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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제자의 글은 순정하고 진실해야 한다

글/해외대법제자

[밍후이왕] 중공매체의 선전에 익숙한 사람은 그것의 한 세트로 된 선전망을 알고 있다. 중국 대륙 매체 기구에서 일한 적이 있는 사람은 더욱더 그 운영방식을 잘 알고 있다. 언제 뭘 선전해야 할지, 어느 방면의 글을 치중하여 실어야 하는지, 어떻게 악당과 일치함을 유지할 것인지를 파악하여 ‘사계절 찬가’를 부르고 있다. 개인의 글쓰기에도 당문화로 배양된 전형적인 형식이 있다. 중심되는 인물을 더욱 완미화하고, 높이고, 위대하게 꾸며 가히 ‘합리적인 상상’을 할 수 있다. ‘합리적인 상상’을 하면서 주인공의 내적활동과 다른 사람에 대한 찬양 등 일관성 있는 내용을 진짜처럼 글에 적어 넣을 수 있다. 옛말에 ‘쌀이 모자라면 물로 보충하여 밥을 지으라’했다. 현재 중국의 문인은 모두 ‘물을 넣고’ ‘가짜를 만드는’ 고수들이다.

수련인으로써 우리는 자신이 ‘진’을 수련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밍후이왕에 발표된 글은 진실을 근본으로 한다. 뉴스 보도에서 중공사당이 극력 소식을 봉쇄하고, 네트워크를 봉쇄하는 정황에서도 힘을 다하여 사실 여부 확인을 하며 심지어 반복하여 확인한다.

몇 십 년의 당문화 침투와 염색으로 사람들은 그 영향을 피해가지 못했다. 특히 매체 혹은 중공당정기관에서 일한 적 있는 대법제자는 글을 쓰는 과정에서 자신이 쓴 글이 엄격히 진실한지, 진정으로 ‘합리적인 상상’을 하지 않았는지, 과장과 상상에 의거하지 않았는지를 늘 심사해야 한다.

뉴스의 가장 큰 책임은 사실의 진실에 부합되는 것이다. 취재하고 보도하는 과정은 아주 어렵다. 사실을 수집하고 세심히 사실을 확인해야 한다. 세세한 부분까지 이해하고, 더 많은 경로를 통하여 보충하고, 증거를 확실히 해야 한다. 물론 현재 중국 대륙 대법제자는 중공의 잔혹한 박해를 당하고 있으며 많은 정보의 경로는 봉쇄당했다. 대법제자는 자신의 안전이 위협을 당하는 정황에서 진상을 폭로 했다. 이는 매우 어려운 일이며 대단한 장거이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단지 엄격히 사실을 추구하는 태도이다. 사실 많은 경우는 바로 하나의 수련 과정이다.

예를 들면 대법제자는 모두 현지 수련생이 능히 협조를 잘할 수 있기를 희망하며 공동으로 법을 실증하는 일을 잘할 것을 바란다. 일부 법에 부합되지 않는 현상에 봉착하면 빨리 지적해 주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일부 불량한 습관이 체현되어 나온다. 글을 쓰기 전에 일의 정황을 똑똑히 조사하지 않거나, 담론하는 것이 한쪽에만 치우친다. 그러면 조성한 영향은 그 반대이다. 수련생은 아마 그 속의 불순한 것에 이끌리고 심리적으로 불평하는 등등이 나타날 수 있다. 그 결과, 모순이 해결되지 않고 오히려 부면적인 영향이 더욱 많이 만들어진다. 물론 모순이 발생하면 각자는 모두 안을 향하여 찾아야 한다. 그럼 투고하는 자인 우리로서는 자신의 어느 마음을 수련하여 버려야 할지 보아내야 한다.

만일 우리의 이런 당문화 습관이 평소의 박해를 폭로하고 악인을 폭로하는 글에 침투되면 그건 더욱 안 될 일이다. 우리는 자신의 책임이 무엇인지 알고 있고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다. 때문에 이 점에 있어서 우리는 더 말하지 않더라도 엄격히 파악해야 한다. 사부님께서 설법에서 말씀하셨다. “명혜망의 특징은 바로 대법제자를 박해하는 중국대륙의 진실한 정황을 보도하는 것을 위주로 하는데 그것은 사악을 폭로하는 첫 번째 자료이며 보도한 것의 99%이상 심지어 100% 모두 진실한 것이다.”(《로스앤젤레스 시 법회 설법》) 우리는 시시각각 사부님의 말씀을 마음에 간직해야 하며 어떠한 박해의 진상, 악인악행을 폭로하든지 실증이 있어야 하며 능력껏 실제인지 확인해야 한다. 우리는 ‘주관’적인 추측을 결론으로 삼지 말아야하며 ‘주관적인’ 추측으로 악인의 심리를 묘사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에게는 사당의 그러한 ‘합리적인 상상’이 필요하지 않는다. 오직 진상만이 법을 실증할 수 있으며 어떠한 주어들은 것이나 엄밀하지 못한 것, 그럴 것이라 생각되는 것, 심지어 과장한 것도 모두 안 된다. 심하면 사람을 밖으로 밀어내어 구도될 수 없게 할 수 있다.

