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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수련이 정체 형성의 관건

글/ 헤이룽장 대법제자

[밍후이왕] 최근 몇 년 사이, 현지의 대법제자 가운데 박해형식으로 육신이 끌려가는 병업의 상태가 끊임없이 생기고 있으며, 또 어떤 수련생의 병업 마난은 아주 오랜 시간 지속됐는데 아직도 돌파하기 어려워하고 있다. 주변 수련생들은 오늘은 여기에 가서 발정념을 하고 내일은 저 곳에 가서 발정념 하느라 바쁘다. 어떤 마난 중의 수련생이 법에 있지 않는 것을 보고 난(難) 중에 있는 수련생을 이해해주는 동시에 간혹 원망하는 수련생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래도 그 자신의 정념을 가지는데 의거해야지 남이 해주는 발정념은 바깥의 것일 뿐, 그 자신에게 정념이 없으면 누구도 방법이 없다.” 법으로부터 이해한다면 수련생의 말에 도리가 없는 건 아니지만 사실상 매 수련생이 법에 있지 않는 여러 가지 표현은 바로 현지 정체 수련상태의 체현이기도 하다.

우리 지역의 법 공부 팀의 많은 수련생들에게는 아주 성스럽다는 그런 수련상태가 없다. 일찍 온 수련생 대부분은 속인처럼 한담을 하고, 늦게 오는 사람은 규정한 법공부 시간보다 훨씬 늦게 문을 열고 들어오기에 수련생들의 법공부에 교란을 준다. 어떤 수련생은 책을 갖고 다니기 싫어서 남이 읽는 걸 듣다가는 졸고, 8~9명이 책을 돌아가며 보면서 또 끊임없이 말을 한다. 또 어떤 법공부팀의 수련생은 당신이 많이 읽었고, 그녀가 적게 읽었다 하면서 속으로 딴 생각을 한다. 90여세의 한 노인 수련생은 자기 차례가 되면 정신을 집중하여 잘 읽지만 다른 수련생은 ‘할머니 차례네’라며 속으로 조급한 생각을 갖는다. 어떤 법공부팀은 바로 가정 자료점인데 자료점 수련생이 최대한 제공한 수련 환경을 소중히 여기지 않고 수구하지 않으며, 자료점에 대해 책임지지 않는다. 자료 내원에 대한 말만 나오면 누구누구가 어디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이름을 밝히면서 말하는데 마치 모두 잘 아는 사이인 것처럼 대수로워 하지 않는다.

수년 동안, 많은 법공부팀에 모두 이젠 고정적인 형식이 생긴 것 같은데 수련생들은 법공부만 끝나면 곧 가버린다. 거의 어느 팀에나 정기적으로 앉아서 어떻게 ‘세 가지 일을 잘하고 안으로 수련할 것인가’하는 심성상의 교류가 없다. 어쩌다 수련생들은 잡담 비슷한 토론을 하기도 하는데 많은 수련생들은 여전히 표면적인 일을 가지고 논할 뿐이라는 느낌이 든다. 일부분 수련생은 자신의 사람마음을 보아낼 줄 알고 말한다. “내가 한 이 일에는 질투심이 있다. 나는 과시심이 있다. 당신이 보라. 이건 나의 쟁투심이 아닌가?”이러한 교류가 사람에게 주는 감각 역시 대수롭지 않게 말한데 불과할 뿐,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와 이런 사람마음을 철저히 버리겠다는 것은 아니다.

사존께서는 ‘2005년 법회설법’에서 말씀하셨다. “만약 당신이 나는 알고 있다고 느끼면서, 또 아주 조급해하지만, 그러나 실천 중에서 당신은 진정으로 그것을 극복제압[克制]하지 않고 그것을 억제하지 않았다면 사실 당신은 단지 이런 사상 활동을 오로지 보고 느끼는 것에만 머물러 있을 뿐 당신은 그것의 행위를 억제하지 않았다. 다시 말하면, 당신은 단지 생각만 했지 결코 실천하여 닦지 않았다.”

