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대륙 대법제자 법생(法生)
[밍후이왕] ‘전법륜’을 보고 마음속으로 무엇이든 다 알게 됐다. 나는 가부좌를 할 수 없어 일초 일초씩 시작했다. 어떤 현상은 사부님께서 꿈속에서 나에게 연화하여 보도록 했다. 포륜(抱輪)을 할 때 ‘진선인(眞善忍)’이란 금빛 찬란한 세 글자가 내 앞에 나타났고 백색의 ‘덕(德)’이 내 머리 위에서 날아다니는 것을 보았다. 나는 사부님께서 층층에서 설법하시는 것을 꿈속에서 보고 나에게 연공의 대한 믿음을 북돋워 주시는 것이라고 깨달았다.
법을 얻은 후 우리는 수련하기에 이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을 법리상으로부터 알게 됐다. 나중에 남편은 병이 위중해 심성을 지키지 못했다. 약을 가져갈 때 여전히 회사의 상사를 찾아 비용을 부탁하고 마음속으로 “사부님 저는 또 틀리게 했습니다”라고 참회했다. 그날 저녁 나는 꿈을 꾸었다. 사부님께서는 서계시고 나는 무릎을 꿇고 있었는데 사부님은 나의 기기(氣機-치지)를 가져가려고 하셨다. 당시 사부님께서 손을 흔들자 나는 경련이 날 때처럼 움츠렸는데 그 고통은 언어로 형용하기 어려웠다. 나는 그때 머리를 땅에 찍으며 사부님께 다시는 그러지 않을 것이니 기기를 가져가지 말아달라고 빌었다. 사부님께서는 손을 놓고 몸을 돌려 법상으로 올라가셨다. 나는 사부님 법상을 책상에 놓고 공양했다. 내가 잠에서 깨어나 눈을 떴을 때 사부님께서 마침 책상 위로 발을 옮겨 딛고 계셨다. 내가 급히 일어나자 사부님의 법상은 변함이 없었다. 나는 눈물 투성이가 됐는데 이마는 계속 아팠다. 이 일을 통해 나는 사부님께서는 진짜 부처이고 수련은 엄숙하다는 것을 진실하게 깨달았다.-본문에서
사부님 안녕하십니까?수련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8회 대륙대법제자 교류회를 빌어 나는 15년간 수련노정을 써내 사부님께 보고하고 수련생들과 교류하려 한다.
대법을 얻고 심성을 수련하고 집착을 버리다
96년 어느 날 이웃은 나에게 ‘전법륜’을 한권 가져와서 말했다. “새로운 기공이 나왔는데 보세요.” 저녁에 나는 한번 보고 다음날 책을 그에게 돌려주었다. 우리 둘은 다른 공법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파룬궁 학습 여부를 상의했다. 당시 10년 기공 열조 중 나는 무엇이든 다 배웠고 어떤 기공학습반이든 전부 참가했다. 정말 사부님 말씀처럼 졸업장이 수두룩했다. 진짜든 가짜든 전부 연마했는데 모두 병을 치료하고 몸을 건강히 하는 것들이었다. 연마해도 제고하지 못하자 나는 나중에 어디에도 참가하지 않았다. 사부님께서 베이징에서 수차례 전수반을 여신다는 소식을 듣고도 참가하지 않았다. 기회를 놓쳤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마음을 도려내도록 후회된다. 사부님께서는 아마도 한 명의 제자라도 떨어지게 하지 않으려고 천방백계로 나를 끌어들이신 것 같다.
두 번째 날 저녁, 나는 소풍을 하면서 공원을 지나다 많은 사람들이 연공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음악소리는 귀에 끊이지 않고 들렸으며 나를 강렬하게 이끌었다. 이웃은 내가 하는 공도 잘 연마하고 있으니 하지 말라고 했다. 돌아온 후 저녁 내 내 귀에서 그 음악소리가 들렸다. 다음날 나는 연공장에 갔다. 당시 한 수련생이 나에게 연공동작을 한번 가르쳤다. 집에 돌아온 후 나는 또 한 번 연마했다. 저녁에 잠을 자는데 법륜세계로부터 희고, 노랗고, 금빛이 나는 3개의 큰 파룬이 연속 내 몸으로 날아왔다. 아주 장관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파룬궁에 대한 믿음을 확고히 하고 기타 공법을 포기했다.
