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해외 대법제자
[밍후이왕] 편집자의 말: 사부님께서는 ‘2009년 대뉴욕 국제법회 설법’에서 말씀하셨다. “오랜 기간 꾸준히 견지해 오면서, 끊임없이 정진하는 그것이 비로소 진짜 정진이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하자면 정말로 어렵다. 때문에 수련을 처음과 같이 하면, 반드시 정과를 얻는다고 한다.”
이하는 2009년 밍후이왕 10주년 때의 단체 교류 원고다. 밍후이 사업을 하고 있는 상당한 일부 수련생은 장기간 기타 해외 수련생들처럼 수련 체험을 교류하고 함께 나눌 수 없었다. 이 방면의 부족함을 메우기 위해 모두들 공동으로 이 원고를 써내 10주년 법회 때 밍후이왕 사업인원 사이의 교류와 서로 간의 고무격려로 삼고자 했다. [‘밍후이왕의 소소한 이야기(4)’에 이어]
안전사업
사부님께서는 여러 번 대법제자에게 경고하셨다. “수련은 아주 엄숙한 일이다.”(캐나다법회설법)
대륙 대법제자 대량의 정보가 연루됐기 때문에 안전비밀보장 사업은 밍후이 사업의 중요한 부분이 됐다. 밍후이 사업 팀 중에서 안전 요구가 가장 느슨한 밍후이 기자마저 모두 명패를 달지 않고 조용히 일했다. 해외의 자유 사회에서 생활하면서 십 년을 하루같이 이러했는데 이 같은 비밀보장 안전 수요와 요구는 일종의 특수한 고험과 단련이 됐다.
비밀보장과 편리함은 사업 중의 대립요소로서 비밀 보장은 필연적으로 불편함을 가져왔고, 또한 오해와 단절을 가져오기도 했다. 밍후이 사업의 안정된 운행을 보증하기 위해 수많은 불편을 겪었고, 수련생 내부로부터 오는 각종 압력을 받게 됐다. 모두들 어렵긴 해도 외로움은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특히 자신의 마음이 사람을 구하는데 있고, 대세(大局)에서 마음이 대법제자의 주도 작용을 발휘하는데 있게 될 때면 실은 쓸쓸할 사이가 아예 없었던 것이다.
세간의 어떤 일이든 모두 이로움과 폐단이 동시에 나타나는 법이며, ‘단절’이란 이 일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오직 정확히 대하기만 하면 ‘단절’가운데 포함된 바른 요소가 우리로 하여금 장기적으로 안정된 운행을 하게 하며, 우리 마음이 더욱 조용하고 사업효율이 더욱 높아지게 할 수 있었다. ‘단절’이 가져온 부정적인 요소도 바르게 사용해 우리가 심성을 제고하는 사다리로 되게 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옛 수련인처럼 세상과 단절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환경이 비록 특수하긴 해도 있어야 할 수련 환경은 조금도 적지 않았고, 지나가야 할 심성고비는 조금도 빼놓지 않았다. 예를 들어 수련생 사이의 협력, 조용한 사업 중의 곤란, 날마다 받아보는 소식, 원고, 고발은 우리로 하여금 날마다 모두 복잡한 난제, 각종각양의 사람마음을 보게 하는데, 어떻게 해야 물들지 않고 이끌리지 않으며, 또 대세로부터 착안해 정면적인 작용을 일으키며, 온건하고도 장기적으로 잘할 것인가 하는 이 모두는 우리의 환경이자 모두 우리가 닦아야 할 것이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모두들 느낀 것과 같이 수련인으로서 안전 사업 방면에서 우리가 사부님의 가르침대로 했기에 비로소 평온하게 오늘까지 걸어올 수 있었다는 것이다. 무슨 곤란이 있으면 우리 자신이 닦아버려야 할 것이고 극복해야 할 것이었다. 조용하고 안전한 전제에서 평온하게 사통팔달(四通八達)하게 해야 하는 것이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이었다. 이 길에서 닦아낼 수 있고 바르게 걸을 수 있은 것 역시 대법 수요에 대한 유력한 실증이 된다.