어떤 수련생의 수련 상태를 보면 늘 사람을 걱정스럽게 한다. 여러 해 되도록 여전히 수련과 일하는 관계를 바로 놓지 못하여 세 가지 일을 한 수량의 많고 적음으로 수련의 정진여부를 가늠하는데, 대법수련은 ‘직지인심’이며, 심성을 본다는 것을 잊어버렸다. 우리 많은 수련생들이 고생도 마다하지 않고 각 환경 속으로 뛰어 다니며 사람을 구하는 것을 보게 되는데, 표면으로 볼 때 대량의 중생을 구도하였다. 하지만 기쁨과 동시에 생각해 봐야 할 것은, 만약 많은 수련생들이 사람을 구할 때 기점을 바로 놓지 않고, 법에 있는 상태가 아니라면 이런 중생을 정말로 구할 수 있겠는가? 사부님께서는 ‘대법제자는 반드시 법 공부를 해야 한다.’에서 말씀 하셨다. “나는 말한 적이 있는데, 당신이 한 그 일이 만약 법에 있지 않다면, 만약 법의 힘이 없다면, 당신 자신이 잘 수련하지 못했기에, 당신은 그 일을 잘 하지 못한다. 아마 그 일을 당신이 했을 수도 있는데, 그러나 그것은 작용을 일으키지 못하며, 사람을 구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사악의 요소를 해체하는 데 당신 역시 작용을 일으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러 방면으로부터 보면 현지의 일부 수련생들이 마음을 닦는 가운데서의 부족을 보아낼 수 있다. 어떤 수련생은 법 공부를 마치거나, 진상을 끝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기본상에서 속인이고, 각개 환경에서 부닥친 매 일마다, 하는 말 매 한마디마다 모두 법으로 자신의 심태를 대조할 줄 모르고, 많은 때의 사유는 모두 사람의 생각이다.

한 수련생은 중생 구도 방면에서 아주 잘하여 날마다 기회만 있으면 대면 진상을 하여 사람을 구하는데 인연 있는 사람은 거의 한 사람도 놓치지 않는다. 인자하고 선한 얼굴은 사람들에게 친절한 감을 주었고 주위의 수련생들은 모두 이 수련생이 다른 수련생보다 수련을 잘 했다고 여겼으며, 어떤 수련생은 몰래 칭찬을 하였다. 나는 이 수련생과 늘 접촉하는데 그녀 집에 몇 번을 갔을 때마다 모두 혼자서 텔레비전을 켜 놓은 것을 발견하였다. 한 번은 물었다. 당신은 매번 일에 부닥쳐 고비를 넘길 때마다 자신을 수련인으로 여기는가, 당신은 속으로 당신이 발한 정확하지 못한 사상을 해체하고 배척해 보았는가? 당신은 안으로 찾으면서 당신의 관념을 개변해 보았는가? 그 수련생의 대답은 나를 깜짝 놀라게 하였다! “나는 배척한 적이 없었고 찾을 줄도 몰라요!” 여기에서 나는 그 수련생이 어떠어떠하다고 의식적으로 폭로하려는 것이 아니라 나는 다만 우리 현지의 많은 수련생들이 마음 수련을 중시하지 않고 있다는 실제 상황을 말하는 것이다. 아울러 우리가 본 바로는 많은 수련생들이 날마다 세 가지 일을 착실하게 하고 있지만 실제 상황은 모두 수련의 상태에 있지 않다. 오랫동안 세 가지 일을 하는 것으로 마음 수련을 대체하고, 수련의 전부로 여겼고, 심성도 진정으로 제고를 얻지 못했는데 이는 우리 현지에서도 아주 보편적인 현상으로 되었다. 많은 수련생들은 오늘도 자신은 ‘세 가지 일’을 모두 빼놓지 않았으므로 정법노정을 따라간 것이라고 여긴다. 협조인 수련생도 누구나 다 ‘세 가지 일’을 모두 하고 있으며 누구도 빠뜨리지 않는다고 여긴다.

우리가 텔레비전을 켜고 흥미진진하게 연속 드라마를 보고 있을 때, 자신이 주동적으로 업력을 접수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 생각해 보았는가? 전반 인류 도덕이 부패해진 오늘의 속인이 연기하는 것은 모두 폭력, 색정, 아귀다툼, 명리정에 대한 추구와 각종 이익에 대한 쟁탈이란 것을 생각해 보았는가? 즐겨본다는 그 자체가 우리의 사상 속에 이런 변이된 사유가 근본적으로 모두 전환되지 않았으며, 현대 조류에 부합됨으로 인해 그것을 접수하기 좋아한다는 것을 설명하는 게 아닌가? 그것을 우리 대뇌에 담으면 바로 물질이고 바로 업력이다! 어떻게 해야만 그것을 닦아 버릴 수 있겠는가?

