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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축5.13] 진귀한 기억, 영원한 見證(상편)

글/ 대륙 대법제자

[밍후이왕]

'一九九三年四月武汉经济广播电台直播现场'
1993년 4월 우한 경제방송국 생방송 현장

머리말

2011년 새해가 올 때, 창문 밖에서 묵은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 천지를 뒤흔드는 폭죽 소리 속에서 나는 신기한 광경을 보게 됐다. 사람을 구도하는 법선이 하늘로 통하는 사다리처럼 곧게 서더니 구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이런 광경과 함께 기이하고 환상적인 음악이 울리면서 하늘의 선녀가 꽃을 뿌렸다. 그 때의 나는 마음 속에 특별한 숭배심을 지니게 됐는데 감각은 매우 순정하고 성스러워 마음속으로부터 ‘푸두(普度)’, ‘지스(濟世)’,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 등 파룬궁 노래가 우러나왔다.

나는 평범한 대법제자지만 대법 창시자인 리훙쯔 선생님이 중국 대륙에서 법을 전하는 장면을 여러 번 목격하는 행운을 지녔다. 매번 행복한 추억 속에 잠길 때면 모두 일부 신기한 광경을 보게 되거나 미묘한 음악을 듣게 되는데 바로 위에서 서술한 것과 같은 것이다. 아래에 나는 추억 중의 사소한 것들을 써내 여러분과 나누고자 한다.

1. 1992년 베이징에서

1992년 나는 한 친구 집에 방문했는데 그들은 내 건강이 좋지 못한 것을 보고 나에게 아주 성의껏 파룬궁을 소개해 주었다. 파룬궁을 수련하려면 심성을 첫 자리에 놓아야 한다는 점이 나를 끌어당겼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나는 그들을 따라 연공을 배우게 됐다. 그 날 저녁 나는 큰 풍차가 획획 돌아가는 것을 보았다. 친구의 딸은 기뻐서 말했다. “본 것은 파룬(法輪)입니다. 정말 연분이 있네요!” 그 날부터 나는 파룬궁 수련을 견지하기 시작했는데 머리부터 발끝까지 아프던 통증들이 곧 자취를 감추었다. 친구는 나를 위해 더 없이 기뻐했다.

그해 9월, 베이징시 기공 협회에서는 2포(제2포병 사령부) 강당에서 파룬궁 제3회 학습반을 열었는데 나는 즉시 신청하고 참가했다.

학습반이 열리기 며칠 전에 듣자니 사부님께서 제자 몇 명을 거느리고 2포 강당 한쪽 홀에서 자문하러 온 환자들에게 몸을 조리해 주신다고 했다. 이 은사님을 얼마나 만나고 싶었던가. 나는 연공한 후부터 약 봉투를 버리게 됐고 진정으로 신체가 가벼워 졌는데 꼭 리 선생님에게 톡톡히 감사 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동행한 수련생과 함께 자문실에 가서 호기심에 가득차 둘러보았다. 내가 리 선생님 손을 보니 손에는 두껍고도 밝으며 새하얀 은빛이 있었는데 한 환자의 머리로 향하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시커멓고 흉측한 물건을 빨아내 창밖으로 던지셨다. 이 환자는 단번에 홀가분해졌고 병도 나았다!

이건 내가 직접 본 것이다! 중공의 무신론 사회에서 전면적인 세뇌를 받은 사람들은 눈앞에서 발생한 이 진실한 광경에 강렬한 충격을 받았을 것이며 그야말로 불가사의하고매우 신기했을 것이다! 한 명, 또 한 명의 병이 모두 신기하게도 즉석에서 나았다. 이 몇 달 동안내 병도 연공을 통해 낫지 않았는가? 이 모두는 사실이다!

막 정신을 차렸을 때 사부님께서 미소를 띠고 걸어오고 계셨다. 사부님은 키가 크고 얼굴이 상냥하셨는데 친절하게 물으셨다. “무엇을 보셨습니까?” 눈앞의 웃음을 머금으신 이 선생님이 바로 내가 톡톡히 감사를 드리려는 은사님이시구나! 나는 흥분되어 얼른 대답했다. “보았습니다. 저는 선생님이 수술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부님은 웃으셨다. 순간, 내 마음 속으로부터 무한한 숭배심이 솟아올랐다. 난 꼭 선생님 따라 공을 잘 배워야지.

학습반이 열렸다. 나는 날마다 다른 수련생과 마찬가지로 2포 강당 문 앞에서 사부님이 오시기를 기다렸다. 사부님은 언제나 미소를 띠고 손을 흔들고 머리를 끄덕이면서 사람들에게 인사를 건네셨다. 수련생들은 아주 예절 있게 자각적으로 길을 내드렸고 날마다 수업이 끝나면 모두들 헤어지기 아쉬운 듯 수련생이 몰고 온 지프차에 오르시는 사부님을 배웅했고 차가 멀리까지 가서야 우리는 강당을 떠나곤 했다.

