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대륙 대법제자
[밍후이왕] 파룬따파(法輪大法)를 수련한 십여 년 동안, 많은 일들이 기억에서 사라졌지만 도리어 여러 해 동안 창춘 대법제자와의 사이에 있었던 한 차례의 교류는 지금까지도 잊혀지지 않고 있다. 그 당시 우리 스자좡(石家庄) 대법 수련생의 정체적 제고에 아주 큰 촉진 작용을 얻었다.
당시는 1995년이었다. 파룬따파는 중국 대륙에서 급속히 발전하여 신 수련생이 빠르게 증가하였지만, 스자좡 지역의 수련상태는 여전히 초급적인 단계였다. 무엇이 대법수련인지 인식 상에서 아주 모호하였고, 참답게 법공부를 하는 환경도 만들어 지지 않았다. 일찍이 사부님께서 연구회 책임자에게 전화기록(원 말씀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음)을 전달했던 기억이 나는데 대략적인 뜻은 “스자좡은 다른 지역보다 차이가 크므로 법 공부를 많이 하여 참답게 수련하는데 공력을 들여야 한다.”는 말씀이었다.
스자좡의 동료 수련생들은 사부님 가르침을 듣고 아주 큰 진동을 받았고, 몹시 조급한 마음이 일기도 했다. 모두 모여 어떻게 하면 빨리 제고할 수 있는지에 대해 상의를 했는데, 설 연휴 기간을 이용해 여러 수련생들과 함께 창춘을 방문해 앞서 가고 있는 창춘 수련생들을 따라 배우고 함께 교류를 진행하자는 의견이 결정되었다. 베이징 연구회도 스자좡 총 보도소의 의견에 동의하고 우리가 창춘을 방문하는 것을 지지했다.
사부님께서는 창춘 수련생에게 “그들이 집과 사업을 버리고 온 것은 경을 얻으러 온 것이다(대략, 원 말씀 아님).”라고 하셨다. 이리하여 스자좡 총 보도소 일행 17명은 설전에 창춘으로 향하는 열차에 올랐다.
이에 대해 창춘 총보도소는 자연히 이 교류를 아주 중시하게 되었다. 시 구역과 주변의 모든 보도원을 하나도 빠짐없이 연락해 교류에 참가시키고 그들이 수련 중에서의 좋은 경험, 잘못한 교훈 들을 모두 어떤 거리낌도 없이 모두 꺼내 놓을 것을 바랐다. 사람을 감동시키는 수많은 사례들을 우리는 일일이 모두 기록하였다.
1. 접대 과정에 대법제자의 풍모를 나타내다
창춘 수련생들과 교류가 시작되면서부터 두 지역의 수련상의 차이를 느낄 수 있었다. 일마다 모두 법에서 문제를 고려하는 것은 우리에게 큰 인상을 남겨 주었다. 그들의 응대는 아주 주도면밀하여 우리로 하여금 따스하고, 친절함을 느끼게 하여 큰 감동을 받았다.
설 연휴 기간이라 창춘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음력 28일이라 누구나 설 준비에 바빴다. 그러나 창춘 수련생들은 뼈를 이는 듯 한 찬 바람 속에서 알림판을 들고 역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여관과 식당이 모두 문들 닫았지만 창춘 총보도소에서는 사전에 한 초대소를 예약해 우리의 숙소를 마련해 주었다. 초대소 직원들이 모두 설을 쇠러 집으로 가는 바람에 창춘시 수련생 4-5명은 가족과 단란히 모여 설을 쇠는 것도 포기하고 우리를 위해 식사를 마련해주었다.
그믐날 저녁 우리 17명은 한 보도소 부소장의 집에서 밤중에 물만두를 먹었다. 물만두는 모두 창춘 대법제자들이 자기 집에서 보내온 것이었다. 부소장은 우리에게 사부님께서 집에 오셨을 때 앉으셨던 소파를 소개하기도 했다.
대법제자는 부동한 지역에서, 머나먼 곳에서 왔어도 똑 같은 한 부의 법을 수련하기 때문에 마음이 서로 통하고 혈육이 아니지만 혈육보다 더 친하다. 더욱이 파룬따파가 잔혹한 박해를 당한 후, 우리는 12년 간 비바람 속에서 함께 오늘까지 걸어오게 되었다. 당시의 정경을 회억하면 더 진귀한 감을 느끼게 되고, 사람으로 하여금 감동의 눈물을 흘리게 한다.
