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明慧법회| 내 생명은 대법이 준 것이므로 나는 걸어 나왔다 (1)

글/둥베이 대법제자 샌즈

[밍후이왕] 나는 대법을 만나기 전에 병마에 시달려 일 년 내내 한 번도 옷을 갈아입지 않고 신발과 모자까지 쓴 채 24시간 내내 잠만 잤다. 대소변과 열 몇 가지의 약을 먹는 일마저 노약한 모친의 도움을 받아야 했으므로 식물인간과 다름이 없었다. 병이 없을 때에는 음식에 아주 까다로워 이것저것 가리는 것이 많았는데 병으로 시달리다보니 살기 위해 좋다는 약은 닥치는 대로 다 먹었다. 심지어 돼지 담즙도 한 세숫대야는 먹었지만 병은 갈수록심해졌다.

때마침 대법을 수련하는 여동생에게서 신기함을 보았다. 동생이 수련을 시작한지 7일째 되는 날 나는 동생에게 연공을 배우고 싶다고 말했다. 동생은 “언니 생각을 누가 알겠어? 이 파룬궁은 진심으로 해야지 조금이라도 거짓이 있으면 안돼”라고 대답했다. 나는 속으로 잘해야겠다고 다짐하고 연공을 배우기 시작했다. 연공을 시작한 첫날부터 약을 먹지 않았는데 몸은 갈수록 좋아졌다. 수련한지 7일째 되는 날 나는 아주 건강한 사람으로 변하여 그 동안 쌓인 더러운 옷들을 전부 세탁할 수 있었다. 대법은 이렇게 나에게 새로운 삶을 주었다.

– 본문작가

큰 병마로 3년간 고생하고, 폐인으로 1년을 지내다가 법을 만난지 7일 만에 새로운 삶을 찾다

자비하고 위대한 사부님 안녕하십니까! 전 세계 동수들 안녕하십니까!

나는 사당의 독해를 심하게 받은 사람 중의 한 사람이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어 수업은 폐지되고 전문적으로 사당문화만 주입 당했다.

나의 일생은 너무나 험난했다. 나는 수차례 하늘을 향하여 무엇 때문에 좋은 사람이 좋은 보답을 받지 못하는지를 한탄하면서 행복하고 아름다운 생활을 갈망했다.나의 남편은 성격이 조급한 편이였다. 그는 입만 벌리면 욕하고 손을 들면 때려 나의 몸은 늘 상처투성이였다. 1995년부터 생활에서 쌓였던 불만과 원망이 질병으로 누적 되었다. 간염, 담낭염, 췌장염, 비대증, 신장결핵, 위궤양, 심근염 등으로 몸은매우 불편했고, 남편에게 따귀를 맞아 고막이 터졌다. 당시 나의 몸은 성한 곳이 없었는데 남편에게 밀려 넘어져 갈비뼈 두 대가 부러진 적도 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해 일을 할 수조차 없었다.

한번은 진료소에서 링겔을 맞다가 어렴풋이 잠이 들어 꿈을 꾸었다. 강물에 아주 많은 사람 크기의 불상이 앉아 있었고 가운데에는 아주 특이한 불상이 있었다. 이 생생한 꿈을 의사한테 말했더니 의사는 상서로운 징조라고 했다. 이 말을 들은 나는 아주 기쁘고 위안이 되어 속으로 ‘그러면 나는 아직 죽지 않겠네.’하고 중얼 거렸다.

이렇게 불편한 몸으로 누워 있는 나에게 남편은 여전히 화를 냈는데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나는 주사를 맞고 좀 나아지다가도 집에 와서 남편을 보는 순간 화가 나서 또 엄중해졌다. 나는 하루라도 편하게 있으려고 할 수 없이 먼 곳에 있는 친정집으로 갔다. 당시 72세인 친정어머니가 나를 보살폈다. 나는 생활비가 전혀 없었지만 남편은 아예 관심도 없었고, 내가 집을 떠난 후 다른 여자를 맞아들여 살았다. 당시 17살인 아들은 아르바이트를 하여 번 돈을 나에게 주면서 병치료에 쓰라고 했다. 15세인 딸은 가게에서 실습생으로 있었다. 아이들은 이렇게 자립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처음에는 혼자서 병원에 약을 사러 다닐 수 있었는데 얼마나 다녔는지 병원 문턱이 다 닳아서 평평해질 정도였다. 매일 약을 살 때마다 이것이 마지막이길 기원했고, 병원에 갈 때마다 이번이 마지막이 되기를 바랬다. 매달 아들이 주는 봉급 500원은 나의 병 치료에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나중에 아들도 장래를 위하여 고향으로 장사하러 떠났다.어렵던 나의 생활은 더욱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아들이 고향으로 떠난 후 나는 딸에게 일자리를 찾으라고 했다. 딸이 있던 가게에서는 매달 봉급을 2백원씩 주겠으니 가지 말라고 사정했다. 딸은 넉 달 동안 일전 한 푼 쓰지 않고 모은 돈으로 의료 기기를 사주었다. 나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끊임없이 의료기기로 아픈 데를 쐬면서 생명을 유지했다. 이렇게 장기간 쐬고 나니 뱃가죽에 염증이 생겨 누런 고름이 흘러나왔다. 나중에는 앉아있을 힘마저 없었다.