학습반에서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모두 우리가 여태껏 들어본 적이 없는 이치여서 글자마다 마음속으로 파고들었다. 나는 한마디라도 빠뜨릴세라, 한 글자라도 놓칠세라 날마다 아주 진지하게 강의를 들었다.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한 층의 의미를 말씀해 주신 기억이 난다. 기공이란 바로 수련이다. 우주에는 특성이 있는데, 우주 특성은 ‘진선인(眞善忍)’이다. 이런 특성에 적응되는 사람이면 좋은 사람이고 그를 위배한 사람이면 나쁜 사람이다. 그에 부합되고 그에 동화되는 사람은 득도한 자다. 이러하려면 연공인에게 반드시 극히 높은 심성이 있어야 하고 이 특성에 동화될 것을 요구하게 되며, 이래야만 고층차로 수련할 수 있다. 나는 강당 마당이 비할 바 없이 신성하다는 것을 느끼게 됐고 수련생마다 모두 아주 경건한 마음으로 날마다 정신을 가다듬고 들었으며 잡념이 없이 마음은 매우 순수했다.

하루는 강의를 들을 때 나는 매 수련생이 앉은 의자 등받이에 모두 사부님 반신상이 있는걸 보았다. 나는 이건 아마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법신’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루는 꿈에서 사부님을 보았는데 무척 키가 크셨고 그곳에 앉으셔 인자하게 미소를 띠고 계셨다. 나는 단 가부좌 하고 주변에 앉아서 쳐다보니 사부님이 자신의 부친 같았고나는 사부님의 자식 같았다. 이 분은 내 일생 중의 진정한 선생님이시다! 나는 몹시 흥분됐다. 좋다는 것을 알게 된 이상 그저 100%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일체를 믿을 뿐이다. 나는 알게 됐다. 사람이 세간에 온 것은 수련하기 위해서이지 속인의 생활을 하러 온 것이 아니다. 수련이란 끊임없이 집착심을 버리는 것이며, 덕을 지키고 심성을 닦으며 ‘진선인(眞善忍)’을 수련하는 것이다. 이 선생님은 보통 사람이 아니다. 지금 도덕이 급속히 미끄럼질 치고 있는데 선생님은 인류를 갱신하기 위해서 오신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마지막 날 사부님께서는 수련생 물음에 해답을 해주셨다. 사부님께서는 날마다 강의하실 때 말씀하셨다. “이해되지 않는 것, 모를 것이 있다면 적어 두었다가 지금은 제출하지 말고 마지막 날 제가 전문 여러분에게 해답해 드리겠습니다.” 사부님께서는 참을성 있게 수련생이 제출한 문제에 일일이 해답하셨다.

학습반이 끝나자 수련생들은 사부님과 함께 사진을 찍을 것을 청했다. 사부님께서는 회색 운동복을 입으시고 수련생들 중간에 섰는데 유달리 키가 크셨다. 여러 사람들은 자동적으로 팀을 나누어 몇 사람, 열 몇 사람, 몇 십 명씩 한 번 또 한 번 사부님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이쪽에서 “선생님, 우리와 함께 사진을 찍어주세요”하고 외치는가 하면 잠시 후 또 저 쪽에서 외친다. “선생님, 우리 여기로 오십시오.” 나와 동행한 수련생은 사진기를 메고는 행복의 눈물을 머금고 줄곧 사부님을 따라 이 팀에서 저 팀으로 뛰어다니다 보니 아예 사진 찍는다는 것을 잊어 버렸다. 마지막에는 아직 사진을 찍지 못한 수련생들이 빼곡히 서서 사부님과 단체 사진을 찍었다. 단체 사진을 찍는 과정에 수련생들이 “우리 선생님!”, “우리 선생님!”하고 외치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나중에는 “우리 여러분의 선생님!”하고 전체 수련생들의 마음 속으로부터 공동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사진은 아주 오랫동안 찍었다. 수련생들은 앞다투어 가며 사부님께 서명을 요청했다. 사부님은 내내 미소를 머금고 그곳에 서서 참을성 있게 하나하나 서명을 해주셨다.

2. 1993년 우한에서

1993년 나는 또 사부님께서 꾸린 우한(武漢) 학습반에 참가할 행운을 지니게 됐다. 개학하기 전 기공협회와 학습반을 여는 구체 사항을 협의할 때 사부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학습반은 매 한 사람에게서 40위안만 받고 노 수련생에게서는 20위안만 받는다. 보고회는 개인 당 2위안만 받고 보고회 입장권 수입은 강당 임대료만 되면 된다. 세인 구도만을 위해야지 돈벌이만 고려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기공협회 주임은 자기들은 돈을 벌려 하므로 학습반 입장권을 50위안으로 올릴 것을 요구하면서 다른 기공 보고회는 개인당 최저 10위안이었다고 했다. 나중에 학습반 수입의 60%를 기공협회에서 갖고 파룬궁은 40%를 갖기로 협의를 보았다. 그런데 이 40%는 임대료, 선전비, 자료비, 교통비, 식비를 제하면전혀 남는 것이 없었다. 기공협회 직원은 답답해했다. 그는 우한에서 꾸린 모든 기공 문파 중에서 파룬궁의 비용이 가장 낮았는데 돈을 벌 수 있는데도 싫다고 하니 이는 정말로 보기 드믄 일이라고 말했다.