발전
지나간 몇 년 동안, 밍후이왕은 서서히 다매체로 발전했는데 정기 간행물, 총서, 방송, 텔레비전을 포함한 자료 창고를 갖춰 종합적인 인터넷 사이트가 됐다.
‘밍후이주간’은 가장 일찍 창간됐는데, 대륙 수련생을 향한 수련자 간행물이다. 2009년 4월까지 ‘밍후이주간’은 이미 386회 출판됐다.
‘밍후이주보’와 ‘밍후이주말’은 사회를 향한 진상 간행물이다. ‘주말’은 2001년에 창간됐는데 간단하고 읽기 쉽지만 사이트 판만 있을 뿐이다. ‘주보 ’대륙판은 2005년 봄에 창간됐는데, 다종 밍후이 간행물을 종합한 산물로서 대륙에서 광범하게 인쇄 발행되고 있다. ’주보’는 대륙 민중이 파룬궁 진상을 이해하는데 편리한 창을 보내주었으며, 밍후이 편집 역량의 효율성을 제고하고 중국 대륙에서의 밍후이 성세를 확대했다.
2007년 4월, ‘밍후이주보’는 해외판을 출시했다. 해외 자유사회에서 발행되기 때문에 이 주보는 정규적인 신문 지면을 사용했다. 지금 홍콩, 대만, 미국의 뉴욕, 필라델피아, 워싱턴DC, 샌프란시스코, 댈러스, 한국 등지에서 모두 ‘밍후이주보 해외판’을 볼 수 있다.
다매체 수요에 적응하기 위해 2005년 11월에 ‘밍후이방송국’을 설립해 대륙 민중에게 방송했다. 밍후이왕은 또 ‘영화와 텔레비전’란을 설치했는데 안에는 대법제자가 제작한 텔레비전 다큐 영상과 단편 영상이 있어서 대륙 자료점에서 다운한 다음 CD로 구워 대륙에 전파하고 있다.
이 밖에, 밍후이왕은 또 자료관과 그림사이트도 설치했는데 대량의 정보를 정리해 자료를 알아보려는 사람들이 망망한 밍후이 자료 속에서 헤매지 않도록 해 준다. 자료관은 대륙 수련생이 현지 정보를 알아보고 현지 사악의 박해를 폭로하는 진상 자료를 제작하는데 대해 무척 큰 작용을 일으키고 있다.
정기 간행물 외에 밍후이는 또 일련의 밍후이 총서를 출판했다. ‘궁지에서 살길을 만나다(絕處逢生)’의 한 편집원은 말했다. “이 책을 편집하는 과정 역시 바른 믿음을 확고히 하는 과정이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파룬궁 수련을 거쳐 각종 심한 병들을 쫓아버리고 건강한 사람이 되며 선을 향하는 좋은 사람이 된 것을 보고 자신은 사부님의 자비, 대법의 위덕을 더더욱 느끼게 됐다.”
반(反) 박해, 진상을 알리는 과정에 밍후이의 다종 언어 사이트도 설립됐다. 현재 밍후이왕에는 영어, 독어, 프랑스어, 러시아어, 일어, 한국어, 스페인어, 베트남어로 된 사이트들이 있다. 이런 사이트들의 운행은 번역 사업에 참가한 수련생들의 장기적인 외로움, 묵묵히 말없는 가운데서 견지하는데 의거하고, 자아에 대한 그들의 요구와 밍후이 사업에 대한 사명감에 의거한 것이다.
영문 밍후이의 한 편집원은 문장 번역을 도와주던 데로부터 밍후이 사업을 시작하게 됐다. 한 동안 지난 후 문장 선택으로 들어갔고 편집을 하기 시작했다. 이 편집원은 원래 두루 섭렵해 이해의 폭이 넓었지만 밍후이에 전념하니 외로운 감이 없었고, 자신의 능력을 다 쓸 수 있어 마음을 다해 했다. 그는 낮에는 전직 사업을 하고 아침 저녁으로 의무적으로 밍후이를 했는데 이미 7년 넘도록 견지하고 있다.