우리가 자신을 치장하고 옷차림을 멋지게 하는 것은 허영을 좋아하고 자신을 나타내기 위해서인가? 아니면 세인에게 대법제자는 사당이 말하는 것처럼 생활이 곤궁하여 초라하고 의탁할 데 없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각 계층 가운데서 모두 아주 우수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인가? 우리의 기점은 법을 실증하기 위해서이지 자신을 실증하려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몸이 여기가 가려우면 긁어대고 저기가 아프면 주무르고, 밖에 나가서 추우면 춥다고 외고 더우면 덥다고 하는데 그건 사상 중에 편안하게 안일을 추구하는 까닭에 비로소 신체의 변화를 감수하는 것이 아닌가? 이 모든 것은 우리더러 수련하라고 준 것이며 관념을 전변하라는 게 아닌가? 어떤 수련생은 거리를 거닐면서 어디에서 차가 걸렸고 누가 싸우는 등 좌우를 살피는데 수련인은 마땅히 마음이 고인 물처럼 차분해야 한다는 걸 아직도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 속인은 모두 인연관계가 있는 것인데 이런다고 당신을 수련시켜 줄 수 있겠는가? 당신의 사상은 이미 아주 유위적이어서 사부님께서는 이 일을 이용하여 당신더러 참견하기를 즐기는 마음을 버렸는가를 보게 한 것이다. 우리의 많은 수련생은 자신의 사유를 의식하지 못하고 틀어잡지 못하고 그것을 해체하지 못하고 여전히 흥미진진하게 이것도 배우고 저것도 말하며 누구누구는 어쩐 일이라고 한다. 실은 우리가 만난 일은 우연한 것이 아니고 모두 우리가 수련해야할 요소가 그 안에 있는 것이다.

모두가 알다시피 수련이란 곧 사람마음을 버리는 것인데 이렇게 여러 해 동안 수련했다는 우리가 어떻게 수련하고 어떻게 관념을 전변할 것인지조차 모른다면 어떻게 수련한다고 할 수 있는가? 경지가 제고되지 못하고서야 법정인간 때에 우리가 구도한 그런 중생들은 어디로 갈 것인가!

아마 현유의 수많은 관과 난에는 모두 사악한 요소가 안에 섞여 있을 것인데 우리는 사악이 박해한다는 것만 알뿐 도리어 근본적으로 부정하지 못한다. 수련이란 본디 엄숙한 것으로서 한 고비를 넘지 못했는데 다음 고비가 또 닥치면 우리는 아직도 그것을 속인 중의 일로 여긴다. 속인처럼 처리하는 방법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사상이 제고되지 않으며 관념이 전변되지 않으면 업력은 당연히 전화되지 않을 것이며, 한 번 두 번 싸여 일정한 정도에 이르면 곧 큰 고비 혹은 넘을 수 없는 생사고비가 될 것이다. 세상을 뜬 수련생이거나 마난 중의 수련생에게 이 방면의 요소가 없는가! 때문에 마음을 닦는 것은 업을 버리는 것이며, 정신과 물질은 일성인 것이다.

이로부터 나는 7.20 이전의 개인수련 시기, 수련생들이 법 중에서 비학비수하던 정진상태가 떠올랐다. 그 때의 법공부팀은 수련생들에 대한 흡인력이 거대하였다. 수련생들은 법 공부팀에 오게 되면 일찍 왔던 늦게 왔던 모두 묵묵히 책을 꺼내들고 조용한 마음으로 법공부를 하면서 서로를 교란하지 않았고, 신 수련생을 비롯한 매 수련생마다 법속에서 제고하려는 염원이 아주 강렬하였으며, 길을 가든 자전거를 타든, 식사를 하든, 잠자기 전이던 모두 법을 외웠다. 매개 법공부팀의 보도원은 모두 참답게 수련하는 모범이었고, 또한 진정으로 법을 얻어 수련하는 수련생을 위해 책임졌으며, 교류 중에는 대법의 법리로 수련생을 인도하여 안을 향해 찾게 하여 수련생들은 모두 자신이 고비를 넘는 과정에 어떻게 안으로 찾고 사람마음을 버리고 제고하게 되었는가를 말할 수 있었다. 안으로 찾는 그런 분위기는 진정으로 수련생이 차이를 보아내게 하여 비학비수의 동력이 되었다. 법속에 용해된 그런 충실함은 다시 생각해봐도 모두 몹시 미련이 남는다. 많은 수련생들이 알다시피, 그 때는 법공부, 연공에 마음이 조용하지 못한 것은 자신의 집착심이 너무 많은 탓으로 집착을 버려야만 마음이 조용해지고, 그것은 상보상성(相辅相成)하는 것으로 인식했다.