설인데도 이렇게 많은 창춘 수련생들이 집에 가서 가족과 함께 설을 쇠지 못하고 우리를 위해 바쁘게 뛰어다니는 것을 보고 참으로 민망스러웠다. 하지만 창춘의 한 여 수련생은 “당신들은 이렇게 먼 곳에서 사부님 고향에 왔으니 모두 사부님의 손님이기도 함으로 우리가 당신들을 접대하는 것은 마땅한 것이다. 한 부의 법을 함께 수련하고 있으니 우리는 모두 혈육이다.”라고 했다.
수련생의 이 한 마디 말은 우리 스자좡 수련생들로 하여금 단번에 수련 상에서의 차이를 나타내게 했다. 우리는 사람마음으로 대했지만 창춘 수련생은 법에서 문제를 보았던 것이다. 스자좡의 어느 수련생은 창춘에 간 김에 고향 집에 들를 볼 생각을 했었는데 창춘 수련생의 이 말은 이 수련생을 일깨워 주었고 그에게 큰 인상을 남겨 놓았다.
2. 창춘의 단체 법공부와 연공에 참가한 감수
당시 창춘은 이미 법공부 열조가 일어난 때라 법읽기, 법 암송이 보편적이었다. 또한 많은 수련생들이 법을 베꼈는데 글을 모르는 수련생도 책을 베꼈다. 한 글자 한 획씩 썼고, 쓸수록 단정히 썼고 쓸수록 보기 좋게 썼다.
창춘에서 열린 서예, 그림 전시회 중에 바로 일부 수련생이 쓴 대법 책이 있었다. 바로 사부님께서 설법 중에 말씀하신 것처럼 단체 법공부 할 때 여러 사람은 보통 책을 들고 보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이 한 단락씩 순서대로 외웠다.
우리 일행은 길림대학과 승리공원 두 연공장에 갔다. 당시는 바로 엄동설한이라 바깥 온도는 영하 20도 좌우였다. 우리는 새벽 5시에 지질궁 광장에 서 열린 단체연공에 참가했다. 사부님께서는 친히 이곳에서 장을 청리 하신 적이 있었다. 이곳에는 아침 연공을 하는 사람이 1,000여 명에 달했고 에너지장이 유달리 강해 사람으로 하여금 온몸이 따뜻한 느낌을 갖게 했다. 장갑을 끼지 않아도 손이 시린 줄 몰랐다. 수련생들이 출근하는 시간이 모두 달라 단체 연공에 참가하는데 편리하게 하기 위해 지질궁에는 저녁에도 연공을 조직하는 사람이 있었다.
단체 연공이 끝난 후 어떤 수련생은 출근을 하고, 출근하지 않는 수련생은 남아서 법공부와 교류를 하거나 각종 파룬궁 홍보활동을 하였다.
창춘 수련생의 단체 법공부 조직은 아주 잘 되어 있었다. 파룬궁 홍보 장소는 수련생이 제공한 곳도 있고 직장에서 제공한 곳도 있었지만 수련생 개인이 제공한 곳이 더 많았다. 날마다 저녁이면 법공부를 했고, 모든 수련생이 모두 각기 다른 단체 법공부에 참가하고 있었다. 대형 법공부팀은 80-100여명이 참가했고, 작은 법공부 팀은 10여명 정도 참가했다. 법공부 참가자는 젊은이가 다수였는데 이는 창춘에 대학교가 많은 것과 관계있는 것 같았다.
수련생들은 단체 법공부를 아주 중요하게 여겼다. 출근하는 수련생은 퇴근 후에는 먼저 법공부팀에 가서 법 공부를 하기 때문에 집에 돌아갈 시간이 없어 찐빵이나 구은 떡으로 요기를 했다. 이렇게 법공부를 모두 마친 후 집에 돌아갔다. 사부님께서 긍정하신 방법으로 공부하는데 한 사람이 한 단락씩 외우고 순서대로 외웠다. 시간이 되면 지정된 사람이 이튿날 계속하여 전 날의 단락을 계속하여 암송했다.
3 . 수련이란 곧바로 안에서 찾는 것이다
창춘 보도소에서는 우리를 날마다 각 지역의 보도원과 함께 법공부와 교류를 하도록 배정했다. 우리는 창춘 수련생들이 시시로 도처에서 법으로 자신을 가늠하는 것을 보았으며, 실제 있었던 수많은 감동적인 이야기가 있었다. 어떤 것은 대법제자가 수련에서 성숙된 오늘에 와서 보기엔 작은 깨달음처럼 보이지만, 수련 초기에는 확실히 사람마음을 몹시 촉동시켰던 것이다.
