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대륙 대법제자
[밍후이왕] 몇 년래 일부 수련생은 사부님의 이 단락의 법을 깨우치려 한다. “사실 박해 전의 노 수련생들 나는 당신들을 모두 제 위치에 밀어놓았는데 나중에 온 신 수련생들을 포함했다. 오로지 정념정행 하기만 하면 완전히 자신을 보호할 수 있다. 단지 일부 수련생들은 바로 정념이 없기에 모든 것을 구비했으나 박해 중에서 또 사람의 사상으로 문제를 보며 또 한 무더기를 집착하는데 사부더러 어떻게 하란 말인가?”(『2005년 샌프란시스코법회 설법』) 사부님의 이 설법에 대해 일부 사람은 몇 년간 미혹됐다. 사부님께서 우리를 제 위치에 밀어놓았다면 마땅히 신의 상태여야 하는데 왜 나의 난과 고비가 아직 이렇게 많은가? 심지어 일부 사람은 심한 병업 상태가 나타났으며 사악에게 붙잡혀가기도 했고 병업의 박해로 사망하기도 했다. 이러한 표현은 사부님께서 말씀하시는 ‘제 위치에 밀어놓았다’와 너무나 큰 격차가 있다. 일부 수련생은 자신의 오성(깨달음)이 제고되지 못함으로 고뇌하나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연공해도 왜 공이 자라지 않는가’에 있는 두 가지 원인에 따르지 않는다. 마땅히 안을 향해 자신에게 묻고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법을 믿고 있는지? 이해하고 있는지?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신 대로 하고 있는지, 정말로 절충하지 않고 했는지, 아울러 하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법에 비춰 자신의 안을 향해 수련했는지? 또 법공부를 지식과 이론을 배우는 것으로 하고 있거나 이론과 실천을 이탈시키거나 실천 속에서 끊임없이 사람의 것을 개입시켜 사부님의 요구로 대체하지 않았는지?
곤혹 속에서 일부 수련생은 노력해 법공부하고 고비를 넘기고 발정념을 한다. 표면으로 세 가지 일에서 매우 정진하나 이러한 표현이 사존께서 말씀하신 ‘제 위치에 밀어놓았다’의 상태에서의 표현이 맞을까? 내심에서 진정한 개변을 가져온 것일까?
한 수련생이 교류에서 다음과 같은 예를 들어 말했다. “마치 매우 높고 높은 피라미드와 같이 사존께서는 ‘7.20’전에 우리를 단번에 탑 꼭대기로 밀어놓으셨으며 신통과 능력을 모두 우리에게 주셨다.” 하지만 그 전에 가장 관건적인 문제는 우리가 내심에서 진정으로 자신이 이미 ‘탑꼭대기’에 있다고 믿느냐 하는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우리를 제 위치에 밀어놓으셨다고 알려주셨고 그럼 우리는 내심으로 정말로 제 위치에 도달됐다고 믿어야 한다.(입으로만 말해서 되는 일이 아니다.) 바로 이 문제에서 신사신법(信師信法)이 체현되는 것이다.
그 다음 생각해봐야 할 것이 제 위치로 밀어놓음을 받은 대법제자는 마땅히 어떤 상태여야 하는가이다. 사존께서는 설법에서 여러 차례 반복해 강조하셨다. 우리에게 조사정법, 중생구도, 사전의 크나큰 서약을 완성하라고 하셨다. 이것이 핵심이다. 또 우리 상태는 “대법제자로서 당신의 일체는 곧 대법(大法)이 구성시켜 준 것이며 가장 바른 것으로서, 오로지 일체 바르지 못한 것(不正)을 가서 시정할 뿐”(『정진요지 2-대법은 견고하여 파괴될 수 없다』)이어야 한다. 그럼 가장 바른 것이니 곧 법의 표준에 부합되어야 한다. 대법 표준에 부합되는 생명이면 곧 우주에서 가장 바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늘 일부 사람의 관념, 집착 등 마성이 때때로 폭로되어 나온다. 이런 현상이 나타날 때 우리는 늘 자신이 바르지 않다고 여기며 사부님께서 요구하는 표준에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가상과 관념을 구실로 사부님 요구에 부합되려 하지 않으며 고집스레 자신을 ‘아직 사람이 수련하고 있다’, ‘아직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상태에 미치지 못한다’로 되돌려 놓는다. 마치 ‘금으로 된 사발로 밥을 빌어먹고, 법보를 지녔으나 거지의 가련함을 구하고 있다’와 같은 것이다.