그 당시 학습반에는 또 신문사, 방송국 등 언론사 기자들이 와서 강의를 들었다. 그들은 당시 열정적으로 파룬궁 및 그 창시자를 소개하면서 이 공법은 여태껏 들어본 적 없는 일종 특수한 ’기공’으로서 이 고덕대법은 진정으로 사람을 높은 층차로 이끌 수 있다고 했다.

1993년 3월 15일, 우창중촨(武昌中船)회사 제701연구소 강당에서 학습반이 열렸다. 한 소대장은 기공 애호가인데 그는 한 개 소대 병사들을 거느리고 와서 사부님 보고를 들었다. 그들은 만족한 내용을 듣게 되면 흥분해서 박수를 쳤는데 지금도 생각하면 유달리 우렁찼던 그 박수 소리가 귓가에서 메아리치는 것 같다.

40대의 한 남자 수련생은 조상을 따라 어려서부터 무술기공을 연마했다. 그가 말했다. “이 사부님은 정말 대단하신 분이다. 이분이 강의를 하면 이분께서 내보낸 공은 온 강당을 뒤덮는데 금빛이 번쩍인다. 아울러 강당 지붕을 꿰뚫는 외에도 그 ‘강도 졸개’들을 멀리 물러나게 했다.” 그가 말한 ‘강도졸개’는 대개 좋지 못한 그런 저급적인 영체일 것이다.

하루는 40대의 키가 작고 마른 남자가 입장권이 없어서 직원에게 제지당하자 마구 떠들어 댔다. “난 말이야 그와(사부님을 가리킴) 법술 싸움을 하려 왔어. 우리 사부님은 백세도 넘었는데 그는 너무 젊단 말이야.” 그리고는 아주 듣기 나쁜 말들을 많이 했다. 사부님께서 아시고 직원에게 그를 들어오게 했다. 그는 사부님 강의를 듣고 나더니 조용해 졌다. 그는 강의가 끝난 후 일부러 직원을 찾아와 부끄러워하면서 말했다. “전 다시는 떠들지 않겠습니다. 이 분이야 말로 진정한 사부님이십니다.”

1993년 3월 25일 오후 2시, 사부님께서는 한구(漢口)시 정부 강당에서 약 2시간 동안 제2회 설법 보고회를 가졌다.

학습반에 참가한 언론사 기자들의 감각은 범상치 않았으며 결국 신문, 방송국에 다 보도됐다. 어떤 사람은 전화를 통해 자문했는데도 병이 나았다. 그들은 사부님이 고난에서 자신을 구해주는 산 보살이라 여겼고 그 때의 격동을 말로는 표현할 수 없어 했다. 방송국에서 알려주는 주소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비를 무릅쓰고 시 정부 강당에 와서 보고회에 참석했다. 하늘에선 비가 억수로 퍼부었지만 강당은 여전히 빈 자리 하나 없었다.

보고회가 곧 시작되는데 밖에서는 여전히 비가 억수로 쏟아졌고 앞 대청에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서 있었다. 그들은 가려 하지 않고 입석표를 늘려 들어갈 수 있기를 요구했다. 주최측인 우한시 기공협회는 또 수많은 입석표를 늘렸는데 즉시 다 팔렸다. 그랬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비를 무릅쓰고 와서 입장권을 팔 것을 요구했으며, 어떤 사람은 심지여 암표상의 표를 사서라도 들어가려 했다.

시 기공협회 책임자의 간단한 연설 후, 한 할머니가 강단에 올라갔다. 그녀는 먼저 강단에서 세 바퀴를 뛴 후 자신 소개를 했다. 그녀는 일찍 지역사회 간부였고 마비되어 침대에 누운지 3년이 되어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었다. 어제 방송국에서 한 생중계 방송을 듣고 사부님의 구령 요구대로 했더니 즉각 신기한 효과를 본 것이다. 전 장내 청중들은 그녀가 강단에서 가볍게 뛰어다니는 모습을 보고 그녀가 마비된 지 3년된 환자였다는 것을 전혀 믿을 수 없었다. 이와 비슷한 경험이 있었던 사람은 모두 몹시 감격했고 그들은 사부님은 대자대비 하시고 범상치 않은 사람이라고 여겼다. 그리하여 방송국에서 알려주는 주소에 따라 비를 무릅쓰고 시 정부 강당에 와서 보고회에 참가했던 것이다. 그들처럼 이렇게 명성을 흠모해 찾아온 사람이 적지 않았다.

공을 지닌 보고회(帶功報告)에서 사부님께서는 수련생들에게 파룬을 넣어 주시면서 여러 사람에게 손바닥을 위로 향하고 팔을 펴라고 하셨다. 누군가 흥분되어 외쳤다. “난 보여요, 보여요! 채색 파룬이 손바닥에서 돌고 있어요.” 어떤 사람은 공 같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손바닥이 뜨겁다고 했으며, 또 어떤 사람은 손바닥이 저리다고 했고, 또 어떤 사람은 파룬이 온 강당 안에 가득 찼고 파룬이 수련생의 손, 배, 머리 등 어디라고 할 것 없이 내려앉는다고 했다. 온 강당은 온통 감탄의 소리뿐이었으며 대법의 신기함을 목격하지 않은 사람이라곤 없었다.