일 년 내내 옷 한번 갈아입지 못했고, 24시간 내내 옷과 신발, 모자 등을 단장한 채로 누워서 잤다. 나는 혼자서 생활할 수 없었다. 매일 열 몇 종류의 약을 먹는 것과 대소변은 연로한 모친의 도움이 필요했다.

누군가 산 뱀장어를 먹으면 황달을 제거할 수 있다고 했다. 나는 살기 위해 산 뱀장어를 삼켰다. 처음에 뱀장어를 손에 잡았을 때 부릅뜬 작은 눈과 역겨운 냄새는 말로 형언할 수 없었지만 살아남기 위해 아무것도 가리지 않았다. 눈을 꼭 감고 뱀장어를 목구멍으로 집어넣었다. 뱀장어는 위에 들어간 후에도 꿈틀거렸다. 질병에 시달린 몇 년 동안 산 뱀장어와 물고기를 두세 대야는 먹었다. 전에는 체질이 약하여 음식을 가리는 것이 많았는데 그때는 병치료에 좋다는 것은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먹었다.

돼지 담즙도 한 대야를 마셨다. 이렇게 열심히 노력했건만질병은 갈수록 더 늘어만 갔다. 나중에 나는 하늘땅을 불러도 응답이 없자 ‘설마 이렇게 죽어야 하는가? 병마에 시달리는 지옥 같은 생활이 언제면 끝이 날까?’라고 한탄했다.

자매의 인생은 비슷했다. 이혼한 여동생도 가슴에 물이 차서 친정집으로 오게 되었다. 이렇게 되어 나와 함께 한 방에서 지냈는데 병세는 갈수록 악화되었다. 엄동설한인 섣달에도 그녀는 배에서 고열이 나서 시멘트 계단에 누워 옷을 헤치고 배를 드러내고서야 좀 숨을 쉴 수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여동생을 정신병자인 줄로 알았다. 가여운 노모는 두 중병 환자인 딸들을 돌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웃들도 어머니를보고 안타까워했다. 정말로 눈 위에 서리가 덮인 격이었다.

때는 1998년이었다. 우리가 사는 곳과 멀지 않은 곳에 작은 공원이 있었는데, 어느 날 여동생은 파룬궁 수련생들이 밖에서 홍법하고 연공하는 것을 보았고, 표어 위에 써있는 ‘금강불괴지체’라는 글에서 깊은 진동을 느꼈다. 집으로 돌아온 후 나에게 말했지만 나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당시 나는 당문화에 세뇌되어 그런 것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내가 병마에 시달리고 있을 때 다섯 명이나 와서 기독교를 믿으라고 권했을 때에도 나는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날 날씨가 따뜻하여 모두들 홑옷을 입었다. 그러나 신체가 허약한 동생은 지저분한 오리털 등산복을 입고 연공을 배우러 갔다. 수련생들은 모두 동생이 정신병환자 인 줄 알고 몇 마디를 물어 정신 상태를 확인했다. 연공장에서 돌아온 동생이 이제부터 약을 먹지 않겠다고 했을 때 나는 너무나도 놀랐다. 왜냐하면 동생은 평상시에 약 먹는 것을 한 번도 어긴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말을 들은 나는 ‘정말 하루 종일 약을 먹지 않고 견딜 수 있다면 나도 믿는다.’라고 생각했다. 이튿날 동생은 더 이상 침대에 누워있지 않았고, 정상적인 사람과 같은 걸음걸이로 집 안팎을 드나들었으며 어머니를 도와 구정물 한 통을 밖에 나가 버리기도 했다. 이것을 본 나는 너무나 놀랍고 신기했다. 동생은 앓을 때 섬기던 여우, 족제비, 뱀, 귀신들의 간판을 전부 도끼로 찍어 버렸다. 나는 아주 놀랐다. 도끼 드는 기세만 보아도 건강한 사람 같았다. 동생의 변화를 통해 나는 대법의 신기함을 보았다.

동생이 수련한지 7일째 되는 날 나는 동생에게 연공하고 싶다고 말했다. 동생은 “언니 생각을 누가 알겠어? 여기서는 억지로 끌어오지 말라고 했는데….”라고 말했다. 나는 속으로 ‘너보고 억지로 끌어가라고 한 적도 없는데’라고 생각했지만 일 년 남짓 집 밖을 나간 적이 없어서 혼자서 걸을 수 있을지 걱정되었다. 사부님께서는 내가 연공하고 싶어 하는 마음을 아시고 바로 그날 저녁 우리 집 맞은편에서 단체 법공부를 하게끔 안배하셨다. 나는 간신히 대문을 나서서 (전에 여동생이 집에 가지고 온 사부님의 설법을 들은 적이 있음) 마음속으로 사부님께 법공부장까지 갈 수 있게끔 도와 달라고 청했다. 당시 나는 온 몸에 부종이 있어서 배는 임신부만큼 부어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가부좌 하는 것을 보고 나도 가부좌하고 앉았는데 온 몸이 진땀 투성이가 되었다. 그래도 나는 가부좌를 견지했다. 이것이 나의 수련에서의 첫 발자국이었다. 법 공부가 끝난 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바람이 아주 심하여 온 몸이 땀투성이인나는 감기에 걸릴까 두려웠다. 전에는 온돌방에서 아랫목이 더워서 선선한 윗목으로 조금만 옮겨도 쉽게 감기에 걸릴 만큼 몸이 허약했다.

