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경하시는 사부님 안녕하십니까!동수님들 안녕하십니까!
나는 71세고, 1994년에 법을 얻은 노 대법제자다. 50여세 때는 병으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기에 한 발자국도 걷기도 힘든 상황이었으나 70세 때는 오히려 하루에 6,70리 산길을 오르내리고 산을 넘고 언덕을 넘으면서 진상을 알려 사람을 구하느라 바쁘다. 조사정법, 나는 갈수록 젊어지는데 사부님께서 나에게 든든한 신체를 주셨다. 10여 년 간 수련 중에서 경험한 시련은 나로 하여금 일체는 사부님께서 하시며, 법공부가 중요하고, 발정념이 중요하며, 사람을 구하는 것이 중요 하며, 대법은 초상적이며, 사부님께서는 당신의 그 마음을 본다는 것을 깊이 느끼게 됐다.
이번은 내가 처음 대륙 대법제자 인터넷 심득교류회에 참가하는데 내가 구술하고 수련생이 대필해서 완성한 것이다. 합당하지 못한 곳에 대해 동수들의 자비로운 시정이 있기를 희망한다.
대법은 나를 구원해 고해에서 나오게 했다
“고난 속에 태어나 생계를 위해 허덕이며 버티어 왔구나, 어느 날 아침 대법을 얻었거니 되돌아가는 발걸음 멈추지 말거라” (『‘질풍경초’를 읽고서』)나는 늘 눈물을 머금고 사부님의 이 시를 읽으면서 꼭 정진실수 하여 일찍 집으로 가겠다고 생각했다.
법을 얻기 전 나는 정말 불운한 사람이었다. 지주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빈곤한 하층민식 재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해서 방목하면서 2년간 공부했다. 남편은 ‘우파’로 몰리다가 사망했는데 그 때 큰 아이가 열 살 이였고 작은 아이가 세 살이었다. 나는 젊어서 과부가 되어 아들 둘 딸 둘, 네 아이를 키웠는데 의지할 곳이란 전혀 없었다. 과도한 고통으로 온 몸에는 병 이였고 보잘 것 없는 삼림 농장 월급으로 다섯 식구를 먹여 살릴 수 없었다. 나는 병으로 퇴직하고 작은 식품점을 꾸려 하루하루를 지탱했고 집이 없어 셋방살이를 했다. 반생을 고생해서 아들을 키우고 손자까지 보느라고 한 시각도 편히 쉬지 못했다. 늙게 되자 위장병, 간염, 심장병, 신경쇠약 등 온 몸은 병투성이였다. 저녁에는 수면제를 먹어야 조금 잘 수 있었고 낮에는 맥이 없어 쓰러질 듯한 신체를 끌고 채소를 사다가 밥을 짓고 물건을 구입해 노점을 펼쳐 놓아야 했다.
1994년 3월 5일은 내가 한 평생 잊을 수 없는 날이다. 나는 모모 공장에서 거행하는 파룬궁 심득대회에 참가했다. 내가 회의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만원이어서 뒤에 앉아 들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듣고 또 들으면서 들을수록 편안했고 전신이 가벼웠다. 나는 틈새를 찾아 점점 앞으로 들어가서 좀 더 똑똑히 들으려고 하다가 돈지갑이 떨어지는 줄도 몰랐다. 법회가 끝나고 다른 사람들이 다 갔을 때에야 비로소 허리에 찾던 돈지갑이 없어진 것을 발견했다. 내가 머리를 돌려 보니 돈지갑은 원래 내가 앉았던 자리에 고스란히 놓여 있었다. 누구도 주어가지 않았다! 나는 이 법은 유난히 다르며 이 한 무리 사람들은 유난히도 좋다고 느꼈다. 나는 사부님의 설법 녹음을 듣자 너무도 친절함을 느끼게 됐는데 마치 이것이 내 한 생에서 찾으려고 하던 것 같았고 나를 다른 사람으로 변하게 한 것 같았다. 그 순간, 나는 대법을 수련하겠다고 결심을 내렸는데 이때로부터 내 인생은 희망이 있게 됐다.