보고회 분위기는 몹시 상서로워 사람들은 전부 거대한 에너지 마당에 녹아들어간 듯 했으며, 모든 좋지 못한 것들이 제거됐고 어떠한 나쁜 염두도 없었다. 보고를 다 듣고 난 수많은 사람들에게는 오직 하나의 염두만 있었는데, 사부님 설법을 다시 한 번 더 들었으면 하는 것이었다. 만약 이렇게 좋은 법을 놓쳐 버린다면 그건 한 평생의 유감이 될 것 같았다.

보고회는 원만히 끝났고 사부님께서는 후베이(湖北)성 무당산(武當山)으로 가셨다. 우리는 차를 따라 우한에서 샹판(襄樊)으로 뻗은 고속도로에 올라 무당산을 향해 출발해 점심 때 무당산 명승지에 도착했다. 한 수련생이 거대한 패방(牌坊-아치 모양의 건축물)이 ‘쏴’하고 공중에서 내려와 눈앞에 나타나는 것을 보고 사부님께 여쭈었다. “사부님, 전 몹시 큰 패방을 보았는데요, 우리는 지금 바로 패방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그건 산문(山門)입니다.” 수련생이 또 말했다. “패방 양쪽에 고대 옷차림을 한 수많은 무사들이 섰는데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20미터 정도입니다. 그들은 몸에 갑옷을 입었고 머리에는 신기한 관을 썼으며 관 주변엔 수많은 뾰족한 뿔이 났고 뿔의 뾰죽한 모서리마다 매화가 한 송이씩 있습니다. 왼손은 고대 병기를 잡았고 오른손은 아래로 드리웠는데 손바닥이 뒤로 향하고 다섯 손가락은 벌려 졌으며 매 손가락 끝에도 매화 한 송이가 있습니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그건 산신입니다.” ’패방’에 들어선 후 천목이 열린 몇 수련생이 보니 온 산에는 숫한 절이 있고 또 바윗돌 위에는 사람이 서 있었는데 어떤 곳은 한 사람이 서 있고 어떤 곳은 두 사람, 어떤 곳에는 많이 서 있기도 했다. 어떤 사람은 흰 옷을, 어떤 사람은 회색 옷을 입었는데 죄다 고대 옷이었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그건 모두 옛날의 수도인들입니다,”

차는 그냥 앞으로 가는데 굉장한 장관이 눈 앞에 펼쳐졌다. 한 방대한 방진(方陣)은 하나하나의 작은 방진으로 구성됐고, 이 작은 방진은 모두 금색 갑옷을 입고 줄을 선 금색의 사람으로 구성됐는데 마치 열병식 때의 전투 대형 같았다. 한 거대한 금색 사람이 큰 방진의 맨 앞에 섰고 모든 금색 사람은 똑같은 모양의 손 자세를 하고 있었는데, 왼손은 배 앞에 놓고 손바닥은 위로 향했으며, 오른손은 절반 추켜들었는데 손바닥이 왼쪽을 향했고 연화장을 했다. 온 얼굴에 경건한 표정을 띠였는데 장면은 비할 바 없이 성스러웠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손 자세는 환영한다는 뜻입니다.” 온 방진은 끝없이 크고 한없이 멀었는데 아무리 멀고 멀고 또 멀더라도 보이는 것은 마찬가지로 똑똑했다. 아, 그야말로 너무도 미묘하고 성스러우며 장려했다!

이 신전 북쪽에는 한 산 봉우리가 있었는데 듣는 말이 의하면 천하에 이름을 날린 한 세대의 종사 장삼풍(張三豊)이 수련하던 고장이라고 한다. 수련생 몇이 천목으로 보니 다른 곳에 산봉우리가 있는데 그곳에서 장삼풍이 수련하는 그림자가 보였다.

돌아오는 길에 차가 막혔다. 어수선하게 널려 있는 차량들이 길을 빼곡하니 메우고 있어 웬만해서는 풀릴 것 같지 않았다. 관례에 따르면 몇 시간이 걸려도 길이 통하기 어려웠다. 조급했다. 우리는 우한으로 돌아가 제2회 학습반을 열어야 한다! 사부님께서 차에서 내리시더니 직접 교통을 지휘하기 시작하셨다. “이쪽으로 가십시오, 가시오, 가시오!” “저쪽으로 가십시오, 가십시오, 빨리 가십시오!” 얼마 안 되어 길이 열렸다. 하, 사부님은 해결하지 못하는 일이 없으셨다.

3월 29일 예정대로 학습반이 열렸다. 어떤 사람은 후베이성 내 기타 지역에서 왔고 또 다른 성에서도 왔다가 우한 출장길에 만나게 된 사람도 있었다. 매번 수업에 사부님께서는 언제나 앞당겨 오셔서 수련생들이 입장하는 것을 보시고 있었다. 사부님께서 강단에 오르시기만 하면 전체 수련생들은 모두 일어나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우레와 같은 열렬한 박수로 경애하는 사부님을 환영했다. 사부님께서는 언제나 미소를 띄고 여러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하셨다. 수련생들도 모두 눈도 깜빡하지 않고 사부님을 바라보았다. 사부님께서는 매 번 몇 번이나 손을 저어 감사를 표시해서야 박수 소리는 겨우 멈추었다. 수련생들이 자리에 앉자 사부님께서는 강의를 시작하셨다. 사부님은 설법하실 때 원고가 없이 단지 종이 한 장만 놓고 하셨는데 그 위에는 다른 사람이 보아도 알 수 없는 몇 줄의 글과 각종 표기 기호들이 있었다. 강의하실 때 장내는 쥐죽은 듯 조용했으며 수련생들은 귀담아 듣고 있었고 장내에는 다만 사부님의 우렁찬 목소리만 울리고 있을 뿐이었다.