연공 첫날부터 나는 약을 먹지 않고 의료기기도 사용하지 않았는데 신체는 갈수록 좋아졌다. 수련한지 3일째 되는 날 눈을 감고 있을 때 『전법륜』한 권이 나의 눈앞에 훨훨 날아왔다가 순간 또 날아가 버렸다. 나는 사부님께서『전법륜』책을 보라고 점화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5일째 되는 날 연공장에서 눈을 감을 때 붉은 빛이 나의 머리를 4~5번 도는 것이 보였다. 나는 사부님께서 나의 머리부터 정화해 주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7일째 되는 날 나는 오랫동안 쌓인 더러운 옷들을 전부 씻고 몸도 깨끗이 단장했다. 이렇게 큰 병으로 3년, 폐인으로 1년 동안 지내다가 파룬궁 수련 7일 만에 새로운 삶을 맛보았다. 나는 사부님께 감사하고 나를 구해준 대법에 감사했다. 나와 동생의 생명은 사부님과 대법이 주셨다. 어머니는 기쁜 마음으로 “사부님 감사 합니다! 사부님은 정말로 좋은 분이십니다! 나의 두 딸을 구해주셨습니다!”라고 말했다.

법공부를 통해 나는 대법은 병을 치료하는 것이 아니고 수련인의 신체를 정화해 주기 위한 것임을 알았다. 아울러 수련인에 대한 심성 요구도 아주 높으므로 나는 수련하기로 다짐했다. 우리는 매일 법공부, 연공, 홍법, 법회에 참가했다. 나는몇 만 명의 단체 연공에 참가한 적이 있었는데 그 장면은 아주 장관이었다.

나는 고난 속에서 반생을 방황하다가 마침내 인생의 진정한 이치를 깨달았으며, 왜 이 세상에 오게 되었고 무엇 때문에 이렇게 많은 난을 감당해야 하는지를 알게 되었다. 이렇게 마음속에 맺혔던 많은 매듭이 하나하나 풀려 나갔는데 종래로 있어본 적 없이 홀가분하고, 충실한 행복감이었다.

나와 동생이 대법 수련을 통해 얻은 모습을 보고 온 가족들은 대법의 신기함을 보았다. 잇따라 20여명이 대법과 인연을 맺었다. 이웃들도 직접 대법의 신기함을 보고 대법 속으로 잇달아 들어왔다. 하루는 공원에서 연공하는데 북방의 날씨는 너무 추웠다. 포륜 동작을 할 때 손가락이 얼어붙어 머리 위로 손을 올릴 때 속이 메스꺼웠지만 계속 견지했다. 집에 돌아와 보니 장갑은 벗을 수 없게 되었고 양손의 손가락이 서로 부딪치면 소리가 났다. 손을 좀 녹이니 장갑을 벗을 수 있었다. 손가락은 가슴에 쓰릴 정도로 따가웠지만 얼마 지난 후 아무 일도 없었고 동상도 없었다. 만약 속인이라면 손가락이 얼어 떨어졌을 수도 있었다. 이것은 정말로 대법의 신기함이다.

한 시기 지난 후 아들은 나를 고향으로 데려가려고 찾아왔다. 당시 나는 이 수련 환경을 떠나기 아쉬웠다. 하지만 다른 한 면으로 생각해 볼 때 사부님께서 고향으로 돌아가 홍법하라는 것이 아닌가하고 생각되어 아들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갔다. 아들은 아빠가 이미 다른 여자와 삼년 가까이 살림한 것을 알고 있었고 나도 그 집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나에게 작은 방을 세내어 주었다. 당시 나는 그 지방에 연공장소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집에서 홀로 연공했다. 나중에 연공장소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집과 거리가 멀었다. 아침 5시부터 연공을 시작하면 겨울에는 어둡고 추웠다. 나는 집에서 정공을 끝마치고 곧바로 먼 연공장소로 걸어가서 동공을 끝마친 후 단체 법공부 장소를 찾았다. 이후 매일 법공부하고, 연공하고, 수련생들과 함께 다른 마을로 홍법하러 가서 신 수련생들을 이끌고 연공도 하였는데, 당시 마음은 비할 바 없이 상쾌하고 행복했다.

다음에 계속됩니다.

(밍후이 제8기 중국대륙대법제자 수련체험교류)

문장발표 : 2011년 11월 11일
문장분류 : 수련마당
문장위치 : http://www.minghui.org/mh/articles/24892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