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대륙 대법제자
[밍후이왕] 나는 비록 네 차례나 사부님의 법 전수 학습반에 참가했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수련생들이 쓴 사부님 은혜를 회상한 글을 즐겨 본다. 매번 마음을 가라앉히고 볼 때면 마치 또 다시 그 해의 학습반으로 돌아가 사부님의 은혜 속에 포근히 잠긴 것 같다.
첫 번째: 스자좡 학습반
나는 어려서부터 기공을 즐겼다. 중학교 때 영어 선생님께서 자습시간에 기공을 전수하였다. 가정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불도신(佛道神)을 믿었고, 군대에 간 후에도 여전히 자신의 애호를 견지하였다. 1994년 2월 말로 기억되는데, 하루는 함께 다른 기공을 연마하던 누님(그때 그녀는 학습반에 참가하지 않았지만 후에는 재빨리 대법으로 들어갔다)이 기공 대사가 직접 스자좡에 와서 법을 전하는 학습반을 여는데, 군관구 강당에 포스터를 붙였다면서 나보고 참가하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그 때, 나는 몹시 바빠서 아마 참가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튿날 점심에 일 처리하러 가느라 군관구 강당을 지나면서 문득 포스터나 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이 날은 햇빛이 찬연하고 거리에는 행인이 드물었다. 대문 옆에 붙어 있는 포스터에는 파룬궁의 8대 특점이 씌어있었다. 정말 좋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내려오다 참지 못하고 또 올라가 보았고 연속 세 번이나 반복하여 보았다. 참가해야 할지 안 할지 망설이다 나중에는 끝내 일요일 오후의 두 시간 보고회 입장권을 사고야 말았다. 표 파는 사람은 웃으면서 아직 마지막 한 장이 남았다고 했다. 표를 받아 쥐자 마음속에는 말 못할 그 어떤 격동이 솟구쳐서 청소년궁 기공협회의 학습반 표를 파는 곳에 가서 막 출판된 ‘중국파룬궁’ 책을 샀다. 책 속의 사부님의 법상을 보니 여러 해 흩어져 있던 혈육을 만난 듯 친근했다. 나는 전기가 통한 듯 주저함 없이 표 두 장을 사서 그때 마침 우리 시에 와서 내 조카딸을 봐 주시던 어머니께 한 장 드렸다.
그 날 아침, 직장에서 대열을 지어 운동장 달리기 아침 운동을 할 때, 지금껏 맡아보지 못했던 한 갈래 짙은 꽃향기를 맡게 되었다. 그때는 날씨가 몹시 추워 아직 꽃이 피지 않았다. 곁에 있는 다른 사람들은 맡지 못한 것 같았다.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법을 얻은 것과 관계가 있었던 것이다.
일요일 오전, 군관구 강당의 보고회는 사람들로 만원을 이루었다. 사부님의 첫 마디부터 마지막 한 마디 말씀까지, 두 시간 동안 나는 마치 그 곳에 고정된 듯 온 심신을 투입하여 한 마디도 빠짐없이 죄다 머릿속에 넣었고, 모두 이해할 수 있어 즉시 환골탈태하였는데, 마치 다른 사람으로 변한 것 같았다.
3월 3일 저녁, 군영에서 한 시간 자전거를 타고 아주머니 집에 도착해 어머니를 모시고 다시 반시간 동안 타고 방직공장 강당에 가서 학습반에 참가하여 법을 들었다. 그 후에 또 다시 어머니를 모셔가다 보니 오가는데 세 시간이 걸렸다. 어머니는 시골에서 처음으로 스자좡에 오신 지 며칠 되지 않은데다 70이 다 되어 가는지라 많은 면에서 모두 적응하지 못하셨다. 어느 날, 나는 직장에 일이 있어 어머니를 집에 모시고 갈 시간이 없었다. 나는 어머니를 환승이 없는 버스에 태워주면서 기사에게 어느 역에 내릴지를 알려 드리라고 하였고, 또 어머니에게 어떻게 가는지를 알려 드렸다. 나는 분명하게 알려 드렸다고 여겼지만 하차한 어머니는 방향을 잃어 사거리에 와서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 예전에 버스를 타 본 일이 없었고 게다가 10시가 넘은 겨울밤이어서 길에 사람이라곤 없었다. 어머니가 곤란해 하실 때, 갑자기 난데없이 10여 살 되는 여자 아이가 나타나서는 주동적으로 말을 걸었다. “할머니, 할머니는 ‘어디’ 가시는 거 맞죠?” 어머니가 대답도 하기 전에 아이가 어머니를 이끌고 앞으로 걸어갔다. 어머니는 우리 아주머니 집의 이름조차 전혀 모르고 있었다(왜냐하면 직장에서 집을 분배하기를 기다리는 동안 임시로 거주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200미터쯤 가니 집에 도착하였다. 부근에는 직장이 많고 울안의 문도 많은데 어린 소녀가 어찌 가려는 곳을 알 수 있었단 말인가. 이는 사부님께서 도와주신 것이다.