나중에 보도원은 동영상 학습반을 10일 열었다. 그때 매일 설법을 들고 돌아오는 길에 몸이 날 것처럼 가볍고 천목에서 작은 파룬이 돌았다. 일체 현상이 내 몸에서 모두 나타났다. 나중에 나는 10여년 보관한 각종 기공책을 모두 태워버리고 확고히 대법 수련의 길에 들어섰다. 나는 평생 경쟁심이 강했다. 사람들은 나를 마음이 좋고 할 말이 있으면 바로 하며 유능하고 다른 사람 돕기를 좋아한다고 했다. 하지만 이룬 일이 없었고 좋은 일을 해도 잘했다는 말을 들지 못했으며 온 몸에 병만 남았다. ‘전법륜’을 보고 무엇이든 다 알게 되어 나는 사부님의 사진을 보며 말했다. “사부님, 사부님 책에서 저를 말씀하셨습니다. 무슨 기공책이든 다 보고 사람들에게 병을 치료해주었으며 회사에서 모범 직원을 뽑을 때 명예와 이익을 위해 다투었습니다.” 나는 가부좌를 할 수 없어 일초 일초씩 시작했다. 어떤 현상은 사부님께서 꿈속에서 나에게 보여주셨다. 포륜(抱輪)을 할 때 ‘진선인(眞善忍)’이란 금빛 찬란한 세 글자가 내 앞에 나타났고 백색의 ‘덕(德)’이 내 머리 위에서 날아다니는 것을 보았다. 나는 사부님께서 층층에서 설법하시는 것을 꿈속에서 보고 나에게 연공에 대한 믿음을 북돋워 주시는 것이라고 깨달았다.
남편은 96년에 암에 걸렸다. 당시 손자는 아직 어리고 나도 일자리가 없어 생활이 너무 어려웠다. 남편이 입원했을 때 한 병실에 있는 친구가 회사 상사였는데 그는 입원비와 영양식품비를 모두 회사로 청구했다. 그는 동정심으로 우리들에게도 편리한 조건을 제공했다. 나는 어째든 회사 돈이므로 기쁘게 받았다. 법을 얻은 후 우리는 수련하기에 이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을 법리상으로부터 알게 됐다. 나중에 남편은 병이 위중해 심성을 지키지 못했다. 약을 가져갈 때 여전히 그 상사를 찾아 비용을 부탁하고 마음속으로 “사부님 저는 또 잘못했습니다.”라고 참회했다. 그날 저녁 나는 꿈을 꾸었다. 사부님께서는 서계시고 나는 무릎을 꿇고 있었는데 사부님은 나의 기기(氣機)를 가져가려고 하셨다. 당시 사부님께서 손을 흔들자 나는 경련이 날 때처럼 움츠렸는데 그 고통은 언어로 형용하기 어려웠다. 나는 그때 머리를 땅에 찍으며 사부님께 다시는 그러지 않을 것이니 기기를 가져가지 말아달라고 빌었다. 사부님께서는 손을 놓고 몸을 돌려 법상으로 올라가셨다. 나는 사부님 법상을 책상에 놓고 공양했다. 내가 잠에서 깨어나 눈을 떴을 때 사부님께서 마침 책상 위로 발을 옮겨 딛고 계셨다. 내가 급히 일어나자 사부님의 법상은 변함이 없었다. 나는 눈물투성이가 됐는데 이마는 계속 아팠다. 이 일을 통해 나는 사부님께서는 진짜 부처이고 수련은 엄숙하다는 것을 진실하게 깨달았다.
그때부터 나는 자신을 진정으로 수련하는 사람으로 대하고 언제나 법의 표준으로 자신을 요구했다. 아울러 남편의 치료 기간에 대법을 홍보했다. 우리를 만난 사람들에게 대법의 아름다움을 알려주고 접촉한 시간이 짧으면 그들에게 ‘전법륜’을 주고 시간이 여유 있는 사람들은 데리고 인근 연공장에 가서 연공을 하게 해서 연분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법을 얻게 했다. 수련을 통해 나는 일생 추구한 것들이 모두 이 책에 있음을 알게 됐다. 사부님께서는 꿈에서 내 층차를 보여주시며 나를 격려하셨다.
