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호주대법제자 [밍후이왕]
사부님 안녕하십니까!동수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원래 이번 법회 전에는 원고를 쓸 생각이 없었다. 왜냐하면 올해 1월 법회에서 이미 원고를 발표했고 또 올해 션윈공연을 준비하면서 자신이 잘하지 못해 별로 쓸 내용이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단체 교류 중에서 여러분들이 올해 션윈을 개최한 것에 대해 회고와 총결에서 느낀 바가 있어 이 문장을 써서 발표하고 또 자신의 반성으로 삼고자 한다.
올해 시드니 션윈공연이 끝난 지 몇 주 후 나는 참여한 수련생들의 총결과 피드백에 근거해 두 차례 단체법학습에서 개괄적으로 총괄과 회고를 했다. 그 후 피드백을 들어보니 적지 않은 수련생들이 이런 총결에 대해 불만이 많았다. 또 어떤 피드백에서는 수련생이 내가 올해 크게 미끄러져 감히 책임을 맡을 수 없으며 책임을 미루며 표면적인 문장만 써서 자신을 위한 구실을 찾으려 한다는 말이 들렸다. 처음 이런 피드백을 들은 후에는 마음이 아주 불편했고 좀 억울한 느낌이 들었다. 이번에 션윈 협조인이 7명인데 왜 아직도 이런 원망이 내게만 떨어지는가? 또 나는 각기 다른 크고 작은 법학습 교류 중에서 주동적으로 책임을 감당했으며 또 이번에 성공하지 못한 책임을 다른 협조인에게 미룬 적이 없고 다른 수련생이 협력하지 않았다고 탓한 적도 없는데 수련생들은 왜 여전히 불만이 있을까?
기왕 마음이 움직이자 평정을 이룰 수 없었다. 나는 우선 마음을 조용히 하고 법학습을 많이 하고 자신을 찾으며 스스로에게 너무 빨리 결론을 내리지 말자고 생각했다. 동시에 나는 또 자신의 수련상태를 조절해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습관을 고치며 오랫동안 야외연공에 참가하지 못한 것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기로 결심했다. 내 마음에서 이런 바람이 움직이자 사부님께서는 아주 교묘한 배치를 해주셨다. 일단 야외연공을 회복하자 ‘수련을 처음처럼 하는 것 같은’(《2009년 대뉴욕지역법회 설법》) 느낌을 체험했으며 또한 사부님의 격려와 세심한 안배를 느낄 수 있었다.
비록 집 근처의 아주 조용한 거리에서 연공을 했지만 첫날 아침에 나가 연공하자마자 인연 있는 사람이 찾아와 공을 배우려 했다. 다음날 가부좌할 때는 갑자기 왜 요즘 다른 사람들이 이유 없이 나를 질책하는지 깨달았다. 나의 어떤 집착을 제거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아주 큰 불평하는 마음을 해결할 수 있었다.
셋째 날 연공할 때는 전에 잘 알지 못했던 인근에 거주하는 수련생이 내가 연공하는 것을 보고는 아주 기뻐하며 나와 함께 이곳에 연공장을 만들기로 했다. 우리는 매일 아침 함께 연공을 했다. 동시에 전에 션윈 때문에 비교적 바빠서 한동한 중단했던 법암송도 다시 회복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다시 한 번 왜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수련생으로서 말하자면 수련에는 지름길이 없으며 신수련생도 마찬가지다. 바로 착실하고 착실하게 대법제자가 마땅히 해야 할 3가지 일을 잘해야 한다.”(《각 지역설법 7》〈미국서부국제법회설법〉)라고 말씀하셨는지 감수할 수 있었다.