늘 글을 쓰는 수련생이 하루는 『轉法輪(전법륜)』을 읽으면서 다음의 단락에서 감촉을 받았다고 했다. “화상이 고기를 먹었다고 하자 책을 쓰는 사람은 흥미가 일었고, 제목이 사람을 놀라게 할수록 더욱 보고 싶게 하는데, 문예작품이 생활 속에서 오지만 생활보다 높다고 하지 않는가. 그래서 그것을 소문냈다.” 그러했다. 매번 수련생과 교류할 때 스스로 ‘정채롭고’ ‘감동 주는’ 이야기를 담론할 때 즉시 흥이 났고 ‘제목이 사람을 놀라게 할수록 더욱 보고 싶게 하는데,’ 식이었다. 여기서 단번에 자신의 사람 마음과 집착을 보아냈다. ‘왜 흥이 났을까?’ ‘왜 제목이 사람을 놀라게 할수록 좋다고 하는가?’ 나는 하나의 강대한 자아를 표현하는 마음을 보아냈다. 심지어 이런 마음은 글의 내용에도 깊이 스며 있었다. 중요한 것은 발표였고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며 자신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글에 명확한 서명이 적혀 있지 않으나 나의 마음속에는 오히려 아주 심한 ‘명’이 들어 있었다. 심지어 글을 발표한 후 스스로도 묵묵히 그 글을 두세 번 읽었다. 어떤 때는 일종 도취감에 빠져 있다. ‘이것은 내가 쓴 글인데 수련생들은 모른다. 그러나 사부님께서 아시고 뭇 신들이 알고 있다.’

만일 세인에게 자비로운 각도에서 제목을 택할 때 출발점은 될수록 세인에게 다리를 놓아주어 세인이 쉽게 진상을 접수하는데 두어야 한다. 이는 우리가 진상을 알리는 중에서 수련인의 지혜가 체현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명’과 ‘강렬한 자아’는 곧바로 수련인이 내려놓아야 하는 것이며, 잘 넘기지 못하거나 혹은 장기적으로 의식하지 못한다면 바로 스스로에게 설치한 함정이 되어 위험해질 것이다.

글을 쓰고, 글을 읽는 중에서 대법제자는 알 수 있는데 좋은 글은 써내는 것이 아니라 수련생이 착실히 수련하는 중에서 수련해낸 것이고 법에서 온 것이다. 글이 능히 사람에게 감동을 줄 수 있음은 수련생의 심성과 ‘真善忍(진선인)’에 대한 실증에서 오는 것이다. 기자로서, 글짓기에 특장이 있는 수련생으로서 능히 사실을 깨끗하고 정확하게 표현해내야 한다. 순정하지 못한 것을 제거하고 당문화 습관과 영향에서 비롯된 것을 제거해야 한다. 사람을 구도하려는 마음을 품고 자신의 능력을 다하여 진상으로 세상 사람을 구도해야 한다. 이것 역시 우리가 글을 쓰는 방면에서 수련해야 하는 과정이다.

내심이 순진하고 사심이 없어야 하며 청정하고 상서로워야 하며 자비로 다른 사람을 위해야 한다. 이렇게 써낸 것이야말로 다른 사람이 비로소 보기 좋아할 것이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실재(實在)적이고 준확(準確)하며 깨끗하고 사람의 정(情)을 갖지 않는 문장은 속인이 능히 써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수련인의 내경(內境)은 청정(淸靜)한 것이기 때문이다.”(《성숙》) 자신을 잘 수련하여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원하는 요구에 도달해야 한다.

작은 체득이며 수련생과 교류하는 것이다. 부족한 것은 자비롭게 지적하기 바란다.

문장발표: 2011년 1월 9일

문장분류: 수련마당

문장위치: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1/1/9/交流–大法弟子写的文章要纯净、真实-23470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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