매일 아침 네 시면 나는 어떤 사람이 “이 할머니! 이 할머니!”라고 부면서 나를 깨워 연공하라는 부름 소리를 듣게 됐다. 저녁에는 손자를 보면서 자는데 키만큼 큰 파룬이 방에서 돌고 있는 것을 보곤 했다. 내 신체는 기적적으로 건강해졌고 일을 할 때면 기운이 펄펄 났다.
나는 그 당시 가사를 하는 외에 다섯 살과 한 살 되는 손자를 보아야 했다. 나는 글을 몰랐으나 매일 저녁 손자 애들을 데리고 법공부를 하러 갔다. 나는 큰 애를 끌고 작은 애는 안고, 방석 하나를 들고 게다가 아이를 감싸 안을 수 있는 홑저고리까지 가지고 가서 법공부를 하곤 했다. 아이들도 매우 착해 말을 잘 들었는데 큰 아이는 가부좌하고 앉아서 법을 들었고 작은 아이는 새근새근 잠을 자곤 했다. 법공부가 끝나면 할머니 손자 셋이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어느 한 번은 눈이 내렸는데 한 수련생이 자기 웃옷을 벗어 아이를 안았다.
나는 또 큰 손자를 데리고 동수들을 따라 산에 가서 홍법했다. 그 때는 정말 좋은 나날이었다!
가정이라는 첫 번째 관을 넘다
좋은 날도 오래가지 못했다. 99년 ‘7.20’이 왔다. 중공의 장(江) 마두는 우리들이 연공을 하지 못하게 했다. 이렇게 좋은 공법을 하지 못하게 하다니? 나는 관계치 않고 종전과 마찬가지로 은행 입구에서 연공하다가 악경에게 잡혀 간수소에 가게 됐다.
큰 아들이 간수소에 달려와 경찰들에게 담배를 사주고 먹이면서 돈으로 나를 사서 나를 ‘교육’하려고 했다. 경찰은 나에게 보증서를 쓰라고 했지만 나는 쓰지 앉자 경찰이 ‘짝짝’하고 내 뺨을 때렸다. 나는 감방에 들어갔다. 이후에 나는 이곳은 좋은 곳이 아니고 나쁜 사람을 다스리는 곳인데 좋은 사람이 여기에서 무엇을 한단 말인가 생각했다. 작은 딸이 차를 몰고 와서 나를 집으로 데려왔다.
저녁 집에서 ‘투쟁’대회를 열었다. 아들 며느리, 딸 사위들이 나를 ‘전향’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누구도 내 마음을 움직이지 못했다. 나는 말했다. “나는 한 평생 고생하다가 일생에 이 파룬궁을 만나게 됐다. 내가 한 평생 고생하면서 너희들을 키웠는데 남은 것은 온 몸의 병뿐이다. 천근도 넘은 무거운 이 짐을 너희들 중 그 누가 나를 대신해 반근이라도 걸머지었느냐? 사부님께서 나를 도와 소업시켜 나는 무병무통하고 온 몸이 날듯 가볍다.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느냐? 우리는 나쁜 일도 하지 않았다.” 남편이 문화혁명 때 ‘우파’로 몰리는 바람에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몹시 힘들었기에 매우 두려워했다. 그 아이들은 나를 설복할 수 없자 이후에는 더는 관계하지 않고 내버려 두었다.