스자좡은 군영이 많은 도시이다. 첫 날은 군복을 입은 사람이 많았는데 모두 같은 직장이 아니었으며, 견지한 사람도 몇이 안 되었다. 그때 군대 내에서 많은 사람들이 기공 연마를 즐겼다.
사부님 설법을 듣는 게 매우 좋아 이튿날엔 작은 녹음기를 가져다 녹음하려 하였다. 녹음 경험이 없었고, 게다가 전지를 충전하지 않아 녹음 효과가 좋지 않았으며 전면적이 못했다. 아마 사부님께서 내 성의를 보셨는지 학습반이 끝난 후에 수련생한테서 완정하고 똑똑한 설법 녹음을 얻게 되었다.
학습반을 꾸린 강당의 벽에는 스자좡에서 앞으로 몇 달 동안 꾸릴 학습반의 일정이 붙어 있었다. 매 달 세 반을 꾸리는데, 상세한 연락처가 있어 입장권을 예매할 수 있었다. 나는 수첩에 빠짐없이 적어 넣었다(그때는 그야말로 하나도 빠짐없이 다 참가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 절박한 심정은 말로 형용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일 년에 휴가가 10일 뿐이어서 한 개의 학습반 밖에 참가할 수 없다는 생각에 너무 안타까워 형용할 수 없었다.). 사부님께서는 이미 강단에 앉으시어 강연할 준비를 하시다 내가 아직도 전화번호를 베끼고 있는 것을 보시고는 미소를 지으시며 나를 바라보셨다. 나는 얼른 제 자리에 가 앉았다.
사부님을 만나 뵌 후로 사부님 신변을 따라 다니면서 제자가 되려는 강렬한 염원이 생겼는데, 그때는 학습반에 참가하여 법을 듣는 것만으로는 제자로 칠 수 없다고 여겼던 것이다. 이튿날 쪽지를 써서 연구회 사업 일꾼더러 바치게 했으나 동정(動靜)이 없어 또 어머니와 사부님을 따라 갈 일에 대해 토의하였다. 어머니는 학습반에 참가하였고 대법의 아름다움을 체험했으므로 물론 동의하였다. 그래서 가족이 동의한다는 쪽지를 써서 보냈지만 여전히 동정이 없어 몹시 유감스러웠다.
몇 달 후, 한 노 수련생의 집에 갔더니 그는 기분이 좋아 맥아엑스 한 통을 꺼내 컵에 따라 주면서 이건 사부님께서 주신 것이라며 매우 소중하게 여겼다. 그는 “이건 다른 사람이 사부님께 드린 건데 사부님께서 아까워 마시지 않으시고 제게 주신 겁니다. 저도 마시기 아까워 손님이 오시면 마십니다.”고 했다.
이 노 수련생은 주동적으로 나에게 내가 쪽지를 쓴 일에 대해 “그때 사부님께서는 몹시 기뻐하시면서 정말 당신을 데려가고 싶어 하셨고, 쪽지를 들고 저에게 보여주시면서 두 번이나 ‘보십시오. 그의 집에서 동의하였습니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제가 막았습니다. 당신이 부대에서 나오지 못할 것 같아서요.”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나는 그를 몹시 원망했다. 확실히 나오기 어렵긴 하지만 그래도 한 번 해 볼 수야 있지 않은가. 그랬지만 이 일로 나는 위안을 조금 얻었다. 아무튼 사부님께서는 나의 쪽지를 보셨고 나의 요구를 고려하셨던 것이다.
마지막 한 시간은 의문을 해답해 주는 시간이었는데, 한 수련생은 앞에 있는 수련생의 옷에 자신이 감전되었다며, 이 장내가 전기를 띤 것이 아닌지 물었다. 그러자 사부님께서는 “그렇습니다. 전기를 띠고 있습니다. 학습반을 꾸린 이 며칠 동안은 이 장내만 전기를 띤 것이 아니라 전반 스자좡이 모두 전기를 띠고 있습니다.”고 말씀하셨다. 정말 그러했다. 그 며칠 내가 한 대학교에 가서 군사훈련을 할 때 한 학생이 나에게 그의 세숫대야에 자신이 감전되었다고 했다. 내가 생각하건대, 지금 많은 사람들은 정전기가 있음을 느끼는데, 실은 대법제자 전체의 에너지 마당이 강한 연고라고 여긴다. 그렇지 않으면 왜 사부님께서 법을 전하기 전에는 이런 현상이 없었는가?