십 몇 년이란 세월이 흐른 오늘, 많은 수련생들은 일부 문제에서 법리가 도리어 모호하게 변해 버렸고, ‘안을 수련하니 밖이 안전하다’란 법리를 잊게 되었다. 우리 지역의 거의 모든 수련생에게 안으로 찾는 기제(机制)가 없어졌고, 많은 문제에서 알게 모르게 모두 밖에서 찾으며, 내재적으로 자신을 개변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표면 현상만 배척할 따름이다. 발정념에서 졸리면 졸음마를 제거하는데 이 역시 무척 정진한다는 수련생이 사악의 교란을 승인하지 않는 일종의 표현이다. (발정념으로 사악을 해체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고, 우리에게 누락이 있다 해도 사악은 박해할 자격이 없다)하지만 졸음마와 우리의 심성은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것이다. 우리가 고생과 힘든 것을 느끼고 안일을 구하려 하면서 정진하지 않을 때, 졸음마의 교란은 끊임없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장기적으로 연공과 발정념 때 모두 자는 상태이고, 자고 나서는 생각조차 모두 하지 않는다. 어떤 수련생은 말한다, 당신은 그것을 제거하고 해체하라. 사악이 우리가 하는 바른 일을 교란하면 사악의 교란을 제거하라는 말을 입에 늘 달고 있는데 우리가 얼마나 진정으로 정법에 책임지고 중생에 책임져서 사악을 제거하고 사부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원용했던가.

개인수련의 사유 상태에 빠진 채로 수련생을 도와주고, 사람의 마음으로 법을 이용하여 결과를 구할 때, 출발점과 동기는 여전히 법과 환득환실(患得患失)하려는 것인데 사부님께서 어찌 원칙을 무시하시고 당신을 보호할 수 있겠는가? 어떤 수련생이 발한 기점은 진정으로 법속에 있어 마난 중의 수련생과 교류할 때 사람의 생사를 내려놓고 결과를 구하지 않으며 다만 대법제자가 반드시 해야 할 일만 잘 하고자 하는데 그건 법속에서의 정념이다. 그런데 우리가 본 것은 많은 수련생들이 남을 도와주는 동시에 마음은 경솔하고 구하는 것이며, 법리가 똑똑하지 못한 것이다. 깊이 조사해 보면 많은 수련생들의 발정념의 사상 동기는 수련생더러 더는 고통을 당하지 않게 하려는 것이거나 혹은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지 사악을 제거하고 조사정법하여 중생구도를 더 잘 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현지의 상황으로부터 보면 정법제자에 대한 사부님의 요구와는 거리가 매우 멀다. 물론 모든 수련생이 모두 무슨 상태에 도달하거나 인식이 그렇게 높아야 된다는 것은 아니고 그것 역시 현실적이 못 된다. 나의 이해로는 다만, 우리는 필경 대법수련자이므로 반드시 정체적으로 안으로 수련하고 안에서 찾는 분위기를 형성해야 한다는 말을 하고 싶을 뿐이다. 우리에게 사람의 마음이 있는 것은 두렵지 않지만 두려운 것은 우리에게 서로 촉진하고 실수하는 환경이 없어지는 것이다. 이는 매 사람부터 시작하여 사부님 요구에 따라 마음에 닿게 법 공부할 것이 요구되는 것이다. 법공부팀마다 마땅히 7.20 이전처럼 정기적으로 교류하며, 개인은 만나거나 교류 중에 모두 자신이 세 가지 일을 하는 과정에 어떻게 자신을 수련하였고 혹은 번거로움과 마난에 봉착했을 때 자신의 염두가 어떻게 움직였는가를 말해야 한다. 교류할 것은 마땅히, 우리가 움직인 염은 정념인가 아니면 표면적으로 일하는 것만 서술하는데 그쳤는가. 이는 개인의 제고, 사존께서 요구하신 세 가지 일을 잘 하는 것과 사악을 해체하고 더 많은 중생을 구도하는데 가장 유리하며, 또한 사부님께서 보고 싶어 하시는 것이다. 개인마다 모두 안에서 찾는 것을 견지한다면 아주 빠른 시간 내에 비학비수하는 아주 훌륭한 수련 분위기를 형성할 수 있다.

우리는 모두 수련의 길에서 걷고 있는 대법제자인 만큼 사람마음을 피하기는 어렵고, 어느 누구도 매 고비마다 모두 잘 넘길 수 있다고 장담하지 못한다. 하지만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우리는 진수하는 사람이지 대법 속에서 그럭저럭 지내며, 비 주동적으로 대법에 동화되고, 늘 꾸물거리며 피동적으로 수련하면서 근본적으로 자신을 개변하지 않는다면 수련한 횟수가 얼마나 되든지 아무 것도 대표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각 지역 협조인은 반드시 어떻게 세 가지 일을 잘 할 것인가와 동시에 심성을 중시하여 안에서 찾으며, 자신을 잘 수련하여 사부님의 정법노정을 제 때에 따르고, 그로부터 현지 수련생을 이끌어 정체적으로 제고할 책임이 있다. 법 공부팀을 진정 실수(實修)하는 환경으로 변하게 해야 한다.

현 단계에서 성숙되지 못한 인식이오니 부족한 곳은 수련생들께서 자비로 지적해 줄 것을 삼가 바라는 바이다.

문장발표 : 2011년 11월 17일
문장분류 : 수련마당
문장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1/11/17/24938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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