강의를 듣는 과정에 많은 수련생들은 사부님 배후에 채색 빛이 비치고 있는 것을 보았다. 누군가 말했다. “강단에 숫한 사부님이 계신다.” 천목이 열린 한 수련생은 강단이 대문이 두 개 달린 건물로 변했고 좌우에는 각기 고대 옷을 입은 장수 네 사람이 서 있는데 사부님이 안에서 설법하고 계시는 것을 보았다.(그 때 그는 이 장수가 무슨 사람인지 알지 못했는데, 이후에 수련생에게서 듣고 이는 바로 8대 금강임을 알게 됐다.) 수업이 끝난 후 나는 사부님께 여쭈었다. “사부님, 저는 이 강당 무대가 배 한 척으로 됐고 배 주위에는 파도가 넘실거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부님께서는 배에서 장엄하게 설법하시고 계셨습니다. 저는 정경 중의 사부님께서 ‘나는 이렇게 훌륭한 법리를 당신들에게 두 손으로 무조건적으로 받쳐 드렸고, 당신들을 이끌어 주며, 아직도 더 한 동안 당신들을 이끌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맞습니다! 맞습니다! 내가 바로 사람을 구도하고 있습니다!”

10일 동안의 수업에서 날마다 연공을 가르치셨는데 강단에는 시범을 보여주는 수련생이 있었고, 사부님은 온 얼굴에 웃음을 띠고 자상한 모습으로 몸소 수련생 속으로 오셔서 동작을 교정해 주셨다. 마지막 하루는 질문에 해답해주셨는데 사부님께서는 언제나 수고스러움을 마다하지 않으시고 해답해주셔서 수련생들에게 법리를 알려주셨다.

강의 과정에 우리는 사부님께서 물 한 모금 마시는 것을 보지 못했다. 휴식할 때면 사부님께서는 수련생들에게 휴식하라고 하셨지만 자신은 휴식하지 않으셨다. 박대한 흉금, 이타적인 품덕, 비범한 기질은 사람들에게 사부님을 경모하게 했고 영원히 잊을 수 없게 만들었다.

다른 공법을 연마한 어떤 사람이 파룬궁 보도원에게 말했다. “어떠한 사람이든 우한에 와 공을 전한다고 하며 걸어놓은 현수막은 내가 공을 발하기만 하면 모두 떨어졌다. 파룬궁 현수막은 내가 연속 10일 동안 공을 발해도 추호의 움직임도 없었다. 리 선생님의 공은 진정으로 높은 것이다.” 그는 또 말했다. “내가 공원에서 기타 기공을 연마하는 사람을 보면 어떤 사람은 기다란 꼬리를 끼고 있었고, 어떤 사람은 반쪽 얼굴은 검고 반쪽 얼굴은 붉었다. 그러나 파룬궁 연공장에는 금빛 찬란한 씌우개가 있고 그 위에는 리 사부님이 서서 장을 보살피고 계셨다.”

한 번은 사부님께서 강단 아래서 잠깐 쉬고 있는데 한 여성 수련생이 자신의 격동된 심정을 억제할 수 없어 강단에 올라가 말하는 것이었다. 원래 그녀는 요추간판 돌출증으로 걸을 수 없게 됐고 도처에 가서 치료했으나 효과가 없었다. 그런데 파룬궁을 수련한지 며칠이 안 되어 기적같이 나았다. 그녀가 특히 강조하는 것이란 그녀 감각이 바로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당신은 온 몸이 가볍고 길을 가도 바람이 일듯하다.”(『전법륜』)는 것이다. 모두들 이로부터 사부님과 대법의 무량한 위덕을 더더욱 느꼈다.

여러 수련생이 몇 회 학습반에 참가하는 행운을 갖게 됐다. 그들은 이미 대법이 자신 및 가족에게 가져다 준 좋은 점과 행복을 감수했던 까닭에 모두 몹시 사부님께 감격하고 있었다. 그래서 마지막 시간이 끝나기 전에 그들은 사부님과 함께 한끼 식사를 할 수 있기를 몹시 바라고 있었는데 생각 밖에 사부님의 거절을 당했다. 그들은 몹시 괴로웠다.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 너무도 많으신데 어찌 밥 한 술도 드시려 하지 않는단 말인가? 참으로 순정하시다! 별 수 없어 좋은 차나 사서 시간 나시는 대로 차를 드시라고 해도 그것마저 거절하셨다. 강의를 듣는 동안 그들은 사부님께서 몇 시간 강의를 하셔도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았고 열 시간 강의가 끝났지만 한 병의 물이 여전히 그대로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들은 모두 사부님께서 일심으로 중생을 위해 고생하시면서도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정신에 감동해 눈물을 흘렸다.