후에 사부님을 초대하는 일을 책임진 한 직원에게서 들어서 알게 되었는데, 학습반을 연 지 삼일 째 되는 날부터 사부님은 설법을 마치고 여관으로 돌아오시면 하루 종일 다른 공간을 청리하셨고 사부님의 학습반을 따라다니는 베이징 대법제자도 참여하였다고 한다. 사부님께서 엄숙하게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당신들 스자좡은 왜 다른 공간이 이렇게 어지럽혀 있는가라고 하셨다. 스자좡은 기공도시인 까닭에 기공사가 조금만 소문이 나도 모두 이곳에 와서 학습반을 꾸리고 그들의 장을 배포하였다. 사흘 후에 깨끗이 청리되었고 하늘이 티 없이 맑아졌으며, 사부님께서도 하루 종일 싱글벙글 즐거워 하셨다.
학습반에서 제5장 공법 신통가지법을 배울 때, 사부님께서는 아래에서 동작을 귀정해 주셨다. 수인을 할 때, 오른 팔이 곧게 펴지지 않는 것을 사부님께서 보시고 뒤에서 펴 주셨다. 그 후부터 수인을 할 때면 치지(氣機)가 유달리 강하다는 것을 발견하였고, 속으로 말 할 수 없는 미묘함을 느꼈으며, 연공하기를 특별히 즐기게 됐다.
사부님과 사진을 찍을 때, 강당의 좌석 번호에 따라 두 줄이 한 팀이 되었고 나는 제9팀에 속했다. 그 때 나는 군복을 입고 있었다. 두 장의 대법상을 청해 나와 어머니가 한 장씩 가슴에 펼치고 사부님 양쪽에 섰다. 사부님께서는 얼른 감으시면서 펴지 못하게 하셨다. 당시에 본 법상은 책의 것이든 벽에 거는 것이든지를 막론하고, 법상의 사부님이 그렇게 기쁜 표정인 것을 후에는 보기 어려웠다.
사진을 찍을 때 어떤 팀은 줄을 다 섰고 어떤 팀은 아직 서지 못했다. 어떤 수련생은 사부님을 마구 잡아 당겨 자기 팀이 먼저 찍게 하였다. 사부님께서는 낮은 소리로 “엄숙하지 않아선 안 됩니다. 엄숙하지 않아선 안 됩니다.”라고 하셨다. 그때 어떤 수련생은 사부님을 평범한 기공사로 여겼던 것이다.
마지막 한 시간에 수련생의 질문에 해답을 하신 후 사부님께서는 책상 위에 가부좌 하시고 작은 수인을 하신 다음 또 대 수인을 하셨는데, 정말로 녹화하고 싶었다!
두 번째 : 정저우(郑州) 학습반
나는 그때 한 해에 휴가가 열흘뿐이어서 외지 학습반 하나만 참가할 수 있었다. 이리저리 고르다 정저우 학습반을 골랐고, 정저우에 있는 사촌 여동생에게 입장권 예매를 부탁하였다.
강의하는 중 어느 날, 수업이 시작되기 전에 한 수련생이 강단에서 멀지 않은 빈 땅에 방석 하나를 놓고는 아직 오지 않은 사람을 위해 자리를 찜해 놓았는데, 머리를 돌리다 가사를 입은 뚱뚱한 중이 곁에 앉는 것을 봤다. 그는 중에게 “여기는 제가 맡은 자리인데, 아직 사람이 오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했다. 다시 보았을 때는 중이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그는 다른 공간에서 법을 들으러 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정저우 학습반의 회의장은 매우 상서롭고 조용하였다. 첫 이틀은 사부님께서 경기장에서 설법하셨는데, 그 날 오후에 바람이 점점 세게 불고 날도 서서히 어두워지더니 우박이 내리면서 축구장의 쇠 지붕을 두드렸다. 강당 안에서는 엄청 큰 소음이 났고 정전이 되었다. 사부님께서는 먼저 좀 휴식하자고 말씀하시고는 잠시 후에 대수인을 시작하셨다. 가장 인상이 깊었던 것은, 그때 날이 아주 어두워 저녁인줄 알았는데, 사부님께서 대수인을 마치시자 다시 말해서 몇 분 사이에 한 줄기 빛이 창문으로 비쳐 들어오기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 원래는 오후였던 것이다. 밖에서는 여전히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긴 해도 많이 약해졌고 날도 밝아졌다. 진정으로 무엇이 구름이 걷히고 해가 보이는 것(拨云见日)인지를 체험하게 되었다. 강의를 다 듣고 강당을 나와서야 밖의 참혹한 정경을 보게 되었다. 방직공장 등 여러 곳의 몇 십 년씩 자란 큰 나무들이 모두 송두리째 넘어졌고, 낮은 집들의 지붕이 모두 바람에 날아갔다. 후에 천목이 열린 한 노 수련생이 하는 말을 들었다. 사부님께서 법을 전하시자 수많은 마들이 화가 동했으나 감히 건드릴 수 없는 줄 알고 한 층 한 층씩 고발하다가 맨 나중에 그들이 무척 높다고 여기는 마를 찾아갔다. 그 마왕은 기괴망측하게 생겼는데, 마들을 무리로 거느리고 하늘땅을 뒤덮을 기세로 회의장을 향해 달려왔다. 당시 텔레비전에서는 회오리바람이라고 했는데, 그것들은 설법장소를 이 공간에서 파괴해 버리려 하였다. 결국 그것들은 사부님께 제거당하고 말았다. 지난(济南)반의 설법 중에서 한 수련생이 이번 마의 교란에 대해 여쭈었을 때, 사부님께서는 그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실은 매 학습반마다 모두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교란이 있었던 것이다.