신사신법 문제에 관해 최근 사부님께서도 명백히 설법하셨다. “당신은 사부가 어떻게 하려면 당신은 곧 어떻게 한다고 말하지 않는가? (제자들 웃음) 어찌 사부가 어떻게 하는데 대해서도 생각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사부가 주류(主流)사회를 하라고 했으면 그럼 당신들은 정념으로 주류사회에서 하라. 반드시 이룰 수 있다.”(『더 정진하자』) 물론 이러한 과정에서 심성을 제고해야 하는 수련의 요소가 있고, 사람을 구도하기 어려운 요소가 있기에 어려움과 모순에 봉착하게 된다. 편안하게 소파에 앉아 찻물을 마시듯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오직 법으로 자신을 비춰보고 안을 향해 심성을 제고하려 한다면 아주 빠르게 지나갈 수 있다. 만일 하는 과정에서 사부님의 요구를 의심하는 마음을 품고 있거나 심지어 사부님 요구에 자신이 들어맞지 않음을 증명하려는 마음을 품고 있다면 곧 크게 잘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곧 정법에 교란 작용을 하는 생명 쪽에 서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의 관념과 사람 속에서 양성된 습관을 사부님의 요구보다 더 중하게 보고 있으며 자신의 사람 인식을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법리보다 진실하게 여긴다. 이는 곧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신 것을 잊어버리고 믿지 않는 것이 된다. “대법제자의 위치는 예삿일이 아니며 일반적인 과위(果位)가 아니다. 이런 종류의 과위는 개인수련에 의해서는 수련해 낼 수 없는 것으로, 보통 수련인은 10세(世) 8세(世), 백세(百世)일지라도 다 그렇게 높이 수련할 수 없다! (박수) 첫째, 당신은 대법이 제도하는 생명이고, 둘째, 당신은 우주 정법시기의 대법제자이며, 셋째, 당신은 중생을 구도하는 거대한 사명을 갖고 있고, 구도 받는 생명 자체도 보통이 아니며 매우 많은 중생 역시 고층차에서 온 것으로 대법제자는 바로 이렇게 큰 사명을 띠고 있기에 당신은 비로소 그렇게 높이 수련할 수 있고 그렇게 큰 과위(果位)를 증오할 수 있으며 당신은 비로소 그렇게 휘황한 성취가 있을 수 있다.”(『2005년 샌프란시스코법회 설법』) 이렇게 십세, 백세일지라도 그렇게 높이 수련할 수 없다면 우리는 왜 고집스레 자신을 자신의 관념 속에 감금시켜 ‘수련’의 상태에 처하게 하는가? 그것은 아직 관념이 전변되지 않은 것이며 감히 사부님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관념으로 자신을 속박하고 눈에 보이는 것을 실익이라 여겨 가늠하게 된다. 그러므로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정념십족(正念十足, 정념이 충족)과 정념이 강대할 때 마땅히 있어야 할 상태를 체현해내지 못한다.
이 몇 년간 우리는 많은 관을 수련생들이 넘지 못하는 것을 보아왔는데 근본적으로 따지면 모두 실천 속에서(이론이나 지식으로 아니라) 정말로 신사신법하고 있는지 하는 문제가 존재한다. 정말로 강대한 정념이 있다면 행동에서 반드시 체현되어 나온다. 왜냐하면 정념과 정행은 일체이고 갈라놓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행동에서 무조건적으로 사부님의 요구를 해내야 하는 것이지, 자신이 설정한 기타 표준으로 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여전히 마음수련을 할 줄 모르고 모순 속에서 관념을 놓지 못하고 사람 마음으로 집착하는 것을 내려놓지 못하게 된다. 그러면 구세력은 곧 우리의 누락을 단단히 틀어쥐고 우리의 틈을 타고 들어와 사부님의 정법을 교란하게 된다.
현재 층차에서의 자그만한 옅은 깨달음으로 부당한 곳은 수련생들이 자비롭게 지적하시기 바란다.
문장발표: 2011년 5월 8일
문장분류: 수련마당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1/5/8/240298.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