그는 말했다. “영문 밍후이 사업에 참가하니 자신에 대한 도움이 무척 크다. 날마다 밍후이 문장을 보기 때문에 큰 방향과 원칙 문제에 대한 파악이 언제나 틀리지 않았다. 정법 진행의 추진을 따라 가면서 어떤 때는 따라가지 못하는 감을 느끼게 되는데, 이 사업은 자신의 수련에 일종의 촉진이 됐다. 처음에는 일손이 모자라고 일도 많아 날마다 모두 비교적 긴장 했다. 이런 외부적인 요소도 자신이 비교적 정진하도록 독촉해 주었는데 이는 일종 은연 중에 감화되고 순서에 따라 나아가는 제고 과정이었다. 이후에 인원 확장은 각 지역,각 민족의 수련생과의 교류에 연루됐으므로 편집원으로서 생각하는 문제도 갈수록 많아지게 됐다.”
이 편집원이 경험한 것 역시 수많은 영문 밍후이와 기타 어종 밍후이 사업인원이 겪은 경험의 축소판이다.
모 어종 밍후이의 한 주요 편집원은 1999년부터 영문 밍후이왕에 발표된 문장을 자기 민족언어로 번역하기 시작했다. 몇 년 사이 조건이 아주 나쁜 상황에서 이 단체는 날마다 영문 밍후이왕에서 문장을 번역해 여러 지역에 살고 있는 그 민족 대법제자에게 중요한 수련 체험과 정보 자원을 제공해 주었다. 이 편집원은 말했다. “시작엔 많은 일들을 모두 자신이 해야 했으므로 날마다 몹시 지쳤다. 어느 한 번 수련생과의 교류 때 한 수련생이 말했다. ‘당신은 이렇게 하면 안 돼요. 당신은 마땅히 다른 수련생을 믿고 그들에게 당신 사업을 분담하게 해야 합니다.’ 서서히 보다 많은 수련생이 번역 사업에 참가하게 됐고, 또 어떤 수련생은 현지의 진상 알리기 활동을 원고로 써서 부쳐오기도 했다. 처음에 어떤 원고는 품질이 낮았는데 편집원은 이런 수련생과 회의를 열고 구체적인 문장을 예로 들면서 어떻게 문장 번역과 글 쓰는 기술을 개진할 것인가를 알려 주었다. 서서히 모두가 갈수록 잘 했다.”
이 편집원은 말했다. “처음에는 집에 많은 일이 생겨 나를 힘들게 했지만 그 후 9년을 견지 했다. 이 9년 사이 나에게는 명절과 휴일이 따로 없었다. 다른 수련생이 하는 항목은 날마다 견지하지 않아도 됐지만 내가 하는 편집 사업은 날마다 모두 편집하고 문장을 발표해야 했다. 이러하긴 했지만 나는 날마다 ’전법륜’ 한 강씩 읽는 것을 견지했는바, 법공부가 나로 하여금 충분한 정념으로 내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게 했다.”
다른 많은 밍후이 팀과 마찬가지로 이 다국어 밍후이팀 회의에서는 함께 법공부한 다음 수련 심득을 교류하고 그 다음에야 사업을 토론했다. 모두들 단체 법공부 교류 환경을 몹시 귀중히 여겼다. 왜냐하면 이는 그들이 대법 중에서 자신을 제고하고 정진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보장이 되기 때문이다.