그 날 정전이 되었을 때, 강단 아래에서 불안해 술렁거리자 사부님께서 “한 번은 석가모니가 산굴에서 설법하는데 바람이 훅 불어 굴 안의 기름등잔 불들이 다 꺼졌지만 그래도 모두 조용히 법을 들으면서 한 사람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아무것도 당신을 건드릴 수 없습니다.”라며 고사 하나를 들려주셨다.
사부님께서는 정저우반에서 결정하셨다. 중국 대륙에서 지난과 다롄 두 개 학습반을 더 꾸리고 후에는 꾸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다른 공간의 압력, 층층층층의 낡은 신, 낡은 요소의 저애 때문이란 것을 나는 느꼈다. 학습반을 중지한 이후 몇 달 동안, 사부님께서는 줄곧 청리하고 계셨는데, 중생구도에 대한 다른 공간의 장애를 해결하셨다. 그때에 사부님의 엄숙한 심정을 느낄 수 있었고, 중생을 구도하시는 사부님의 어려움을 깊이 느꼈다.
어느 날인가 수업하기 전인데, 강당 문 밖에서 몇 수련생이 연구회의 한 인원에게 수련에 관한 일부 일을 물었고 나도 문제 하나를 물어 보았다. 그녀는 그때 매우 엄숙한 태도로 몹시 격동되어 나에게 “어느 때인데 당신은 아직도 그렇게 많은 문제를 염려하고 있습니까? 수련해 올라갈 수 있겠습니까”라고 했다. 그녀는 열려서 수련하기에 다른 공간에서 짓눌려 들어온 무서운 정경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문제 해답에서 한 수련생이 사부님께서 높게 말씀하신다고 하자 사부님께서 “높습니까? 나에게는 한자, 열자, 백자가 있는데, 당신에게 말해 준 것은 한 치도 되지 않습니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나는 내가 무엇을 깨닫든지, 사부님 앞에서는 “그건 아무것도 아니다!”, 어느 때든 어떤 성적이 있든 영원히 교만한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된다! 영원히 대법 중의 한 작은 입자라고 생각했다.
하루는 팀을 나누어 사부님과 사진을 찍었는데, 허베이와 둥베이의 수련생이 함께 찍고 스자좡에서 온 십여 명의 수련생들이 단독으로 사부님과 함께 찍었다.