한 보도원이 이런 일을 말한 기억이 난다. 50대의 한 남자가 있었는데 그는 살아오면서 가장 좋아하는 것은 술을 마시는 것이다. 수련 후에는 술을 마실 수 없었지만 그는 여전히 이 마음을 내려놓을 수 없었다. 한 번은 참지 못하고 마시고는 몹시 후회하면서 사부님 법상 앞에서 참회하면서 앞으로는 꼭 고치겠다고 하였고, 사부님도 그에게 기회를 주었다.
한 동안 지난 후 그는 또 참을 수 없어 다시 마셨다. 이번에 그가 보니 사부님 표정이 유달리 엄숙한 것을 보았고, 신체도 몹시 괴로웠다. 사부님께서 그를 대신해 감당하면서 또 한 번 기회를 주셨다. 그가 또 다시 한 번 수많은 술을 마신 후 그에게 원래 있던 업력들이 전부 그의 몸으로 돌아왔고 얼마 안 되어 그는 세상을 떴다. 장례를 치를 때 한 방에 걸어놓은 그의 영정에서 사람들은 그의 두 눈 아래에서 두 줄기 눈물의 흔적을 발견했다. 이것은 후회의 눈물이었다. 이는 그가 사람들에게 수련은 아주 엄숙한 것으로 반드시 진정하고 착실하게 자신을 잘 수련해야 하며, 천만년에도 만나기 어려운 수련기회를 잃지 말고, 반드시 확고하게 사부님을 따라 끝까지 수련해야 한다고 알려준 것이다.
한 보도원은 다른 한 가지 일을 얘기해 주었다. 한 번은 그가 자전거를 타고 한 연공장에 전법륜 책을 전달하러 가면서 속으로 의기양양해 했다. 내가 보서를 그들에게 보내주니 내 공이 얼마나 자라겠는가 하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자전거 짐받이에서 책이 주르륵 굴러 떨어졌다. 그는 급히 주어서 단단히 짐받이에 동여매고는 길을 떠났다. 그러나 얼마 안 가서 다시 책이 길에 떨어졌다. 이번에 그는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생각했다. 이건 어떻게 된 일이야? 자신이 어디에서 법에 부합되지 않은 곳이 있었는지 안을 향해 찾기 시작하였다. 어디서 잘하지 못했는가? 자신의 사심, 과시심, 환희심을 찾아냈고 아울러 남을 완전히 생각한 것이 아니며, 책을 보내주는 심태가 옳지 않았다는 것을 찾아내고는 얼른 자신을 조절하였다. 다시 잘 동여매고 순조롭게 목적지까지 도착하였다.
4. 경사경법(敬師敬法)에 대한 체득
수련생이 하는 말이, 법을 전한 초기에는 어떻게 수련하는지를 몰라서 일에 봉착하기만 하면 사부님을 찾았다고 했다. 어떤 수련생은 길에서 사부님을 만나면 길을 사이에 두고 사부님에게 뛰어가서는 사부님과 악수하고 사부님께 문제를 물어보곤 하였다. 끊임없는 법 공부를 통하여 모두들 물어보려는 문제들이 법 속에 모두 있다는 것을 서서히 알게 되었다. 수련이 제고됨에 따라 사부님과 대법은 어떤 일인지를 다 알게 되었고, 사부님의 위대함, 대법의 홍대함을 알게 되어 갈수록 사부님께 누를 끼치지 않게 되었다.
길에서 사부님을 다시 만나도 더는 달려가 말을 건네거나 한 바탕 묻곤 하는 일이 없어졌다. 그저 멀리서 조용히 사부님께 ‘허스(合十)‘를 하고는 묵묵히 떠났다. 혹은 사부님을 만나도 ‘허스(合十)‘ 하고 제 갈 길을 갔다. 어떤 수련생은 사부님 집 앞을 지나게 되면 역시 멀리에서 사부님 집을 향해 눈물을 머금고 허스할 뿐 더는 사부님 집에 가서 사부님을 방해하지 않았다.
젊은 남자 수련생 몇이 그들의 감수를 말했다. 처음에는 일이 있든 없던 간에 사부님 댁으로 달려갔고 작은 일에 부딪치면 바로 사부님에게 달려가 여쭤보곤 했다. 제고가 된 후 더는 사부님을 교란하지 않았고 이지적으로 사람의 정을 내려놓았다고 했다.
