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밍후이왕의 소소한 이야기(1)

글/ 해외 대법제자

[밍후이왕] 편집자의 말: 사부님께서는 ‘2009년 대뉴욕 국제법회 설법’에서 말씀하셨다. “오랜 기간 꾸준히 견지해 오면서, 끊임없이 정진하는 그것이 비로소 진짜 정진이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하자면 정말로 어렵다. 때문에 수련을 처음과 같이 하면, 반드시 정과를 얻는다고 한다.”

이하는 2009년 밍후이왕 10주년 때의 단체 교류 원고다. 밍후이 사업을 하고 있는 상당한 일부 수련생은 장기간 기타 해외 수련생들처럼 수련 체험을 교류하고 함께 나눌 수 없었다. 이 방면의 부족함을 메우기 위해 모두들 공동으로 이 원고를 써내 10주년 법회 때 밍후이왕 사업인원 사이의 교류와 서로 간의 고무격려로 삼고자 했다.(일부 생략이 있음.)

1999년 6월 25일부터 2009년 6월 25일까지 밍후이왕은 10년이란 여정을 걸어왔다. 최초의 간단한 인터넷 사이트로부터 점차 항목이 많아지고, 정기 간행물이 늘어나며, 매체가 많아져 대형 사이트로 발전했다. 밍후이왕 사업인원들은 어떻게 이 10년을 지나왔는가? 본문에서는 측면으로부터 일부 인원들의 밍후이왕 초기의 소소한 이야기를 서술하려 한다.

탄생

리훙쯔 사부님께서 1992년 사회에 파룬궁을 공개적으로 전수하신 이래, 짧디 짧은 몇 년 사이에 파룬궁은 신주(神州) 대지에 널리 퍼졌고 동시에 북미, 유럽과 호주 등 서양 국가에 전파됐다. 1996년에 이르러 미국, 캐나다 등 국가 많은 도시에 모두 파룬궁 연공장이 생겼으며 현지 중국인과 서양인들에게 무료로 파룬궁을 전파했다.

그 때는 바로 인터넷이 발달하기 시작할 때였고 파룬궁을 수련하는 많은 수련생들은 첨단기술 회사에 임직하거나 각 대학에서 교편을 잡거나 학위를 전공하고 있었다. 그들은 각지에서 자발적으로 인터넷 사이트를 설립하고 민중에게 파룬궁을 소개했다. 그 중 캐나다 수련생이 꾸리는 falundafa.ca사이트는 내용이 비교적 풍부했다. 1997년 하반기에 와서 그 사이트는 공고란을 설치하고 일부 중요한 소식을 공고했다.

1999년 4월 25일, 베이징에서 세계를 놀라게 한, 1만 명 파룬궁 수련생이 국무원 신방사무실로 청원을 간 사건이 발생했다. 비록 사건은 그날로 잠시 해결됐지만 이후 정세는 자못 먹구름이 도시를 짓누르고 폭풍우가 닥쳐올 그런 느낌이었다. 각지에서는 모두 중공 정부와 공안인원의 소란, 파룬궁 수련생을 탄압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간단한 공고란 하나로는 이미 당시 정세를 감당하기는 어려웠고 따라서 각지 대법 사이트에도 이런 문장을 싣기에 적당하지 않았다.

그 해 캐나다 불학회 주요 구성원이던 모 여사는 말했다. “당시 북미에는 스물 몇 개의 대법 사이트가 있었는데 초기 사이트에는 다만 리훙쯔 사부님의 경서, 경문, 녹음, 동영상만 실었습니다. 대법 사이트의 순정함을 보유하기 위해 사이트에는 수련생 문장을 올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1999년에 와서 형세가 점차 긴장하고 복잡하게 변하자 우리는 그제야 부득불 특별 공고란을 개척하고 일부 중요한 홍보물과 문장을 올렸습니다. 그랬지만 모두들 그래도 타당하지 못한 감을 느꼈고 이후에는 여러분들의 토론을 거쳐 전문적으로 이런 종류의 문장을 싣는 사이트를 꾸리는데 동의했습니다. 이를 수련생들의 교류 마당으로 삼고 우리의 마음속 말을 하는 동시에 대륙 수련생들에 대한 지지이기도 했습니다.”

1999년 6월 25일 밍후이왕이 객관적 형세에 따라 탄생했다. 당초 사이트 이름은 ‘북미에서의 파룬따파-밍후이왕’이었다. ‘밍후이(明慧)’ 두 글자는 리훙쯔 사부님의 한 문장에서 따온 것이다. 이후에 사이트 내용이 대량으로 대륙에서 왔기 때문에 전 세계 파룬궁 수련생과 파룬궁을 관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사이트 이름을 ‘밍후이왕’이라고 불렀다.

이 캐나다 수련생을 이어서 말했다. “밍후이왕 주관 편집자의 선택은 모든 수련생을 향한 것입니다. 당시 우리는 한 수련생이 쓴 문장의 문맥, 사유와 속도가 아주 특별한 것을 발견하고 이 수련생을 주관 편집자로 추천했습니다.”