이렇게 법학습을 강화하고 착실히 수련하는 과정을 거쳐 나는 비로소 마음을 내려놓고 이번 션윈공연을 치른 과정과 그 중에서 자신의 수련상태를 조용히 되돌아볼 수 있었다. 나는 또 동수들의 비평과 피드백 중에 이 과정 중에서 나의 많은 집착심과 부족이 반영되어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우선 나는 비록 이번 시드니 션윈공연에 7명의 협조인이 있었지만 올해 공연이 성공하지 못한 책임은 마땅히 99% 내게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불학회(佛學會) 총협조인으로서 나는 100% 전력을 다하지 못했으며 일을 하는 과정 중에 진지하고 세밀하게 하지 못했으며 대충대충했다. 또한 다른 협조인들과 진솔하게 교류하며 우리 사이의 간격을 제거하지 못했다. 공연판촉과 정책을 결정하는 과정에 편차가 나타난 것을 보았을 때도 제때에 지적하고 시정하도록 돕지 못했으며 회피하거나 어쩔 수 없어하는 소극적인 태도를 취해 다른 협조인들더러 결정하거나 책임지게 했다. 비록 당시 나의 표면적인 생각은 자신의 의견을 고집하지 않고 수련생 중에 모순과 저애력을 만들지 말자는 것이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자세히 생각해보니 그 배후에는 자신을 보호하고 남에게 죄를 짓지 않으려는 사심(私心)이 있었으며 법에 대해 책임지고 중생을 구도하려는 마음이 부족했다.
“의심 가는 사람은 쓰지 말며 쓴 사람은 의심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올해 몇몇 불학회 밖의 노수련생들이 함께 션윈공연을 협조하는 과정에 참여해 일부 구체적인 판촉전략을 세우거나 단체 티켓팅과 자선공연 등의 방면에서 서로 다른 의견이 나타났다. 나는 비록 표면적으로 반대하거나 부정적인 의견을 제시하진 않았고 마치 협력하는 듯했지만 진정한 수련인처럼 그렇게 하지 못했으며 다른 협조인들과 진솔하게 마음을 열고 교류하면서 서로간의 간격을 제거하지 못했다. 또 소극적이고 회피하는 태도를 취했다. 비록 표면적으로는 평화롭게 대했지만 서로간에 내심(內心)의 간격은 다른 공간에서 중생을 구도하는데 얼마나 큰 저애가 되었을 지 모른다.
다음으로 일부 판촉의 방향에 문제가 나타나고 실제적인 효과를 볼 수 없는 상황하에서 법을 위해 책임지고 판촉방향을 조절하도록 돕지 못했다. 왜냐하면 자신이 이런 방식에 그다지 찬성하지 않았기 때문인데 참여한 수련생들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가 있었고 그들이 자아에 집착한다고 여겨 다른 수련생의 의견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자아와 개인관념을 내려놓고 주동적으로 솔직하게 협조하는 수련생들과 교류하고 조정하도록 돕거나 혹은 부족한 점을 보완하지 못했으며 회피하고 원망하는 심태를 품고 이런 동수들과 소통하려 하지 않았다.
올해 협력상 존재하는 문제를 보았을 때에도 소극적인 심태로 구실을 찾아 이것은 다른 협조인이 책임질 부분이라고 말해 서로 책임을 미루며 진정으로 책임지고 감당하지 못했다. 가령 올해 단체매표는 소조간에 간격이 존재했고 협력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왜냐하면 판촉의 방향과 전략에서 서로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있어 각자 자기 주장을 고집했으며 서로 소통하고 협력하는 것이 부족했다. 심지어 소조간에 인력을 두고 다투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나는 이런 문제를 보고도 국면을 변화시킬 힘이 없다고 여겼으며 진정으로 법에 대해 책임지는 태도로 주동적으로 소통하고 조율하며 참여한 수련생들로 하여금 진정으로 하나의 정체를 이루게 하지 못했다.
올해 션윈을 끝낸 후 협조를 맡은 몇몇 수련생들은 모두 올해 책임을 잘 감당하지 못했으니 내년에는 더 이상 협조일을 맡지 않겠다고 했다. 나 역시 진지하게 자신이 주동적으로 책임을 감당할 용기가 있는지 고려하기 시작했고 총협조인의 자리에서 물러나 보다 능력 있는 수련생이 맡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필경 시드니는 능력 있는 사람이 많고 노수련생도 많은 지역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션윈협조인을 몇 년간 맡았음에도 모두 잘하지 못했으니 이는 자신이 협조인을 하는데 집착이 있는 것이 아닌가?
최근 어느 날 발정념을 할 때 나는 갑자기 깨달았다. 협조인을 하는 것은 무슨 집착이 아니며 또한 무슨 권력도 아니다. 또 대법제자는 아주 오래 전에 서약을 맺었는데 이 책임을 미룬다면 이는 서약을 위반하는 것이 아닌가? 대법제자가 자신의 약속을 실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더욱이 실패와 질책의 압력 앞에서 물러나 질책과 압력을 피하기란 하기가 더 쉽겠지만 그것이 수련의 제고인가? 자신의 부족과 타인의 비판에 직면해 계속해서 책임을 지고 앞으로 걸어 나가는 그것이 바로 수련이 아닌가?