제2회 학습반을 마치고 1993년 4월 8일, 우한시 기공협회는 사부님께 사례하기 위해 특별히 사부님을 청해 목란산(木蘭山)을 유람하시게 했다. 차가 황퍼현(黃陂縣)에서 십여리 더 가자 목란산이 보였다. 멀리서 바라보니 목란산은 산세가 높고 가파로웠으며, 송백이 짙푸르고 구름이 산허리를 감돌고 있는데 절들이 숲을 이루고 있었다. 목란산에 막 이르자 천상에서 많은 선녀들이 날고 있는 것이 보였는데 선녀들은 울긋불긋한 치마를 입고 색상이 매우 아름다운 수정 같은 띠를 나붓기고 있었다. 사람의 이 공간에서는 볼 수 없는 그런 색상이었는데 그녀들은 돈황(敦煌)벽화 중의 비천(飛天) 같았다. 이와 동시에 또 수많은 키 큰 무사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천백 년 동안 모두 이곳을 지키고 있는 것이 마치 목란산의 수호신 같았다.

금정방(金頂旁)의 절벽 위에 서서 아래를 굽어보니 논두렁길이 가로세로로 나고, 농가들이 널려 있는 사이로 목란 호수가 햇빛아래 조용히 누워서 눈부신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사부님께서는 먼 곳을 응시하시면서 우뚝 서서 오른 발을 앞으로 궁형으로 내 디디시고, 오른손을 위로 뻗히면서 하늘을 가리키셨다. 같이 간 인원들은 모두 사부님의 위풍당당한 비할바 없는 기세에 감동해 즉시 사진을 찍어 영원한 기념을 남겼다.

2. 1993년 4월 광저우에서

1993년 4월 13일~22일까지 파룬궁 광저우(廣州) 제1회 학습반이 광저우시 고무공장 강당에서 거행됐다. 그 때는 40여명 수련생만 참가했을 뿐이다. 주최단위는 광저우 보림(寶林)기공 학교였다. 공법을 가르칠 때 사부님께서 몸소 구령을 부르셨고 두 명 수련생이 시범동작을 하면서 가르쳤다.

사부님께서는 고무공장 초대소에 숙박하셨는데 그 곳은 아주 초라했다. 식사는 초대소 식당에서 했고 극히 간단했다. 어느 저녁 식사 때, 수련생 갑이 밥 한 공기와 기름끼라곤 없는, 뿌리조차 자르지 않은 배추 몇 포기로 된 반찬을 들고 왔으나 정말로 먹을 수 없었다. 광저우 군대에 있는 동창이 이런 형편을 보고 이상하다듯말했다. “왜 이런걸 먹어?” 수련생 갑이 사부님 쪽을 바라보았을 때, 사부님께서는 똑같은 밥과 반찬을 다 드시고는 웃음 띤 얼굴로 강의하러 가실 준비를 하셨다. 졸지에 수련생은 가슴 속으로 그야말로 무어라 말할 수 없는 기분을 느꼈다.

한 번은 한창 식사를 하고 있는데 사부님의 “왔습니다” 하는 목소리가 들리더니 수련생 을의 사발에 하포단(荷包蛋-껍질을 벗긴 후 끓는 기름에 굴려 익힌 달걀.) 한 알을 놓으시는 것이었다. 을 수련생이 머리를 들고 보니 모두들 하포단을 받지 않으려고 자기 사발을 손으로 가리고 있었고, 어느 두 수련생은 사발을 들고 도망쳤다. 원래 이 달걀은 수련생 병이 사부님께서 강의하시느라 몹시 고생하시는 것을 보고 일부러 사부님께 사 드렸던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인자하게 웃으시면서 말씀하셨다. “드십시오, 모두들 몹시 수고하시는데 드십시오.” 사부님 마음 속에는 늘 타인에 대한 염려뿐이었다.

하루는 수업이 끝나자 사부님께서 신변 사업인원에게 말씀하셨다. “갑시다. 오늘 우리 식당에 갑시다.” 사부님께서는 다섯 사람을 거느리고 광저우 거리에 나가서 소아면(燒鵝面-구운 거위 고기로 만든 칼국수)을 드셨다. 우리가 아니라면 사부님께서는 밖에 나가 식사를 하지 않고 늘 라면만 드셨을 것이다.

학습반을 꾸린 기간, 사부님께서는 제자를 거느리시고 육용고찰(六榕古刹-육용사)을 유람하셨다. 육용고찰은 남조 양(梁)나라 대동(大同) 3년(기원537년)에 건설한 것으로서 당시 광저우 자사(刺史)가 예장불골[瘞藏佛骨-양무제(梁武帝) 모친의 외삼촌이 해외에서 데려온 사람]을 위해 세운 것이다. 보탑은 정원 중앙에 세웠는데 대웅보전(大雄寶殿)의 바로 앞 쪽이었다. 한 그루의 무성한 보리수 앞에 이르러 머리를 들고 바라보니 이 나무는 사람에게 특별한 감각을 주었다.