96년에 법을 얻은 후 다시는 춘절만회를 보지 않았고 설날에 시간이 있으면 법을 베끼곤 했는데 2년간 두 번을 베꼈다. 법을 금방 얻고 남편이 입원했을 때 매일 ‘전법륜’을 세 강을 읽고 두 번 연공했다. 남편은 2009년에 사망했는데 장례를 치를 때도 매일 변함없이 잠자기 전 세 강을 읽고 두 번 연공했다. 낮에는 평화로운 심태로 남편의 장례식을 속인의 풍속에 따라 끝냈다. 사부님께서는 법에서 인생의 인연관계를 이미 이야기하셨다. 남편은 병으로 십여 년 나를 시달리게 했다. 나는 그에게 진 빚을 다 갚았다. 나는 모든 것을 수련과 대법 진상에 투입했다. 매일 법공부하고, 연공하고, 진상 알리기를 했다. 공부할 때 어떤 관념도 품지 않고 통독했다. “대법(大法)을 잘 배우려고 한다면 어떠한 목적도 품지 말고 배워야만 비로소 옳은 것이다.”(정진요지-법을 배우다) “수련은 자신에게 달렸고, 공(功)은 사부에게 달렸다. 사람의 전반 수련과정은 바로 끊임없이 사람의 집착심을 제거하는 과정이다.”(전법륜) 그러므로 매일 법으로 대조해 집착심을 버리는 과정 중 자신의 제고가 아주 빠름을 느꼈다. 그간 수련은 나에게 나중에 반(反)박해와 조사정법에 튼튼한 기초를 닦아주었다. 일정한 층차로 수련되면 사부님께서 늘 꿈속에서 나타나 보여주셨다.
박해 속에서 확고히 수련하고 진상을 알리다
99년 7월 20일 이후 사악은 사부님과 대법을 비방하고 탄압했다. 그때 매체에서 유언비어를 날조해 비방했는데 마음이 매우 괴로웠다. 그때 나는 연공장에서 연공을 하지 않아 다른 사람들이 몰랐다. 그러므로 사회지역과 파출소에서도 나를 찾지 않았다. 나는 나가서 수련생들을 찾았는데 내가 알고 있던 수련생들이 연마하지 않겠다고 표시했다. 나는 집에서 공부하고 연공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추세를 보자는 생각이었다. 사부님의 경문 ‘누구를 위해 수련하는가’에서 “어떤 사람이 선전도구를 이용해 기공을 비평하기만 하면, 수련생 중에는 곧 동요되어 연마(煉)하지 않는 일부 사람이 있다. 마치 선전도구를 이용하는 사람이 불법(佛法)보다도 고명하다고 여기는 듯하며, 마치 다른 사람을 위해 연마하는 것 같다. 또 어떤 사람은 압력 앞에서 두려워하며 연마하지 않는데, 이런 사람이 정과(正果)를 이룰 수 있겠는가? 결정적인 순간에는 부처마저도 팔아먹을 수 있지 않겠는가? 두려워하는 마음은 집착이 아닌가? 수련은 바로 큰 파도가 모래를 일 듯 남은 것이야말로 금(金)이다”를 보고 “나는 꼭 확고하게 수련을 끝까지 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나중에 우연히 한 수련생을 만났는데 우리 둘은 함께 교류해 종이에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 파룬따파는 정법(正法)입니다, 우리 사부님의 결백함을 밝혀 달라”는 족자를 만들어 저녁에 나가서 길거리에 붙었다. 이렇게 우리는 걸어 나왔다. 어느 날 한 수련생이 파룬따파 방송에서 방송한 녹음테이프를 가져 왔었는데 배포할 수 있다고 했다. 나는 즉시 시장에 가서 공테이프 한 박스를 사왔다. 낮에 우리집에서 녹음테이프를 만들어 저녁에 배포했다. 그리고 베이징에서 남편이 치료를 할 때 만났던 친구들에게 보냈는데 그들은 그것을 받고 모두 너무 기뻐했다.