정저우반이 끝날 때, 사부님께서 강당의 강단에서 제자들과 악수하면서 작별하셨다
최후의 한 차례 강의가 끝나 강당을 떠나야 할 때, 나와 함께 간 다른 한 수련생은 떠나기 아쉬워 오래도록 서 있었다. 사부님께서는 강단에 서계시면서 떠나가는 사람들을 눈으로 묵묵히 주시하셨다. 이 때 한 노 수련생이 눈물을 가득 흘리면서 앞으로 나아가 사부님과 악수하자 다른 사람들도 연이어 나아가 악수하였다. 사람이 많아 앞으로 끼어들기 쑥스러워 수련생과 함께 밖으로 나갔다가 그만 참지 못하고 또 돌아와 앞으로 나갔다. 사람이 너무 많아 사부님께서 몸을 내 밀고 두 손을 다 벌려도 손을 다 잡을 수 없었다. 나는 그저 닿는 대로 사부님 손등을 만져 보고는 한쪽으로 물러서서 이 작별의 장면을 바라보았다. 이때 수련생들의 울음소리가 장내에 넘쳐났다. 나는 사부님께서 절절하게 “어서 가십시오! 기차시간을 놓치겠습니다! 어서 가십시오!”라고 재촉하시면서 말씀을 하시면서도 눈에는 눈물이 글썽하여 흘리지 않으려고 온 힘을 다해 억제하고 계시는 것을 아주 똑똑히 보아냈다. 사실 사부님께서도 제자들을 떠나고 싶지 않으셨던 것이다. 이 장면을 보면서 나는 더는 참지 못하고 눈물을 억수로 쏟았다. 여관으로 돌아오는 여러 역을 지나는 길에서 줄곧 눈물을 흘렸다. 나는 함께 가는 동수에게 말했다. 왜 눈물이 멈춰지지 않을까, 난 이전에 무슨 일 때문에 눈물을 흘렸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세 번째: 지난반(济南)
아직도 반이 두 개 남아 우리 함께 간 몇 사람은 지난으로 가기로 합의를 보았다. 지난역 부근의 새로 지은 여관 2층에 들어갔는데, 이 여관에는 광저우(廣州), 칭하이(靑海), 우한(武汉)에서 학습반에 참가하려고 온 사람들로 가득 찼다. 저녁 식사 후에 옥상에서 바람을 쐴 때, 우한 은행에서 온 한 누님이 하는 말이 그녀는 모든 가로등에 모두 굉장히 아름다운 채색 파룬이 돌고 있는 것을 봤다고 했다. 그녀는 또 정저우반에서 하루는 여관으로 돌아오는 길에 피 한 사발을 토했는데도 아무 일 없었다면서 사부님께서 그녀에게 몸을 조절해 주시는 것임을 알았다고 했다.
우리가 투숙한 이 여관 주인은 30대의 남자였는데, 이렇게 많은 외지 사람이 와서 학습반에 참가하는 것을 보고 그도 참가 하였다. 그는 하루에 담배 세 갑씩 피웠는데, 학습반에 참가한 이튿날에 담배를 끊고서 아주 신기해했다. 그리하여 그의 어머니, 아이도 모두 참가하였다. 마지막에 이 여관에 투숙했던 모든 사람이 옥상에서 단체 사진을 찍었는데, 뒤는 바로 지난 대명호(大明湖)였다.
나는 촬영을 즐겼으므로 지난으로 가기 전, 정저우반이 끝나기 전에 사진기를 사서 지난(济南)반에서 적지 않은 사진을 찍었다. 모두 사부님께서 어느 날 “찍지 마시오. 더 찍는다면 못쓰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때 한 수련생이 사부님께서 강연하고 계시는 책상 앞에서 이리 찍고 저리 찍으면서 사람들이 강의를 듣는 데 영향을 주었기 때문에 사부님께서 그를 겨냥해서 말씀하신 줄로만 여겼다. 나는 그때 사부님 오른 쪽에 있는 위쪽 계단에 앉았고 강단과는 거리가 멀었다. 나는 그때 바로 사진을 찍으려 하였고 사부님께서 그 말씀을 마치자 나는 또 한 장 찍었다. 곁에서 강의를 듣는 수련생은 줄곧 나만 지켜보고 있었는데, 뜻인 즉 당신은 왜 사부님 말씀을 듣지 않는가 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때 사부님께서 나를 말한 것이 아니라고 여겼으며, 또한 거리가 멀었으므로 설법에 방해가 안 되고 사부님도 모르고 계실 거라고 여겼다. 사부님께서 하신 말씀은 법이며, 보편적인 구속력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또 무수한 호법신이 있다는 것을 잊었던 것이다.
결국 나는 몸으로 법을 시험했던 것이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나중에 모든 필름이 죄다 노출과다 되었고 사진기도 더는 쓸 수 없게 되었다. 수리점에 가져가도 수리할 수 없었다. 그제야 나는 수련의 엄숙성과 대법의 위력을 느끼게 되었다. 사진기는 새것이어서 문제가 없는 것이었는데, 첫 필름은 사진이 아주 잘 나왔으나 두 번째 필름은 전부 노출과다 되었던 것이다.
이 일로 나는 매우 깊은 인상을 받았다. 사부님께서 하신 말씀은 곧 법이므로 위반하면 상응되는 징벌을 받게 되는 것이다. 어떤 땐 자신이 잘못해도 아무런 느낌이 없는 것 같지만 손해는 아마 다른 공간에서 나타날 것이며, 아니면 사부님께서 자비하시어 우리를 대신해 감당하셨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루는 온 강당의 수련생 대다수가 부채질 하고 있는 것을 보았는데, 아롱다롱한 부채들이 마치 나비 날개처럼 움직이는 것 같아 매우 엄숙하지 못했다. 잠시 후에 사부님께서 “부채질 하는 사람들, 부채를 내려놓아 보십시오.”라고 말씀하셨다. 확실히 시원한 바람이 뒤에서 불어오는 것을 느꼈다.
