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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부님께 구원을 청하다’ 로부터 생각한 것

글/ 랴오닝 리저(理哲)

[밍후이왕] 사이트 문장에서 수련생들이 말하는 ‘사부님께 구원을 청하다’는 화제를 늘 보게 되는데 이는 나에게 아래 몇 가지 문제를 생각하게 했다.

한 신 수련생으로서 관건적 시각에 사부님을 생각할 수 있고 아울러 사부님 도움을 청하는 이것은 심성(心性)이 제고된 표현(왜냐면 어떤 수련생은 관건적 시각에 사부님을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약 한 노 수련생으로서 특별한 마난, 위험을 만났을 때, 자신은 수련인임을 생각하지 못하고, 사부님을 생각하지 못하며, 사부님 대법을 생각하지 못한다면 그건 당연히 너무도 안 될 일이다. 하지만 능히 생각할 수 있는 상황에서 말한다면 우연히 사부님 도움을 청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으나 만약 늘 사부님 도움을 바라는 것은 좋지 않다. 그것은 무엇이나 다 사부님께 밀어버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어떤 수련생은 진상을 알리고 3퇴를 권하며 발정념 하는 것조차 모두 사부님 가지를 청하며, 심지어 진상 자료를 찍고 진상CD를 굽는 것마저도 사부님 가지를 청하는데 이것 또한 일종 집착이 아닌가?

동수여, 당신은 생각해 보았는가. 우리가 마난에 봉착해 사부님께 도움을 청할 때, 우리 몸이 괴로워 사부님께 구원을 바랄 때 이런 마난은 바로 사부님께서 우리를 위해 감당하시는 것이다. 당시 예수는 그의 제자를 구도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혔다. 지금 사부님께서는 우리를 구도하시기 위해 99년 ‘7.20’ 이후 사악의 지명수배, 공격, 욕설, 박해를 당하셔서 당시 사부님 육신은 몹시 큰 상해를 받았다. 사부님 자신에게는 난이 없는데 왜 아직도 이런 마난을 감당하셔야 하는가? 바로 우리를 대신해 감당하시는 것이 아닌가? 지금에 이르기 까지 사부님께서는 여전히 우리를 위해 이런 난을 감당하시는 것이다. 우리 아직도 차마 어찌 사부님에게 우리를 위해 감당을 더 추가하시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일이란 모두 인연이 있는 법이라, 우리가 수련 중 봉착하게 되는 마난도 모두 우리 예전에 진 빚과 관계있는 것이므로 우리가 수련함에 약간의 난도 모두 감당하지 않고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진 빚을 어떻게 갚는단 말인가? 빚을 갚지 못하고서야 어찌 원만할 수 있겠는가? 이는 우주의 이치다. 사실 우리가 감당하고 있는 것은 다만 아주 적고 적은 것일 뿐이다(대부분은 사부님께서 우리를 대신에 감당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급적 스스로 관과 난을 잘 넘어야 한다. 이것은 구세력의 배치를 승인하는 것이 아니라 구세력의 배치를 부정하고 자신의 길을 잘 걸어가는 표현이다,

가령 사부님을 청하는 목적이 모두 마난을 작게 하고 편안하게 지내려는 것이라면 이는 수련의 이치와 부합되지 않는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당신이 속인 중에서 좋은 것을 얻어 이 난을 넘지 못하면 당신은 곧 제고해 올라오지 못한다. 당신이 속인 중에서 편안하고 편안하게 잘 지낸다면 당신은 어떻게 수련하겠는가? (『전법륜』) 수련이란 곧바로 마난 중에서 수련하는 것이며, 큰 고생을 겪어야 하고 큰 고비를 넘겨야 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지만 어떤 수련생은 지금까지도 이 관념을 바꾸지 못하고 있어 늘 대법을 수련하면 마땅히 잘 지내고 편안하게 지내야 한다고 여기는데 이러면 어떻게 수련하겠는가?