절 문을 나설 때 승려 한 사람을 만났는데 펄럭이는 승복을 입고 있었고 쇠사슬이 달린 금테 안경을 걸었으며 산악자전거를 타고서 절로 들어가고 있었다. 모두들 “와, 지금의 출가인은 이런 모양을 했네!”하고 말했다.

광저우반은 끝났고 파룬궁은 광저우에 뿌리를 내렸다. 보림 기공학교 책임자는 무척 기뻐하면서 사부님께서 광저우에 꼭 다시 방문하실 것을 거급 요청했다.

4. 1993년 8월 구이저우에서

1993년 8월 15일부터 8월 21일까지 구이저우(貴州)성 기공협회 초청으로 사부님께서는 또 다시 구이양(貴陽)에 오셔서 학습반을 여셨다. 나는 또 이 학습반에 참가할 행운을 지니게 됐다. 우리가 그 때 투숙한 곳은 보통 여관이었고 날마다 엄청 많은 자료를 지고 강의하는 곳으로 갔다.

이번에는 사부님의 딸 메이거(美歌)도 왔다. 메이거는 날마다 커다란 채색 배낭에 자료를 짊어졌다. 모두들 나이가 어리니 무거운 자료를 지지 말라고 하면 그녀는 도리어 “질거예요. 내가 지겠어요”라고 하면서 배낭끈을 단단히 조였다. 수료증을 만들 때 메이거는 여러 사람과 함께 밤을 새며 도장을 찍었다.

학습반을 꾸린 기간 사부님께서는 어느 날 아침 또 첸링(黔靈)공원 연공장에 가셨는데 구이저우 보도소장이 수련생들의 연공 상황을 사부님께 소개했다.

구이저우 학습반 기간, 구이저우 보도소장이 그 산의 뱀이 사람모양으로 수련된 일을 말해 주었는데 그 뱀은 이미 326살이라고 했다. 사부님이 법을 전하시는데 그는 적극 교란했고 이후에 잘못을 알고는 도제를 파견해 보도소장을 산굴로 청해다 소장에게 자기가 후회한다고 사부님께 전해 달라고 했다.

구이저우 학습반이 종결됐다. 떠나기 전에 사부님께서 사업인원의 방으로 오셔서 짐들을 다 잘 꾸렸나, 짐이 무겁지 않나 살펴보시고는 우리에게 평소에 손가는 대로 짐을 잘놓는 습관을 키워야 한다고 알려주시면서 몸소 우리에게 짐을 정리하는 것을 가르쳐 주셨다.

5. 1993년 11월, 1994년 4월 안후이에서

파룬따파가 전해진 것은 범상치 않은 일이다. 안후이(安徽)에서도 ‘파룬따파는 좋다(法輪大法好)’는 것을 알게 되자 1993년 11월 19일 허페이(合肥)시에서 제1회 파룬궁 학습반을 열었는데 주최단위는 안후이 기공협회였다.

11월 19일, 허페이의 기온이 떨어지면서 우박을 동반한 큰 눈이 갑자기 내렸는데 온 하루 밤낮을 내렸다. 22일은 햇빛이 찬란하고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씨여서 쌓였던 눈이 흔적 없이 사라졌다. 사부님께서는 안후이성 농업대학 강당에서 파룬궁 허페이 제1회 학습반을 거행하셨다. 학습반에 참가한 수련생은 허페이시에서 260명 좌우이고, 외지에서 ‘학습반을 따라 다니는’ 수련생이 적지 않았으며, 또 성, 시급 고위간부들이 참가한 것까지 포함하면 약 510명 좌우가 됐다.

1993년 12월 2일, 사부님께서는 구화산(九華山)에 가셨다. 구화산은 지장보살(地藏菩薩)의 도장으로서 세 고승의 육신이 수백 년 되도록 부식되지 않고 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향불이 피움이 천하의 으뜸(香火甲天下)’, ’동남 제1산’으로 호칭되고 있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구화산의 세 승려의 신체가 몇 백 년이 되고 천 년이 되어도 썩지 않는 것은 그의 신체가 이미 완전히 고에너지 물질로 대체됐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미 속인의 신체가 아니므로 썩지 않습니다.”

산을 오르자니 몹시 힘들었다. 하지만 오를수록 심정은 더 상쾌했다. 신변으로는 구름이 날아가고 있었는데 이미 천상에 오른 것 같았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지금 이미 3층천에 올랐습니다.” 갑자기 주위에 여러 개의 금빛 눈부신 동그라미들이 나타났다. 그야말로 산 밖에 산이 있고, 하늘 밖에 하늘이 있다더니 마치 신화세계에 온 것 같았다.

계속 걸으니 목이 말랐다. 어느 수련생이 과일 통조림 두 통을 사서(산에는 다른 것이 없었다) 사부님께 드렸다. 사부님은 통조림을 들고서 말씀하셨다. “나도 컬컬한데 여러분도 모두 컬컬하지 않습니까? 오세요, 나누어 먹읍시다.” 사부님은 언제나 제자를 생각하신다. 사부님 신변에서 이런 일을 늘 만나게 된다.