반복적인 충격과 기복을 겪으면서 밍후이왕은 현재 자신의 기본적인 기자팀을 갖게 됐다. 밍후이 기자의 정기모임과 협조 사업 역시 법리 교류와 양성을 중심으로 한 것이며, 모두들 밍후이 원고를 쓰는 과정에서 배움을 비기고 수련을 비겼다. 아직도 일손이 매우 부족한 등 곤란이 있지만 밍후이 기자는 몇 명의 노 수련생의 참을성 있는 협조 하에 날이 갈수록 순정하고 향상하는 팀이 되고 있다. 그들이 하고 있는 해외보도와 취재는 대륙 수련생에게 대해서는 매우 큰 고무격려가 되고 있으며, 더욱이 대륙에서 사람을 구하는 모든 밍후이 문장, 밍후이 정기 간행물에 없어서는 안 될 진상 내원이 됐다.
위치와 사명
밍후이왕의 성립과 견지는 보통 매체의 운행 방식과는 전혀 다르다. 그 어떤 자금의 지지도 없고, 대외 칭호도 없으며, 속인 중의 명예도 없으며, 오직 소리 없이 지불하는 것과 착실히 수련하는 것만이 수련인에 대한 이런 일터의 요구인 것이다. 사업은 날마다 대량의 시간과 정력을 지불할 것을 요구하며, 명절과 휴일이 없다. 하지만 모두들 알고 있다. 자신이 밍후이 사업을 하고 있으며, 어떻게 지불하든 자신의 고만한 지불은 대법 수련 가운데서 얻은 것과는 너무 멀어 정비례 되지도 못한다. 대법과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귀중하기 비할 것이 없는 것으로, 절대로 세간의 금전과 가치로는 상상과 가늠조차 할 수 없는 것이다.
수련과 사업은 한데 용합된 것이며, 모순은 심성을 제고하는 섬돌이다. 예를 들어 함께 사업하면 의견이 서로 다르고 어떤 때는 남의 방법이 자기 것보다 못할 때가 있다. 한 편집원은 말했다. “나는 합작하고 있는 수련생에게 날마다 이메일을 열람하라고 시켰는데 대답은 아주 시원스럽게 하면서도 여전히 제때에 열람하지 않아 장애가 생겼다. 처음에 나는 아주 불쾌했으나 법공부를 통해 안을 향해 찾으면서 자신이 마땅히 더 잘해야 하거나, 선의적으로 수련생을 일깨워 주어야 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됐는데 그렇게 하니 장애도 없어졌다.”
또 한 편집원은 수련생의 비평에 직면했을 때, 한 때 자신의 그림자를 보면서 스스로 불쌍히 여겼다. 법공부를 통해 문제에 봉착하면 안을 향해 찾는 것을 배웠고 자신의 좋지 못한 심태를 찾아내고는 버렸다. 이 수련생은 말했다. “다른 수련생과 함께 일할 때면 그들의 장점, 빛나는 점을 보아내고 그들의 부족함을 관용하는 것을 점차 배우게 됐다. 중문 밍후이 사업을 하는 수련생 사이에는 모두 서로 간에 포용하고 관심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으며, 서로 비평한다 해도 역시 선념에서 출발했다.”
여러 해 동안, 대륙 수련생이 다운받고 인쇄하며, 제본하고 배포하는 진상자료는 절대 대부분이 밍후이 정기 간행물의 것이었다. 한 편집원은 자신 조건이 훌륭했지만 오히려 속인의 사업을 추구하지 않고 장기적으로 기본상 밍후이 간행물을 전직으로 했다. 대륙 각 도시의 수련생들이 모두 필요하기 때문에 사업량은 갈수록 많아 매번 한 동안을 지나갈 때마다 짓눌리어 숨조차 잘 쉴 수 없었다. 이 편집원은 일찍 이 항목을 포기해야 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을 여러 번 했다. 이 생각이 반복적으로 나타날 때, 한 번은 꿈에 수련심득교류대회에 참가해 회의장에 들어가 위치를 찾았다. 한 수련생이 한 위치를 가리키면서 이것이 당신의 위치라고 했다. 이 편집원은 이는 자신에 대한 점화임을 의식하고 자신의 위치와 사명을 더욱 분명히 하게 됐다.