우리가 부딪히는 매 한 고비, 매 한 난은 모두 심성을 제고할 요소가 그 안에 있는 것이므로 오직 안에서 찾아야만 이 고비를 넘을 수 있고 제고돼 올라올 수 있다. 그렇다면 난이 있어 사부님 도움을 청하면 밖에서 찾는 것이고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닌가?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진정한 수련은 곧 마음을 닦아야 하고, 안으로 닦아야 하며, 안에서 찾아야 하는데, 밖에서 찾는 것이 없다.” (『전법륜』) 밖에서 찾으면 제고하지 못한다.

난이 있기만 하면 사부님 도움을 청하는 것은 사람마음의 표현이고 정념이 부족한 체현이다. 만약 이렇다면 사부님께서는 도우려 해도 도울 수 없게 된다. 그것은 당신에게 정념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정법은 절대로 엄숙한 것이며 수련을 시작할 때 마땅히 해야 할 것은 사부가 이미 당신에게 해주었으며 지금은 바로 당신의 정념에 의지하여 고비를 넘어야 한다. 당신이 정념이 충족하다면 사부가 당신을 도울 수 있다.”(『로스앤젤레스시 법회설법』) 사부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제자들 정념이 족하거니 사부는 회천력(回天力)이 있노라.”(『홍음2 』「사도은」) 그러므로 사부님께서 도와주시는 사람은 주요하게 정념이 족한 대법제자이며, 정념정행하는 그런 대법제자로서 아무런 두려운 마음도 없, 반석같이 강인하면 구세력은 감히 그를 박해하지 못할 것인데 이는 사부님께서 가호한 결과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가?

전반 정법 과정에 구세력은 그것들의 배치를 사부님께 강요했고 사부님에게 그것들 배치대로 하라고 하여 사부님 정법에 엄중한 교란과 파괴를 조성해 주었다. 만약 우리도 역시 늘 사부님께서 무엇을 해주실 것을 구한다면 그것 역시 사부님 정법에 영향이 있는 것이 아닌가? 이 문제에 주의해야 할 것이다. 우리 대법제자는 모두 조사정법한다고 말하는데 그럼 우리가 늘 사부님께 이것저것을 해달라고 청한다면 사부님께 번거로움을 더해 주실 것인데 그럼 어찌 조사정법 하겠는가?

우리 수련의 길은 모두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배치해 주신 것으로서, 매 한 사람의 고비와 난은 모두 이 개인의 구체 상황에 따라 안배한 것이며 안배가 모두 아주 과학적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또 사부님 도움을 바란다면 사부님 안배를 흐트러뜨리고 교란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절대로 이 일을 주의해야 한다. 사실 마난이 올 때 우리가 사부님께 청하지 않아도 사부님 법신은 시시각각 우리를 보호해 주시고 있는바, 오직 우리에게 고비를 넘을 결심이 있고 심성을 제고하기만 하면 사부님께서는 모두 우리를 넘을 수 있게 해 주신다. 만약 우리가 사부님께 청하는 목적이 세간에서 잘 지내기 위해서라면 내가 생각하건대 사부님께서는 도와줄 방법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안배해 주신 것은 주요하게는 우리의 원만을 책임지기 위한 것이지 세간에서 잘 지내는 것을 책임지기 위해서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부님께 도움을 청하지 못한다는 말은 아니며, 사부님께 도움을 청하는 수련생이 수련을 잘하지 못했다는 말도 아니다. 몇 년 전 나도 사부님께 청한 적이 있다. 나는 사부님께 청하는 수련생의 어려움을 깊이 알고 있다. 이 한 점으로부터 말하면 제자가 사부님을 청하는 것을 나무랄 것은 없다. 하지만 관건적인 문제는 사부님을 청하는 이 일의 자체가 이때의 이 수련인의 심성표준과 층차를 반영하는 것으로서, 만약 심성이 제고돼 올라오고 이 층차를 벗어났다면 당신에게 사부님 도움을 청하라 해도 당신은 청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늘 사부님을 청하는 수련생은 앞으로의 수련의 길에서 용맹정진하고, 정념정행 하며, 세 가지 일을 잘해 가급적 빨리 이 층차를 벗어나 보다 높은 층차로 돌파해야 할 것이다.

개인 층차의 제한으로 부당한 곳이 있다면 동수의 바른 지적을 삼가 바라는 바이다.

문장발표 : 2011년 2월 24일

문장분류 : 수련마당
문장위치 :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1/2/24/236739.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