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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으로 찾아 겹겹이 있는 인간마음의 껍질을 깨자

글/ 대륙 대법제자

[밍후이왕] 한번은 법공부 팀에서 교류할 때 비교적 정진하여 나에게 본보기가 된 갑수련생이 말했다. “밍후이왕에 발표한 글을 잘 썼던데 왜 실제로 하지 않고(문장에 나왔던 항목) 소책자만 배포하나요?” 나의 첫 반응은 해명이었다. “왜 하지 않았겠어요? 당신께 알리지 않았을 뿐이죠.” 이 말은 자연스럽게 튀어나왔는데 자신을 위해 변호하는 것이 이미 습관으로 된 듯 했다. 상처 받지 않으려고 즉시 해명하는 습관은 나를 둘러싸고 있는 가장 겉에 있는 인간마음의 껍질이었다.

그러나 그 껍질 안에 또 껍질이 있었다. 법공부가 끝난 후 나는 전에 나와 함께 대법 항목을 했던 을 동수에게 계속 설명했다. “그동안 나는 대법 일을 한 후 다른 사람이 모를까 봐 동수와 ‘교류’할 때 자기도 모르게 흥미진진하게 떠벌리며 모두 말했는데 법공부를 통해 그것이 과시심리라는 것을 인식했습니다. 과시심리 배후에는 명을 구하는 마음, 다른 사람의 인정을 받고 자신을 실증하려는 인간마음이 있었습니다. 이런 마음은 모두 닦아 버려야 하는 것이죠.”

“그 후 나는 대법일은 자신의 책임이고 마땅히 잘해야 하는 일이며, 법을 실증하고 사람을 구하는 것으로 내가 특별할 것이 없다는 것을 인식했습니다. 이러한 인식이 있으니 과시심리가 생기지 않았습니다. 마치 평소 생활에서 장을 보고 밥 하고 청소하고 빨래하는 것처럼, 이런 것은 내가 가정에서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일 뿐인데 과시할 수 있겠습니까?”

“때문에 지금 나는 자신의 과시심을 주의해서 닦습니다. 하지만 인식했다고 해서 즉시 잘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대법을 실증하는 일이나 사람을 구하는 일을 한 후 과시하지 말아야 한다고 시시각각 자신을 일깨웁니다. 예를 들면 지금 우리가 함께 하는 항목도 나 한 사람이 홀로 할 때가 있는데, 약간의 난관에 부딪쳤을 때 말한 것 외에는 말한 적이 없어 당신도 모를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상처를 입지 않기 위해 만들어낸 두 번째 인간마음의 껍질이었다. 하지만 끝이 아니었다. 갑 수련생이 “당신이 글은 잘 썼는데 왜 실제 하지 않았나요?”라고 말했는데 생각해보니 이 말의 뜻은 내가 말만 하고 일은 적게 했다는 뜻이 아닌가? 심지어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의심하는 뉘앙스도 있지 않은가?

그리하여 또 을 동수에게 말했다. “문장을 쓰는 것은 자신이 이미 해 놓은 일에 대한 체득을 적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실 나는 문장을 밍후이에 보낸 후 발표가 됐는지에 대해서 개의치도 않았고 쓰는 과정이 바로 제고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밍후이에서 한편의 문장 아래 첫번째 관련문장이 내가 쓴 것이라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자세히 보니 4개월 전에 발표된 것이더군요. 다시말해 나는 문장이 발표된지 4개월 후에야 알게 된 것이죠.”

이것은 내가 상처를 받지 않기 위해 만들어낸 세 번째 인간마음의 껍질이었다. 이상 서술한 겹겹의 인간마음의 껍질은 사부님 말씀을 떠올리게 한다. “비교하건대 가장 더러운 세계에 떨어지고서도 당신들은 재빨리 되돌아 수련하지 않고 오히려 또 더러운 세계 속의 그런 더러운 것들을 잡고 놓지 않으며 심지어 조금만 손실 보아도 여전히 고통스러워 어쩔 바를 모른다.”(정진요지-진수)

유사한 사례는 매우 많다. 예를 들면 내가 다른 법공부 팀에 가서 법공부를 하게 됐는데 법공부 장소에 도착해 대문에 들어설 때 내 뒤에서 한 수련생이 들어왔다. 나는 대문에 들어선 후 자연히 문을 잠그는 일을 생각하지 않았다. 객실을 지나 뒷방 법공부하는 장소에서 가부좌하고 있었는데 집주인 수련생이 나에게 말했다. “들어온 후 왜 대문을 잠그지 않았나요?”