첫 시작 몇 년 간은 협조 사업에 참여한 대부분 수련생은 늘 자기는 모 항목의 구체적인 사업에 적합하지 협조인은 하기 싫다고 했다. 이후에 모두들 점차 알게 됐고, 자신은 다만 어떠하다고 할 수는 있어도 어떠하지 못하다고 할 수는 없으며, 이건 하기 좋아하고 저건 하기 싫다는 것은 관념과 능력, 두 가지 방면에 제한임을 인식하게 됐다. 수련을 하는데 왜 이 문제 상에서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가길 싫어하는가? 대법이 협조할 것을 필요로 하는데 왜 협조 사업에서 더 전면적으로 자신을 단련하려 하지 않는가?
생각이 변하니 방법도 변했다. 10년을 경과하면서, 수많은 우여곡절과 어려움이 있었지만 어느 부서, 어느 일터에서든 밍후이 사업 인원은 모두 협조의 역량을 분명히 보아냈다. 실천이 증명하는 바, 매 수련생마다 마음을 닦은 기초상에서의 대법제자 정체적인 협조의 역량은 그 어떤 개체 수련자의 지혜와 역량과는 비하지 못한다. 그것은 대법의 위력이고 사부님 위덕과 자비로서 세간에서는 대법제자를 통해 펼쳐진 것이다.
끝맺는 말
시간의 제한으로 본문에 내용이 부족하고 누락된 것이 아주 많으며, 기록된 것은 다만 밍후이 초기의 소소한 이야기들 뿐이므로 밍후이의 10년 길을 대표할 수 없고, 장시기 동안 견지하면서 밍후이 사업을 훌륭히 해온 대법제자를 대표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많은 것은 표면 현상밖에 쓸 수 없었다. 안전 수요로 출발해 더 많은 구체적인 정보를 노출할 수 없는바, 교류를 위해 대세의 안정된 운행에 영향을 줄 수도 없는 것이다. 걸어온 길을 돌이켜 보는 것은 앞으로의 수련을 위해서이며, 보다 더 청성하게 일하고, 보다 더 귀중한 줄 알며, 부족함을 틀어잡고 법 속에서 제고하기 위해서다.
속인으로 볼 때 명예도 이익도 추구하지 않고 동일한 사업 가운데서 소리 없이 10년 무료 봉사자로 일했다는 것이 아마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각도를 바꾸어 놓고 본다면 오직 위대한 믿음만이 비로소 사람으로 하여금 외부의 곤란과 자아의 제한을 극복하고 10년을 하루같이 견지해 올 수 있는 것이다.
밍후이 건립 10주년에 즈음하여, 밍후이 사업에 참여한 대법제자들은 더욱 더 분명히 인식했는바, 지금의 조사정법, 더 많은 중생을 구도하는 대세 속에서 사업량 완수를 견지하는 것과 개인이 고생을 하는 것만으로는 어림도 없이 부족한 것이므로 우리는 여전히 사람을 구하는 효과와 수련 제고를 반드시 더 중시해야 한다. 중문 밍후이왕 뿐만 아니라 영문 밍후이와 다국어 밍후이 모두가 더 열심히, 더 효과적으로 한다면 파룬따파의 국제 형상에 대해, 세계 각국 정부 사업에 대해, 주류사회 민중에 대한 진상 알리기에 대해 더욱 편리하고 더 빠르며, 더 계통적이고 더 착실한 작용을 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션윈 공연이 반드시 중국 대륙에서 공연할 수 있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대륙 민중이 자유롭게 밍후이왕을 볼 수 있고, ‘밍후이주보’ ‘밍후이 방송’을 향유할 수 있는 나날은 이미 멀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는 굳게 믿는다.
사부님, 감사합니다 !
수련생 여러분, 감사합니다!
(전문을 마칩니다. 2009년 원고로 일부 삭제가 있음)
문장발표: 2011년 8월 9일
문장분류: 수련마당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1/8/9/244935.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