그 당시는 정말 사악했다. 동수들도 만나면 감히 말을 하지 못했고 악인은 때리고 벌을 주기에 다만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TV에서 마구 말하고 떠들어 대면서 시비를 전도하는 것을 보니 마음이 매우 울적했다. 오직 직접 ‘파룬따파는 좋다(法輪大法好)!’, ‘진선인은 좋다(眞善忍好)’, ‘우리 사부님의 결백을 돌려 달라’는 글을 써서는 저녁이 되면 나가 붙이는 수밖에 없었다. 오색 종이로 연꽃을 만들어 진상 표어에 매어 놓고는 길 옆 나무에 걸어놓아 오가는 사람들이 보게 했다. 나는 또 황금색 천을 사서 붉은 칠로 대법진상 표어를 쓴 후 내다 걸어놓았다. 비록 공부는 2년 밖에 하지 못했으나 현수막에 쓴 글자는 아주 반듯 했다. 나중에는 아예 크레용으로 도료 분사기로 벽에 글을 쓰거나 분사했다. 다섯 살 되는 손자가 매일 나와 함께 가서 쓰곤 했다.
큰 아들이 아르바이트 하고 집으로 돌아오게 되자 손자가 마중을 나갔는데 아들이 차에서 내리자 ‘대법이 좋아요’라고 말했다. 집에 도착한 아들이 TV를 켜자마자 대법을 모독하면서 한 할머니가 손자를 죽였다는 조작 사건이 방송됐다. 아들은 마성이 폭발해 마구 욕을 퍼부었다. “나는 외지에 가서 일하는데 엄마가 집에서 내 아들을 죽이겠네! 저기서 말하는 것이 당신과 마찬가지구만!” 그리고는 내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나를 방에서 거실까지 끌고 가서는 나를 차서 넘어뜨려 놓고 마구 때렸다.
매를 맞은 나는 단번에 청성해 졌다. 나는 줄곧 감히 나서서 호법하지 못했다. 아이들이 연루 될까 봐 두려웠고, 악당이 애들을 해칠까 두려웠던 것이다. 나는 무엇이던 모두 아이들을 생각했는데, 반대로 그들은 악당에 기만당하고 독해되어 나를 때린다. 나는 베이징에 가서 호법해야겠다. 더는 악당이 사람들을 해치게 해서는 안 된다!
베이징에 가서 호법하고 무사히 돌아오다
나는 머리를 감고 목욕하고는 가장 좋은 옷을 입고 몇 년간 모아 두었던 돈 350원(위안)과 친히 만든 ‘파룬따파는 좋다(法輪大法好)’와 ‘우리 사부님의 결백을 돌려 달라’는 현수막 두 개를 가지고 살그머니 집을 나섰다. 그 당시 사부님께서는 이미 『이성』경문을 발표하셨다. 반복적으로 학습하고 나니 나는 내가 베이징에 갔다가 곧 돌아올 것으로 생각됐다.
경찰들은 장기적으로 버스 정류소, 기차역 및 큰 길 입구에서서 파룬궁 수련생들을 가로 막고 있었다. 나는 먼저 공공버스를 타고 허난성과 인접하고 있는 마을에 가려고 현지 농민에게 물었더니 그 농민은 지금 허난성 차량이 사람을 태우지 않는다고 말 했다. 나는 아마 자신이 베이징으로 가려는 일념이 순정하지 못한 것이라 생각하면서 사부님께서 내 마음이 진심인가를 고험해 달라고 청했다.
나는 오늘 걸어서라도 베이징에 갈 것이다. 나는 허난성 방향으로 4킬로를 걸어 가다가 허난성으로 가는 차를 탔다. 허난성에 도착해 당일 베이징으로 가는 가장 늦은 차표를 샀다. 객실에서 기다리면서 차에서 내린 후 어떻게 천안문으로 갈 수 있는지 탐문했다. 다른 사람이 “할머니 혼자서 어떻게 그리 먼 길을 갈 수 있나요, 할머니는 베이징에 무엇 때문에 가시나요?”라고 말했다.
이튿날 아침, 기차에서 내려 사람들을 따라 갔다. 베이징 도처에 모두 사람들이었고 도처에 모두 차량들이었다. 나는 어리벙벙해서 자신도 모르게 천안문에 도착했다. 나는 금수교에 서서 사부님께 허스하면서 “사부님 제가 늦게 왔습니다!”라고 말했다. 흐르는 눈물을 금할 수 없었다.