2000년 말, 한 수련생에게 전화가 왔는데 신정에 악독한 경찰들이 집을 수색할까 두려워 자신의 진상자료 한 보따리를 보관해달라고 했다. 전화를 끊고 좀 지나 그는 가져왔다. 오후에 정리하고 저녁에 한 장도 남기지 않고 모두 배포했다.
다음 날 ‘6.10’두목과 경찰들이 우리집을 찾아왔다. 그때서야 알게 됐는데 그들은 그 수련생의 집 전화를 감시했던 것이었다. 그들은 문에 들어서자마자 “당신도 연공하는가?”라고 물었다. 나는 “그래요”라고 말했다. 그들은 “못하게 하는 것을 당신은 아는가?”라고 물었다. 나는 “모릅니다. 내가 집에서 연공하는데 어느 법에 어긋나지요?”라고 물었다. 그들은 “어제 당신에게 준 전단지는 어디에 있지?”라고 물었다. 나는 “누구도 나에게 전단지를 주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들은 집을 수색하기 시작했는데 반나절 찾아도 찾지 못했다. 결국 녹음테이프를 찾아내고 녹음기와 대법서적을 모두 가져갔으며 나를 파출소로 끌고 가서 책상을 내리치고 눈을 부라리며 반나절 심문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했다. 그들은 화가 치밀어 나를 구류하겠다고 했다. 나에게 서명을 하라고 해도 나는 하지 않았으며 그가 스스로 서명했다. 구치소에 가는 길에 길이 막혀 그들은 경보기를 울리며 지나가려 했는데 내가 경보기가 울리지 말라고 생각했더니 경보기는 정말 울리지 않았다. 그때는 신통의 작용을 모르고 있었다. ‘6.10’두목은 화가 나서 “저번 주에 40만 위안을 주고 산 차가 벌써 망가졌다”고 욕을 했다. 나는 뒤에 앉아 그들에게 “경찰차는 나쁜 사람을 잡는 것이지 좋은 사람을 잡으니 당연히 울리지 않죠”라고 말했다. 그는 화가 나서 계속 욕을 했다. 나는 16일 구금당했다. 나중에 딸이 나를 석방하게 해주었다. 그때부터 나는 ’6.10’에 이름이 걸려 있어 그들의 중점 감시대상이 됐다.
설 기간 거민위원회와 경찰은 내가 베이징에 갈까봐 매일 우리집에 왔다. 설이 지나서 경찰은 나 때문에 집에도 가지 못했다고 원망했다. 나는 “장쩌민을 찾아가세요. 우리집도 당신들 때문에 설을 잘 보내지 못했어요”라고 말했다. 나중에 나는 걸어 나온 수련생들을 서서히 만났다. 젊은 수련생들은 자료를 만들고 나는 나가서 진상자료를 배포하고 진상 알리기를 했다. 2001년 10월 2일 나는 수련생으로부터 2미터 길이의 현수막을 갖고 ‘홍음’을 외우면서 기차에 올라 베이징으로 갔다. 기차표를 끊을 때 사복경찰은 나 보고 베이징에는 왜 가느냐고 물었다. 나는 딸을 보러 간다고 했다. 그는 신분증을 보자고 했다. 나는 “딸을 보러 가는데 신분증을 봐서 뭐해요, 여관에 묵지도 않는데”라고 말했다. 그는 더 묻지 않았다. 베이징 천안문광장에 도착해 보니 온 광장에 경찰뿐이고 관광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나는 그들에게 잡혀서는 안 된다. 지혜롭게 가서 하자고 생각했다. 나는 광장을 두 번 돌면서 발정념하고 동쪽 통로 금수교 출구 난간에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 현수막을 걸어놓고 길가는 사람들이 와서 보는 기회를 타서 공공버스에 올랐다. 오후에 기차에 앉아 순조롭게 집으로 돌아왔다.
