신(神)들은 모두 보게 된다. 당신이 보라, 그는 집착하는 마음이 없으며 그는 능히 이렇게 대범하고 관용할 수 있다고 한다. 신은 무엇을 보는가? 바로 이것을 보는 것이 아닌가. 당신이 자신을 강조하는 데 집착하고 있을 때, 당신은 곧 쇠뿔을 파고드는 것이며, 신(神)들이 천상(天上)에서 보며 괴로워해 한다. 비록 당신이 말끝마다 대법을 위해서라고 말하며, 나의 방법이 좋으며, 어떤 목적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하는데, 아마 정말로 그러할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너무 속인화(俗人化) 된 그런 종류의 집착을 해서는 안 된다. 만약 정말로 이 한 점에 도달할 수 있다면 뭇 신들은 모두 이 사람이 정말 대단하다고 말한다. 신은 당신의 방법이 작용을 일으키는 것을 보고서야 비로소 당신에게 층차를 제고시켜 주는 것이 아니라, 이 문제에서 당신의 인식이 제고되어서야 비로소 당신의 층차를 제고시켜 준다. 이것이 바로 바른 법리(正法理)이다. 나에게 얼마의 공로가 있어 나는 어떻게 될 수 있다고 말하는데, 바로 속인에 대하여 말한다면 그러하다. 우주의 법리에 대해서 말할 때 어떤 특징 속에서, 어떤 특수한 환경 속에서 아마 이 한 면을 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제고는 버리는 것이지 얻는 것이 아니다.(열렬한 박수)”

현재 나는 냉정하게 이런 문제를 대할 수 있게 되었다. 나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 나는 바르게 대할 수 있었고 자신에게 잘못된 곳이 있는지 찾아본다. 만약 의견을 제출할 때 다른 수련생의 의견도 중생 구도하는 목적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태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가끔 없어야 할 나쁜 마음이 생기기도 했지만 나는 매우 명백하게 그것은 내가 아님을 알 수 있었고 쉽게 그것을 배척할 수 있었다. 때로는 고비를 넘기지 못할 때, 나는 자신에게 ‘원만 후의 나는 어떤 모습일까?’라고 물었다. 나는 그것은 집착이 없고 누락도 없는 완전히 다른 생명을 위한 생명이며 어떠한 집착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다면 말을 바꿔서 말하면 내가 원만하려면 나는 자신 모든 이런 나쁜 마음을 전부 버려야만 도달할 수 있다. 이 일체의 집착이 모두 없어야하는 이상 나는 지금 그것을 잡고 버리지 못할 필요가 있는가? 이렇게 그것들을 제거하면 더욱 쉽다는 것을 발견했다. 게다가 이 과정에서 나는 진정하게 무엇이 자아를 버리는 것이고, 무엇이 자아를 집착하지 않는지 알게 됐다.

10여 년의 수련 중에서 많은 경험, 많은 체험이 있었고 수련의 어려움을 알고 있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수련 중 걸어가는 길에서 사부님의 보호와 배려가 있었다.

우리는 사부님의 요구에 따라해야만 표준에 도달할 수 있다. 그래야 중생구도의 길에서 정진하고 해이하지 않으며 진정하게 자신과 자신이 있는 세계 중의 중생들을 구도할 수 있고, 비로소 사부님의 중대한 요구를 저버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비하고 위대하신 은사(恩師)님께 감사드립니다! 제자는 영원히 사부님의 말씀을 들을 것이며 사부님을 따라갈 것입니다!

문장발표: 2011년 12월 9일

문장분류: 수련마당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1/12/9/249489.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