창춘의 많은 수련생들이 사부님 댁에 갔다고 한다. 사부님 댁은 유달리 간소하였는데 더블 침대 하나, 간이 책상 하나에 등받이가 없는 의자 몇 개가 있었다. 사부님의 따님은 소파에서 잤다. 의자가 모자랄 때면 포장박스로 의자를 대신했다. 겨울이면 다른 집과 마찬가지로 통 배추를 많이 장만해 겨울 내내 배추반찬을 위주로 하셨다. 방안에는 스팀이 없어 석탄을 때 방을 덥혔다. 어떤 수련생은 사부님 댁 에 갔다가 돌아온 후 사부님 댁의 난로에서 연기가 나는 것을 보고 마음이 몹시 괴로웠다고 한다.
매번 대법 서적이 오기만 하면 수량이 굉장히 많아서 이튿날이 되어야 각 보도소로 배포할 수 있었다. 서적을 책임진 수련생은 7층에 살고 있었는데 처음에는 편리를 위해서 대법 서적을 아주 자연스럽게 지하실에 잠시 보관하였다. 수련생은 다음날 어차피 옮길 것이기 때문에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후에 그는 이렇게 하는 것은 사부님에 대하여, 대법에 대하여 좀 불경스럽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아무리 이튿날 옮긴다고 해도, 아무리 하루 밤만이라도 지하실에는 놓아둘 수는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수련생의 경사경법의 마음이 얼마나 성실한가를 보아낼 수 있었다.
5. 교류는 스자좡 수련생의 정체 수련을 이끌어 빠르게 제고하게 했다.
창춘 교류에 참가한 수련생들은 감수가 모두 아주 깊었다. 예전에 자신은 항상 사람의 정과 사람의 관념으로 사부님과 대법을 대했고, 사부님에 대해서는 단지 몹시 감사하다는 마음뿐이었다.
창춘 대법제자의 정체적인 정진 수련 상태는 커다란 용광로였다. 교류에 참가한 짧은 며칠 간 스자좡 수련생 매 개인의 심성과 경지는 모르는 사이에 모두 아주 큰 폭의 제고가 있었다. 사람의 관념이 갈수록 적어지고 사부님과 대법에 보다 높은 인식이 있게 되었으며, 내심으로부터 수련의 신성함을 느낄 수 있었다. 사부님 고향의 수련생들은 참답고 실속 있는 법공부로 앞장 서 걸어가고 있는데, 우리 스자좡 정체도 마땅히 진수제자의 상태에 도달해야 하고 뒤떨어진 많은 것을 따라잡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스좌쟝에 돌아온 후, 수련생들은 진지하고 상세하게 몇 개 방면의 수확을 모두 모은 후, 각기 법회를 열었는데 대형 법회에는 1-2천명, 작은 법회에도 몇 십 명이 참가해 교류가 잘 되었다. 여러 사람은 또 각 지역, 법공부팀에 분산돼 내려가 한층 더 교류를 하였으며, 대·소법회는 모든 스자좡 지역에게 몇 십 차례 열려 원만하게 결속되었다.
창춘 수련생의 보귀한 경험은 우리 스자좡 지역 수련생의 정진 실수를 크게 촉진시켰다. 우리 지역의 수련상태가 참신한 단계 즉, 병을 없애고 몸을 튼튼히 하던 초급 수련 단계에서 법공부를 잘하고, 안을 향해 찾으며, 심성이 아주 빠르게 승화하는 단계로 넘어가게 하였다. 수련생들은 무엇이 수련인지를 알게 되었고, 아울러 언제 어디서나 대법으로 자신을 가늠하고, 법공부 열조를 일으키게 되었다.
여기에서 서술한 것은 1999년 ‘7.20’전 파룬따파가 중국 대륙 북방에서 널리 전파된 하나의 조그마한 이야기의 일부일 뿐이다. 사부님 60세 생신과 ‘세계 파룬따파의 날’에 즈음하여 사부님 은혜에 대하여, 파룬따파가 전 세계에 널리 전파된 것을 축하하기 위해 이글을 썼다.
수련생들이 부당한 곳이 있다면 자비로 지적해 주고, 보충 해 주길 바라는 바이다
원문발표 : 2011년 5월 16일
문장분류 : 수련마당
원문위치 :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1/5/16/【庆祝513】历史记录-一次难忘的学法交流-240506.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