2001년 말, 한 수련생이 납치당해 심성관을 넘지 못하고 나를 포함해 18명 수련생의 이름을 자백했다. 컴퓨터 몇 대, 프린터도 빼앗겼다. 심사할 때 나는 결연히 협조하지 않고 그들을 향해 발정념을 했다. 심사를 책임진 경찰은 하루 저녁 나와 마주 앉아있었는데 배를 끌어안고 있었다. 나는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배가 아프다고 했다. 그는 우리의 정념이 일으킨 작용인줄 모르고 있었다. 그는 나에게 ‘천안문 분신’ 사건에 대한 견해를 물었다. 파룬궁을 탄압해서부터 나는 TV를 보지 않았고 속인들이 논의를 해도 듣지 않았다. 그러므로 나도 진짜인지 가짜인지 보지 못했고 다만 틀렸다고만 생각했다. 그리하여 나는 “파룬궁을 연마하면 살생을 하지 않는데 자살도 살생이기 때문에 그것은 확실히 진정으로 수련하는 사람이 아니고 파괴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이 불법 심문은 최후까지도 아무런 증거도 얻지 못했다. 나는 사악에게 말하지 말아야 할 것은 말할 수 없다고 깨달았다.
그들은 우리 대법제자들이 ‘진선인(眞善忍)’을 수련하는 것을 이용해 심문할 때 “파룬궁은 ‘진선인’을 말하지 않소? 당신들은 진실한 말을 하도록 하시오”라고 말했다. 어떤 수련생들은 단번에 다 말했고 다른 수련생의 이름을 전부 자백해 증거만 큰 책 하나가 됐지만 풀려나지 못했고 더욱 심한 판결을 받았다. 경찰은 나에게 말했다. “당신은 저들과 한 무리가 아니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며 베이징에도 가지 않았으니 여기에 서명하고 나가세요.”라고 말했다. 나는 말했다. “서명하지 않겠습니다. 파룬궁을 꼭 수련할 것입니다. 대법은 나에게 좋은 사람이 되라고 했고 동전 하나 팔지 않고 수년간의 병을 낫게 했습니다. 나는 사부님을 본적 없지만 만약 만날 수 있다면 사부님께 무릎을 꿇고 큰절을 세 번하겠습니다! 책은 신화서점에서 팔고 돈은 나라에서 벌어갔습니다.” ‘6.10’두목은 화가 치밀어 말했다. “당신이 서명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지 아시오? 바로 이 책으로 나는 당신을 판결할 수 있소.” 나는 “최악의 결과는 총살이겠죠. 아니면 무기형이겠죠!”라고 말했다. 그 후부터 그들은 나를 다시 심문하지 않고 구치소에 두 달 감금했다가 나중에 노동교양 1년 반 판결을 내렸다. 지금 생각하면 당시 법리에 분명하지 못하고 반박해도 모르며 다만 좋은 사람이 되는 것만 알았다. 대법제자는 감옥살이를 면치 못한다고 생각하고 그들이 가자고 하면 따라 갔다.
2003년 봄 노동교양 만기가 되어 돌아왔다. 사악의 소란을 피하기 위해 나는 부대에서 근무하는 딸을 따라 그가 있는 도시에 가서 외손자를 보살폈다. 막 타향에 와서 책도 없고 매일 연공하고 ‘논어’, ‘홍음’을 외웠다. 아이가 자면 나는 손으로 ‘파룬따파하오’ 종이쪽지를 만들었다. 딸이 저녁에 당직하러 가면 나는 외손자를 안고(8개월) 길을 따라 가며 전봇대에 표어를 붙였다. 나중에 다른 사람의 소개로 현지 수련생을 알게 됐고, 나에게 대법서적과 진상자료를 제공해 줬다. 그때부터 현지 수련생과 협력해 조사정법을 했다. 매일 외손자를 업고 아파트에 가서 진상자료를 배포했다. 나는 그 때 60여세였는데 힘든 줄 몰랐다. 속인들은 내가 걸을 때 발이 땅에 닿지 않는다고 했다. 나는 그들에게 이것이 바로 파룬궁의 신기함이라고 말했다.