나는 급히 해석했다. “제가 마지막에 들어온 것이 아니에요.” 아마 내가 말한 소리가 낮았는지 수련생은 듣지 못했다. 그녀는 다른 방에서 책을 갖고 와 또 나에게 같은 말을 물어 보았는데 나는 또 해명했다. “내가 들어온 후 또 다른 수련생이 들어왔어요.” 내 곁에 앉은 한 수련생이 말했다. “이후 주의하면 되죠.” 노년수련생의 말이 끝나자 나는 단번에 자기가 한 말이 법에 있지 않은 것을 발견했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수련인이 안으로 찾는 이것은 하나의 법보(法寶)이다.”(2009년 워싱턴 DC국제 법회 설법) 나는 이 법보로 안으로 찾아보겠다. 나는 무엇 때문에 자신이 늘 이러한 일에 대해 반복해서 해명하고 해석하는가? 목적은 자신이 틀리지 않은 것을 실증하는 것이 아닌가? 사부님은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은 줄곧 자신이 옳다고 강조하는데, 당신이 옳았고 당신이 잘못이 없다 한들, 또 어떻단 말인가? 법에서 제고했는가? 사람의 마음으로 옳고 그름을 강조하는, 이 자체가 바로 틀린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은 속인의 그 이치로 당신 자신을 가늠하고 있고, 당신은 속인의 그 이치로 다른 사람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이 볼 때 한 수련인이 세간에서, 당신이 옳고 그름은 전혀 중요하지 않고, 사람 마음의 집착을 제거하는 것이 오히려 중요하며, 수련 중에서 당신이 어떻게 사람 마음의 집착을 제거하는가가 비로소 중요한 것이다.”(맨해튼설법)

그러면 변명, 해석의 배후에는 어떠한 사람마음의 집착이 있는가? 변명, 해석 자체는 사실 다른 사람이 오해할까 봐 두려워서이고 자신이 속상하고 분할까 봐, 억울함을 당할까 봐 두려운 것이다. 반복해서 변명하고 해석하는 것은 강렬한 자아를 수호하는 것이다. 나는 오해당하지 말아야 하고, 나는 괴롭힘을 당하지 말아야 하며, 나는 억울함을 당하지 말아야 하고, 나는 질책을 받지 말아야 한다 등등이다. 다른 사람이 오해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마음은 사실은 일종 비교적 모호한 명을 구하는 마음이고 일종 잠재적으로 다른 사람의 인정을 바라는 마음이며 동시에 또 다른 사람이 말하지 못하게 하는 마음을 포함한다. 이런 마음을 다시 깊이 파보니 그것이 반영한 것은 자신에 집착하는 마음, 자신을 실증하는 마음이며 뿌리는 ‘사(私)’이다.

자신의 사람마음 집착을 찾았으면 마땅히 즉시 바로 잡아야 한다. 사람마음을 집착하는 것은 후천적으로 형성된 것이지 우리 몸이 본래 소유한 것이 아니다. 한 대법수련자로서 일이 생기면 마땅히 먼저 자신을 찾고 자신의 부족함을 안으로 찾아야 하고 그것을 닦아 버려야만 제고이고 수련이다. 당신에 대한 그런 오해, 심지어 당신을 원망하고 당신을 자극하는 말은 아마 사부님께서 우리 자신을 제고하라고 만든 것일 것이다. 우리의 제고야 말로 제1위이며 마땅히 다른 사람이 한 말의 옳고 그름, 좋고 나쁨에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이후 다른 사람이 자신을 뭐라고 말하든지, 설령 질책을 받아도 마땅히 변명하지 말고 해석하지 말아야 한다. 만약 이럴 수 있다면이러한 사람의 것은 좋고 나쁨을 막론하고 자신을 움직이게 할 수 없다.

이런 사람마음의 껍질로 인해서 수련 중에 완전히 자신을 내려놓지 못하고 정정당당하게 대법에 용해되지 못했다. 때문에 마땅히 자아에서 걸어 나와야 하고 자아를 내려놓고 포기를 배워야 한다. 자아에서 걸어나오고 자아를 내려놓는 것은 사람에서 걸어나오는 과정이고 또한 각자로 성취하는 과정이다. 이 과정 중에 안으로 찾고 자신의 천백년 이래 뼛속 깊은 곳에 형성된 그런 사람마음을 주의하여 청리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자신에 대한 여러 의견을 접수할 수 있고, 자신이 접수하기 싫은 것을 접수할 수 있으며, 자신이 고집하는 우주의 진선인(眞善忍) 특성에 부합되지 않는 그런 나쁜 사람마음과 집착을 포기할 수 있을 때야만 자아를 내려놓는 것을 습득하고 포기를 습득해 수련의 실질을 잡고 자연히 층층 사람마음의 껍질 속에서 해탈되어 나올 수 있다.

층차의 한계로 부족한 곳이 있으면 동수들의 자비로운 시정을 바란다.

문장발표: 2011년 6월16일
문장분류: 수련마당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1/6/16/24250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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