한 차례 교류에서 어떤 수련생이 왜 시드니 션윈은 매년 사람을 바꿔 수련생에게 누적되고 성숙할 과정을 주지 않는가 하며 원망했다. 하지만 다음 1년의 관리초안을 만들고 필요한 사람을 인선할 때 일부 수련생들에게 총협조인이나 혹은 다른 협조업무를 맡겠는지 물었을 때 자발적으로 협조를 맡겠다고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떤 이는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다.”고 했고 어떤 수련생은 너무 피곤하니 쉬고 싶다거나 혹은 구체적인 일만을 하고 싶다고 했다.
나는 시드니에서 협조인을 하기가 아주 어렵다는 것을 안다. 매년 사람을 바꿨다는 것은 또한 불학회 총협조인인 내가 능력 있는 수련생들을 진정하게 조율해 션윈을 잘 협력하거나 법을 실증하고 진상을 알리는 다른 항목을 잘하지 못했다는 것을 설명한다. 나는 수련생들이 협조인을 맡으려 하지 않는 원인을 이해할 수 있는데 다른 수련생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싶지 않고 잘하지 못하면 책임이 더 크기 때문이다. 급여가 없을 뿐만 아니라 아주 많은 경제적인 부담과 심리적인 책임을 질까 두렵고 또 자신의 많은 업무시간, 가정시간과 개인의 시간을 희생하지 않을까 두려운 것이다.
나는 시드니에서 여러분들이 협조인을 하기를 두려워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고 이렇게 많은 능력있는 사람들을 앞에 두고 당신은 왜 이렇게 차하게 했는가 내가 했다면 분명 당신이 한것보다 잘했을 것이다 라는 질의에 대면하기 쉽다. 또 책임을 방치하기는 쉬운데 왜냐하면 당신이 하지 않으면 다른 능력 있는 사람이 책임을 맡을 거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 일을 하는 어려움 중에서 자발적으로 감당하려는 사람이 몇이나 되는가.
하지만 나는 또 깨달았다. 넘어졌다 일어난 후 다시 감당하는 것은 넘어진 후 더는 책임을 지려하지 않는 것에 비하면 얼마나 더 어려운가? 하지만 어려움 그것이 수련이 아닌가? 억울함과 압력에 직면할 때 아무런 원망 없이 책임을 감당할 수 있는가, 대법을 위해 대가를 치를 수 있는가? 만약 이 지역에 다른 수련인이 없고 오직 나만 대법제자라면 나는 여전히 수련할 것인가? 여전히 계속해서 정법과 중생구도의 일을 책임질 것인가?
이 문장을 쓰는 것은 단지 이번 션윈에 대한 반성과 총결로 삼고자 함이다. 발언을 끝내기 전에 다음 문장을 인용해 동수들과 함께 나누고자 한다.
“수련 중에서, 여러분이 다 알다시피 고생을 겪는 것이 아주 어렵지만, 실제로 고생을 겪는 것은 그래도 가장 어려운 것이 아니다. 고생이라, 아무리 고생스러워도, 지나온 다음에는 명백해진다. 그러나 희망이 없는 적막 속에서 묵묵히 수련하며,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면, 그것이 가장 어려운 것이다. 어떤 한 가지 수련이든 모두 이러한 고험을 겪게 되며, 모두 이러한 길에서 걷기 마련이다. 능히 오랜 기간 꾸준히 견지해오면서, 끊임없이 정진하는 그것이 비로소 진짜 정진이다. 이 말은 이렇게 하지만, 하자면 정말로 너무나 어렵다. 때문에 수련을 처음처럼 한다면, 반드시 정과를 얻는다고 말한다.”(《2009년 대뉴욕지역법회 설법》)
사부님 감사합니다!
동수여러분 감사합니다!
(2011년 호주파룬따파 수련교류회 발언고)
(English Translation: http://www.clearwisdom.net/html/articles/2011/6/7/125864p.html)
문장발표 : 2011년 5월 31일
문장분류 : 수련마당
원문위치 :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1/5/31/24162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