지난(济南)반에서 어느 날, 이렇게 좋은 법을 마땅히 더 많은 사람이 알게 해야겠다는 느낌이 갑자기 들었다. 홍법하려는 마음이 대폭 증가되어 나가기만 하면 즉시 연공장을 세우겠다고 생각했다. 돌아온 후에 한 아주머니와 함께 한 길가 옆의 공터에 연공장을 세웠고, 후에는 이 연공장에서 또 여러 개의 작은 연공장이 갈라져 나갔다.
지난(济南) 반을 꾸리는 것 역시 쉽지 않았다. 듣자하니 기공협회에서 처음에 몇 백 명밖에 수용할 수 없는 작은 강당을 정하였다. 보도소에서 체육관으로 바꾸자고 해도 그들은 줄곧 동의하지 않으면서 아주 오랫동안 대치하고 있었다. 어느 노 수련생은 조급한 나머지 울음을 터뜨렸다. 나중에 가서야 겨우 체육관으로 정할 수 있게 되었다.
95년 사부님께서 지난에 법을 전하신 2주년을 경축하여 열린 법회
네 번째: 광저우 학습반
일요일 아침에 체육관에서 아침 연공을 마친 후, 파룬궁수련생한테 광저우에서 학습반을 꾸린다는 말을 들었다. 그때는 학습반을 꾸리는 시간이 매우 가까워져 입장권도 진작 다 팔려서 가슴이 싸늘했고 의기소침해졌다. 자전거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 가슴속에 서서히 조류가 밀려들면서 이번 기회뿐이라는 생각이 갈마들었다. 이 마을을 지나버리면 다시는 이런 가게가 없을 것이다. 오른 손을 나도 모르게 정수리 위로 추켜들고 산을 쪼갤 듯 힘 있게 내저으니 즉시 일념이 생겼다. 나는 반드시 가고야 말겠다.
하지만 어떻게 가겠는가! 나는 중의학원의 몇 몇 학생과 상의하였는데 나중에 한 수련생이 말했다. 그가 먼저 가서 길을 알아보고, 그곳에 가서 표를 얻을 수 있는지 알아본 뒤에 표가 있으면 다시 가기로 했다. 그런데 그가 간 뒤로 연락이 두절되었다. 우리는 또 실망했지만 그래도 가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내가 가려 해도 곤란한 점이 네 가지가 있었다. 1. 입장권이 없다, 2. 기차표가 없다(그때는 광저우로 가는 기차표 사기가 쉽지 않았다. 지금처럼 앞당겨 며칠 전 표를 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설 기간이어서 하루 한 번만 차가 달렸다), 3. 휴무일이 없고 직장에도 휴가가 없었다) 4. 돈이 없었다. 그때는 봉급이 가련할 정도로 적어서 굉장히 부족했다).
그 몇 대학생도 돈이 없었다. 우리는 가장 싼 라면 한 자루에 짠지를 갖추었다. 그곳은 여관이 엄청 비싸다고 하기에 길가에서 자기로 했다.
마지막에 갈 수 있는 사람은 네 명이었고 거기에 우리 직장의 식당에서 밥을 짓고 있는 산동출신 꼬마전사까지 모두 5명이었다.
이 일을 통하여 내가 깨달은 것은, 오직 마음이 법에 있고 옳다고 여긴 길을 걸어가기만 하면 막다른 골목에서도 길이 열려 좋은 일로 변한다는 것이었다. 사부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이 바로 우리의 이 향상하는 마음인 것이다. 실제상 모든 곤란은 모두 가상인 것이다. 결국 이 ‘네 가지 곤란’은 네 가지 순조로움, 네 가지 길상으로 변했던 것이다.
휴가신청 전에 누나더러 직장에 “집에 일이 생겼으니 속히 돌아올 것.”이라는 전보를 치라 하였다. 나는 이것도 거짓말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법을 듣는 것은 집안의 가장 큰 일이 아닌가. 휴가신청을 하러 간 간부는 전보를 들고 상급에 서명을 받으러 갔다. 토요일 오후, 휴식이 다가온 데다 휴가를 허락해 주는 지도자는 평소에 말을 걸기 쉽지 않은 사람인지라 전보가 있다 해도 비준해 줄지 알 수 없었다. 당일 저녁의 기차표를 떼서 초조한 나는 사무청사 앞에서 묵묵히 사부님께 청했다. 그러자 이때 짙은 꽃향기가 몰려 왔는데, 먼저 번 스자좡 학습반에서 맡았던 향기와 똑같은 것이었다. 마음속에 기쁨이 솟아나면서 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는데 잠시 후에 그 간부가 기뻐하면서 돌아왔다, 비준했던 것이다.