정념으로 진상자료를 배포하면 신적(神迹) 나타나
2004년 말, ‘9평공산당’이 출판되자 나는 세인들에게 ‘9평’을 배포하기 시작했다. 그때 많은 수련생들은 우리가 정치에 참여한다고 수련을 하지 않았다. 저녁에 사부님 설법을 공부할 때 “사람이란 제도하기가 매우 어려운 것으로서, 매 학습반마다 언제나 100분의 5, 100분의 10의 사람이 따라오지 못한다. 사람마다 모두 도를 얻기란 불가능한 것이다. 연마(煉)를 견지해 나갈 수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또 여전히 당신이 수련해 낼 수 있는가 없는가를 보아야 하고, 또한 당신이 결심하고 수련할 수 있는가 없는가를 보아야 하는데, 사람마다 성불(成佛)한다는 이것은 불가능하다. 진정으로 대법(大法)을 수련하는 사람이라면 책을 보아도 마찬가지로 같은 상태가 나타날 것이며, 마찬가지로 마땅히 얻어야 할 일체를 얻을 것이다.”(전법륜)라고 하신 말씀을 보고 수련의 길에서 매 하나의 관, 매 발자국마다 모두 고험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사실 대법제자들이 사람의 마음을 쓰지 않고 냉정하게 한번 사고해본다면 곧 명백해진다. 여러분이 중공(中共)에 대한 믿음과 ‘대법제자를 탄압한 중공이 좋은 것’이라는 이러한 인식을 가지고 원만할 수 있겠는가? 절대로 불가능하지 않겠는가”(각지설법7-미국 국제법회 설법)라고 하셨다. 당시 주변의 많은 수련생, 보도원을 포함해 모두 수련을 포기했었다. 법공부를 통해 나는 사부님께서 제자 하나라고 떨어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나는 그들이 다시 수련하기를 기대하고 설득했다. 그들은 여전히 말했다.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정치에 참여하지 말라고 하셨다. 당신들은 지금 공산당을 반대하고 있는데 정치가 아닌가?” 나는 그 말을 듣고 마음이 아팠다. 결국 그들을 돌아오게 할 수 없었고 나중에 보도원을 하던 부부는 병업 가상이 나타나 구세력에게 끌려갔다.
나는 법을 얻으며 매 발자국마다 신적이 나타났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법(法)을 얻으면 신(神)이로다”(홍음-중생을 널리 제도하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발정념, 사람을 구도하는 것은 마음에서 정념이 나타난 것이다. ‘9평공산당’이 출판됐을 때 많은 수련생들은 감히 배포하지 못해 많이 쌓였다. 어떤 수련생은 소책자만 가지려 했고 ‘9평’을 가지려 하지 않아 협조인 수련생은 고민했다. 나는 다른 수련생들이 가져가지 않으면 모두 나에게 달라고 했다. 자료점 수련생들이 만들어낸 것을 하루라도 일찍 배포하면 하루라도 일찍 사람을 구하는 것이다. 나는 외손자를 데리고 다니며 매일 아파트에 배포했다. 외손자가 힘들어 걷지 못하면 아파트 3층에서 기다리라고 했다. 외손자가 3살이 됐을 때 그는 진상자료를 가져다 문에 걸어놓았다. 다 배포하고 돌아가는 길에 나는 손자를 업고 걸으면서 ‘홍음’을 외웠다.
나는 수련생들이 정부, 공안, 고급간부 아파트는 가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즉시 가서 배포했다. 나는 먼 데서부터 아파트를 보면서 “신불(神佛)이 당신들 구하려 왔다”고 말했다. 아울러 누구도 나를 보지 못한다고 발정념을 했다. 막 문에 들어섰는데 창문 덮개가 떨어지며 두 경비원의 머리를 덮었다. 이 기회에 나는 들어갔다. 나는 27층부터 아래로 내려가며 배포했다. 2층까지 배포하고 나니 자료가 없었다. 속으로 좀 더 가져왔더라면 좋았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1층에 내려가 보니 회의실이었다. 자료가 필요 없었다. 대문을 나가려면 경비실을 지나야 했다. 생수를 배달하는 사람이 등기를 하고 있었다. 두 경비는 등기하느라 나를 보지 못했다. 자료를 배포하는 과정을 돌이켜 보면 한 사람도 만나지 못했다. 돌아오는 길에 나는 하늘에 대고 “사부님 보호해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했다. 집에 돌아와 보니 반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가기 전에 나는 아파트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다. 하지만 자료는 알맞게 가져갔다. 33층 아파트를 나는 사실 날아다녔다. 보름 간 사부님의 가호로 나는 신통으로 이 지역 중생들에게 진상의 복음을 보내주었다. 이런 사례는 너무 많다.
(계속)
문장발표: 2011년 12월 2일
문장분류: 8회 법회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1/12/2/249234.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