제1회 학습반을 끝마칠 무렵 한 수련생이 사부님께서 언제면 다시 허페이로 오시겠느냐고 물었더니 사부님께서는 미소를 머금고 말씀하셨다. “허페이라, 장래 다시 올 수 있을 것입니다.” 현지 기공협회에서 다시 열정적으로 초청하니 사부님께서는 그 자리에서 다음해 4월 15일에 허페이에 와서 제2회 학습반을 꾸리겠다고 하시면서 그 때 가면 1500명이 참가할 것이라고 하셨다.

과연 그랬다. 1994년 4월 15일부터 24일까지, 안후이성 당교강당에서 사부님께서는 제2회 학습반을 꾸리셨는데 약 천오백 명이 참가했고 주최단위는 안후이성 기공과학연구회였다. 그리고 또 많은 외지 수련생들이 소문을 듣고 왔다.

첫 날 강의를 듣고 수련생들은 유달리 격동되어 장내에는 자주 박수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람들은 늘 일어나 박수를 쳤으며 이것도 부족해 손을 머리 위에 추켜들고 박수를 쳤다. 사부님께서 수련생을 이끌고 끊임없이 위로 층차를 승화해 주고 계신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사부님은 말씀하셨다. “이번 학습반은 설법을 시작했습니다. 더는 기공의 형식으로 말하지 않겠습니다.” 사부님께서 내보낸 공은 특별히 강해서 몸이 민감하지 못한 수련생이라 해도 모두 한 갈래 몹시 강한, 무형의 힘이 사람을 밀어주어 의자 등받이에 기대게 했고, 특히 조용히 정신을 가다듬고 들을 때면 몸을 움직이려 해도 감각이 없음을 느낄 수 있었다.

학습반 기간, 한 30대 농촌 수련생은 곱사등이었는데 사업인원들과 한담하기를 즐겼다. 그는 기쁨에 넘쳐 우리 앞까지 달려와 껑충껑충 뛰면서 180도로 돌고는 등을 우리에게 돌리고 말했다. “보세요!보세요!” 우리도 그가 평소보다는 다르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가 또 말했다. “만져보세요! 내 등을 만져 보세요.” 만져보고 깜짝 놀랐다! 등이 펴진 것이다! 그는 두 눈에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저녁에 자고 있는데 꿈에 등에서 툭툭툭 소리가 났어요. 깨어나서도 별로 주의하지 않았지요. 아침에 세수할 때 여동생이 놀라서 말했어요, ‘오빠, 오빠 등이 왜 펴졌어요!’”(그의 여동생도 학습반에 참가했다.)

사부님께서는 법을 전한 이래, 옷차림이 아주 소박해 늘 짙은 남색 양복을 입으셨고 와이셔츠는 하얗게 빨아 입으셨다. 깃과 소매는 닳아서 보풀이 일었다. 그래서 사부님 체구에 따라 한 수련생이 양복 한 벌을 지어 드리면서 사부님에게 반드시 입으셔야 한다고 했다. 아울러 사부님께 사진 한 장을 찍어 드렸는데 후에 이 사진이 ‘전법륜’ 안의 ‘저자 근영’이 됐다.

하루는 허페이 학습반의 사업인원으로 있었던 사람이 그날 사부님과 함께 저녁식사를 하게 되어 기뻐서 어쩔 줄 몰라했다! 몇 명의 외지 수련생은 먼저 자신의 몸이 먼지투성이어서 얼른 목욕을 하고 깨끗한 옷을 갈아입은 다음 사부님을 모시고 식사를 해야겠다고 아이처럼 좋아했다. 그런데 그만 세수 수건을 갖고 가지 않아 나는 듯 층계를 달려 내려가 수건을 사 가지고는 또 나는 듯 층계로 뛰어올라 오다가 사부님과 마주쳤다. 기쁘기도 하고 놀랍기도 한 그의 온 몸에는 행복의 난류가 흘러 펴졌다.

몇 명 사업인원이 밥상에 둘러 앉아 사부님을 기다리면서 속으로 아주 훌륭한 밥과 반찬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밥상 중간에는 큰 사발에 국이 담겨 있었고 누구나 똑같이 야채 한 접시에 쌀밥 한 사발이 놓여졌다. 수련생들은 깜짝 놀라 말했다. “이걸 먹어요?” 눈물이 나올 뻔 했다. 한 수련생은 사부님 정면에 앉아서 머리를 숙이고 밥만 먹다가 눈을 약간 쳐들었더니 사부님께서 마침 껍질이 벗겨지지 않은 쌀알 한 알을 손으로 집어 들고 껍질을 벗긴 후 드시는 것이 눈에 띄었다. 이 수련생은 큰 감동을 받았다. 우리 사부님은 그렇듯 매 한 알의 양식을 아끼시는구나. 사부님께서는 길을 잃은 중생을 일깨워 주시고, 미끄럼질 치는 인류 도덕을 바로 잡고, 우주를 바로 잡으며, 중생을 구도하기 위해 갖은 고생과 위험을 다 겪으면서도 드시는 것은 너무도 소박하다. 하지만 중생에게 주시는 것은 오히려 가장 가장 진귀한 것이었다. (다음에 계속)

문장발표: 2011년 5월 13일
문장분류: 수련마당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1/5/13/24053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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