기차표를 살 때, 사전에 역전의 아는 사람을 찾아 갔는데 표가 없다고 하였다. 하지만 시간이 되면 차를 타고 표를 다시 살 수 있다고 했다. 우리가 역에 도착했을 때 그는 우리에게 좌석표가 있는 기차표를 마련해 주었다.
차에 오르니 파룬 휘장을 단 많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둥베이, 베이징(北京)에서 학습반에 참가하러 가는 사람들로서 대다수가 이 열차에 올랐다. 베이징의 한 노 수련생은 사부님께서도 이 열차에 타셨다고 했다. 그 누님과 함께 모든 침대칸을 다 훑었지만 사부님을 찾지 못했다. 후에야 사부님께서 침대칸에서 주무 실리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허난(河南), 후베이(湖北)를 지날 때 또 한 무리의 수련생들이 탔는데, 누구를 보든지 마치 오래 갈라졌던 친척을 만난 것처럼 친근했다. 4, 5살쯤 돼 보이는 여자 애가 작은 파룬 휘장을 가슴에 달고 통로에서 퐁퐁 뛰어 다녔다. 나는 그 애에게 어디서 왔으며 누구와 함께 왔느냐고 물었다. 그 애는 “우한에서 아빠하고 함께 왔어요.”라고 했다. 처음으로 우한 말씨를 들었는데, 유달리 친근했다. 그 애 아빠를 만나 한 단락 진귀한 인연을 맺었는데, 여기서는 더 세세히 말하지 않겠다.
하차 후에 먼저 온 갑 수련생이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었고, 여관 비용은 7위안으로 괴상할 정도로 쌌다. 원래는 중의학원 학생 기숙사였는데, 방학이어서 몇 층이나 되는 기숙사에 모두 법을 들으러 온 파룬궁수련생들이 가득 찼다.
광저우반 역시 꾸리지 않는다고 했지만 기공협회는 돈을 벌기 위하여 억지로 학습반 광고를 기공 잡지에 냈던 것이다. 광저우 기공협회는 예전에 대규모의 기공 학습반을 꾸려 본 적이 없었던지라 표가 팔리지 않을까봐 앞당겨 잡지에 표 파는 소식을 실었고, 그 표를 많이는 이메일로 팔았는데, 선입금하면 컴퓨터에 이름을 올리고 학습반에 오면 표를 주기로 했다. 하지만 표를 사는 사람이 그렇게 많으리라고 그들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표는 진작 다 팔렸을 뿐만 아니라 표에 관한 문의전화가 끊이지 않아 그들은 매우 바빴다.
학습반을 열기 전날 그들은 컴퓨터가 고장 나서 정보를 잃었다고 했다(그때는 컴퓨터가 아직 보급되지 않아 기술 함량이 매우 낮았다). 많은 사람이 앞당겨 돈을 지불하고 예약을 했는데, 이렇게 되니 많은 사람들이 표를 가지지 못하게 되어 줄을 길게 서서 표를 다시 발급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더욱이 길림대학과 기타 둥베이의 학생들이 많이 왔는데, 체육관의 광장은 사람들로 넘쳐났고 대부분은 표가 없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한 노 수련생에게서 들었는데, 사부님께서 차에서 내리시자마자 곧장 광장에 오셔서 이 정경을 보시고는 눈물을 흘리셨다고 했다. 이는 다른 공간의 교란으로서, 반영되어 온 것은 바로 사람들이 법이 얻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또 교란 원인이 있었는데, 이전에 광저우의 어떤 곳에 불이 난 적이 있어 체육관에서는 불이 날까봐 입석권을 많이 팔 엄두를 내지 못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학습반을 시작한 후 며칠 사이에 기공협회와 체육관에서 사사로이 판 입석권이 갈수록 많아지고 갈수록 비싸져 몇 십 위안에서 몇 백 위안이 되었다.
시작하는 첫 날에 매우 많은 사람들이 회의장에 들어가지 못하였다. 法輪大法(파룬따파) 연구회 사업일꾼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들어가지 못한 것을 보고 조급해 울기까지 했다. 들어가지 못하게 해도 가지 않고 체육관을 둘러싸고 조용히 앉아 있다가 사부님께서 설법을 마치자 그제야 흩어졌다. 어떤 사람은 몇 천리 밖에서 왔다. 기공협회의 사무실이 바로 맞은편인지라 기공협회와 체육관 사람들은 모두 몹시 감동을 받았다. 드디어 이튿날 밖에다 스피커를 달아 놓는 데 동의하였고, 아울러 체육관에 달린 큰 회의실에서 들어가지 못했던 수련생들에게 날마다 그 전날의 사부님 설법 녹화를 방영하였다.