주관 편집자는 기자에게 알려주었다. “당시 법을 일찍 얻은 수많은 수련생들과 비해보면 저는 아직 신 수련생이라서 심성과 법리에 대한 이해는 아직도 무척 제한이 있다고 여겨져 책임자의 일을 담당할 것 같지 못했어요. 그래서 물었습니다. ‘더 훌륭한 사람을 선택해 책임지게 할 수 없겠습니까? 저는 편집과 글 짓는 일을 담당할 수 있습니다.’ 몇 시간 후 회답은 부정적이었습니다. 회답하는 어투는 나에게 사태의 엄중성과 압력을 절실히 느끼게 했습니다. 잠시 후 나는 하겠다고 대답했습니다. 당시 그런 긴박하고도 준엄한 형세에서, 광대한 대륙 수련생들의 수련 환경이 날이 갈수록 심한 파괴를 당하는 것을 보완하기 위해, 해외 대법제자와 국제사회에 중국에서의 파룬따파의 상황을 알리기 위해, 중국 대륙 대법제자와 기타 모든 관련된 중국인들 및 해외에서 파룬따파를 알리기 위해 나는 내가 일체를 돌보지 않고 어서 사업을 시작해야 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반향

D성씨를 가진 대륙 수련생이 말했다. “저는 일정한 학력이 있었기 때문에 사이트에 접속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99년 5,6월에 현지에서 발생한 파룬궁 박해 소식을 당시 파룬따파 사이트 공고란에 발포했는데, 대개 6월 29일인가, 다시 소식을 보낼 때는 밍후이왕으로 변했습니다. 그 때부터 제 수련은 밍후이와 함께 간고한 십 년을 걸어왔습니다.” “1999년 박해가 시작된 후, 우리는 다만 PC방에 찾아가 대리서버를 통해 밍후이왕에 접속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때는 밍후이왕을 보거나 제때에 소식을 수련생들에게 전해주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A성씨를 가진 대륙 대법제자는 우리에게 알려주었다. “밍후이왕은 1999년 6월 25일에 개통했는데 이는 우리 대륙 대법제자로 하여금 폭풍우가 임박할 때 번개가 먹구름을 가르는 날임을 강하게 느끼게 했습니다.”

“1994년 4월 25일, 1만 명 파룬궁 수련생이 법에 따라 청원을 했는데, 이 평화적이고 이성적인 대선(大善)의 거동은 중공의 양심과 선념을 일깨워 주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각지 정부에서 중공 내부 지시를 비밀리에 집행해 각종 더러운 수단으로 파룬궁 수련생을 탄압하고 우리의 수련환경을 극히 나쁘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뒤이어 1999년 7월 20일, 중공은 또 파룬궁 수련생에 대해 대대적인 체포, 납치를 발동했습니다. 중국 대륙 파룬궁 수련생은 한 차례 정신적, 육체적으로 전례 없는 박해를 당했습니다.”

“바로 우리 수많은 수련생이 도처에서 방황하고 어찌해야 할지 모르고 있을 때, 밍후이왕을 통해 각지 수련생들의 수련 심득과 교류 체험이 복사되어 대륙 수련생들 손으로 몰래 신속히 전해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문장 중에는 법리를 깨달은 정견이 있었고, 정념정행한 신적(神迹)도 있었으며, 또 신사신법으로 충만된 정오정신(正悟正信)과 세인을 구도하는 자비로운 장거도 있었습니다…이 모든 것은 대륙 파룬궁 수련생을 고무해주어 박해를 직면해 대법 중에서 수련해 낸 지혜와 위엄으로 정정당당하게 사심 없이, 두려움 없이 세인에게 진상을 똑바로 알릴 수 있게 했습니다.”

B성씨인 대륙 대법제자는 말했다. “저는 중국 대륙 화북지역 대법제자이며 1999년 8월부터 밍후이왕에 접속했습니다. 99년 ‘7.20’ 때 공안은 우리 이곳 주요한 보도원을 다 붙잡아 갔으므로 우리는 부득불 베이징으로 청원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베이징에서 돌아온 후 제가 보고 듣게 된 것은 죄다 텔레비전, 신문에서 하는 파룬궁에 대한 모함과 비방이었으며, 진실한 목소리는 조금도 들을 수 없었습니다. 1999년 8월, 어느 우연한 기회에 나는 파룬궁 진상을 진정으로 반영한 밍후이왕에 접속하게 됐는데 오늘까지 이미 10년이란 시간이 흘렀습니다.”

중국 대륙에서 온 모 선생이 기자에게 알려주었다. “나는 박해 전에 이미 밍후이왕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 때는 중공이 아직 인터넷 봉쇄를 하지 않을 때여서 나는 그 때 또 CNN을 볼 수 있었습니다. 어느 날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밍후이왕을 발견했던 것입니다.”

형세의 신속한 변화에 따라 밍후이왕에서 받는 원고는 날마다 500건을 넘었다. 긴급 응대 및 사이트에 원고를 올리는 사업량이 점차 증가했다.

(다음에 계속)

문장발표: 2011년 8월 5일
문장분류: 수련마당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1/8/5/24493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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