우리들의 표는 먼저 도착한 갑 수련생이 기공협회와 여러 날 실랑이 한 끝에 얻어 낸 입석권이었다. 입석권이란 바로 좌석번호가 없는 것으로서 체육관의 빈자리에 아무렇게나 앉는 것인데, 좌석표가 있는 어떤 사람은 표를 바꾸어 사부님과 좀 더 가까운 곳에 마주 않아 똑똑히 보려 하였다. 나는 그래서 두 번째 줄에 앉게 되었는데, 사부님과 십 미터도 안 되는 거리에 앉았다.
한 번은 사부님께서 회의장을 한 바퀴 도셨는데, 가까운 곳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사부님과 악수를 했다. 나와 함께 갔던 군대 전우(그때 그는 군복을 입고 있었다)도 일어나 사부님과 악수를 하고는 기뻐했다. 그는 나에게 사부님의 손은 솜처럼 부드럽다며 ‘부처님 손은 부드럽다’는 옛날 속담이 있다고 했다.
어느 날, 우리 많은 사람들은 광저우 중의학원 옥상에서 야경을 구경했는데, 공중에 크고 작은 밝은 빛 덩어리들이 어떤 것은 빠르게 어떤 것은 느리게 날아다니고 있었다. 이튿날, 나는 쪽지를 써서 사부님께 이것이 파룬인지 여쭈었다. 사부님께서 “파룬이 맞습니다. 학습반을 꾸린 이 며칠 동안은 온 광저우 지역을 모두 덮었습니다.”고 말씀하셨다.
이밖에, 스자좡(石家庄)에서 단독으로 간 부부가 있었는데, 원래 병을 치료하려고 갔던 것이다. 그들은 사부님의 뒤쪽 좌석에 앉았다. 마지막 한 강의에서 사부님께서 대수인을 하실 때, 남자 수련생은 사부님의 팔이 투명한 것을 보고 격동되어 일어나서는 “보입니다, (신기한 정경이) 보입니다.”고 하며 박수를 쳤다.
마지막 한 강의가 끝나기 전, 사람들은 자원적으로 사존님께 우승기를 드렸는데, 개인이나 가정을 대표한 것도 있었으며, 더 많이는 지역을 대표한 것이었다. 각종 우승기가 강단에 20여 미터나 놓여졌다. 몇 십 폭의 우승기는 모두 내심으로부터 우러나온 것으로서 정성과 성실을 바치는 하나하나의 마음이었으며, 이 장면에 사람들은 감동을 받았다. 끝난 후에 한 수련생은 나를 몹시 원망하며 “우리 스자좡에서 간 사람들은 왜 우승기를 준비하지 않았는가. 다른 지역에서는 다 갖추어 갔는데, 사전에 나하고 말했다면 나는 8개는 갖고 갈 수 있는데.”라고 했다. 나는 이 일을 생각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 학습반은 티베트를 제외한 다른 성에서 모두 참가한 사람이 있었다.
학습반이 결속되어 체육관을 나오면서 나는 줄곧 눈물을 줄줄 흘렸다. 이번에 나는 군복을 입고 있었기에(나는 이 역시 홍법의 한 가지라고 여겼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군대에서도 학습반에 참가했다는 말을 한 것을 들은 적이 있다) 길에서 사람들이 의아해 할 것 같아 군모를 내리 눌러 눈물을 감추려 하였다. 역 몇 곳을 지나서야 겨우 눈물이 멈췄다.
나는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 너무도 많다는 것을 알고 있다. 연공장으로 돌아가니 한 노 수련생이 다른 수련생에게 내가 광저우에서 돌아간 후 내 주위에 수많은 작은 파룬들이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하였다.
다들 알다시피 99년 전체적인 박해 때문에 나는 2000년에 부대를 떠나 지방으로 돌아왔다. 온 지도 이젠 11년이 되었다.
사부님께서 법을 전하신 지 19년이 되었고, 파룬궁이 박해 당한 지도 12년이 되는 때에 또 한 번의 ‘5.13’을 맞이하게 되면서 이 글을 특별히 사부님께 드리고 수련생들에게 드린다. 만약 수련생들의 정진에 고무격려가 될 수 있다면 그건 나의 기쁨과 위안이 될 것이다.
부당한 곳이 있다면 수련생들께서 자비로 지적해 주기 바란다. 여기에서 사부님께 머리를 조아려 인사드립니다! 사존님께 올리는 망배를 천 마디 만 마디 말로 삼겠습니다.
문장발표 : 2011년 5월 15일
문장분류 : 수련마당
원문위치 :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1/5/15/240558.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