나는 표 한 장을 샀는데 내가 나이가 많은 이유로 매표원은 반값만 받았다. 나는 3대전에 들어갔다. 첫 번째 대전에 들어서자 나는 큰 화분 통이 있었는데 전후 좌 모두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조금 긴장했다. 그러나 사부님께서 신변에 계신다고 생각했다. 나는 대전을 등지고, 사람들을 마주하고 품에서 현수막을 꺼내 펼치며 일면 높이 외쳤다: ‘파룬따파는 좋다(法輪大法好)! 진선인은 좋다(眞善忍好)! 우리 사부님의 결백을 돌려 달라!’ 소리를 친 후 나는 신속히 현수막을 화분 통 위에 놓고 후문으로 갔다. 두 번째 대전 앞에 도착해 나는 진정하고 두 번째 현수막을 펼쳤다. 나는 순리롭게 세 번째 대전을 거쳐 나왔다. 천안문 성루에 가서 ‘파룬따파 하오’를 외치고 싶었다.
성루에 오르려면 15위안을 주고 표를 사야 했다. 이때 나의 사람 마음이 나타났다. 표를 사기가 아까워 사람들의 흐름을 따라 몰래 들어가려고 했다. 이 일념을 사악이 틀어 쥐였는데, 표를 다시 끊을 때 경찰이 나를 붙잡았다. 내가 외지 사람인 것을 알아보고 나에게 사부님을 욕하고 파룬궁을 욕하라고 했다. 내가 욕하지 않으니 그들은 나를 파출소에 데리고 가서 때렸다. 나는 협조하지 않고 아는 체도 하지 않았다. 나는 마음속으로 사부님께서 하신 이 방면에 대한 설법을 생각했다. 그들은 나를 다른 곳으로 옮기려 했다. 차에 앉은 후 나는 몰래 허난성 차표를 방석 밑에 밀어 넣었다. 이곳에는 이미 몇 십 명의 대법제자가 갇혀 있었다. 그 때는 이미 오후 4시였다.
악경은 내 전신을 수색했으나 아무것도 없자 또 성명을 물었다. 나는 한마디도 말하지 않고 마음속으로 『홍음』을 암송했다. 나는 감옥 안에 있는 동수들이 입장하는 것을(당시 나는 정법 구결과 발정념을 모르는 상황)보고 나도 입장했다. 경찰은 나를 한바탕 때리고는 후문으로 내쫓았다.
오후 다섯 시쯤 나는 베이징 서역을 물어 집으로 돌아오는 저녁 표를 샀다. 셋째 날 아침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이틀 밤 자지 못했기에 동수 집에서 한 잠 자고 집으로 들어갔다.
이번에 아들은 감히 떠들지 못하고 몰래 나를 찾으면서 내가 집에 있는지 보곤 했다. 한 번은 아들이 열쇠로 내 집 문을 열고 내가 석유등 아래에서 진상 전단지를 접고 있는 것을 보더니 한숨을 쉬면서 “어머니는 왜 이런 고생을 하셔요, 제가 어머니를 도와 배포할게요”라고 말했다.
정념정행 하니 위덕이 나타나다
나는 퇴직금으로 페인트, 크레용, 분필 등을 사서 포스터를 만들었다. 사부님께서는 내 마음을 보시고 내가 비록 끊어졌다 이어졌다 하며 2년 공부밖에 하지 못했으나 수련 후 뜻밖에도 대법서적과 주간을 통독할 수 있게 하셨고, 내가 분사한 포스터 글은 반듯해 곳곳에 배포할 수 있게 하셨다.
또 악인들이 간이 떨어지게 하는 ‘민감한 날’이 됐다. 듣자하니 610에서 많은 악인을 파견해 지킨다고 한다. 나는 낚싯대와 족자, 페인트 등을 가지고 또 출발했다. 도시 외곽 7리쯤 가서 진상 족자 하나를 낚싯대로 길가 전선대에 걸어 놓았다.(두 줄인 전선에는 걸어 놓을 수 있으나 네 줄 전선에는 걸을 수 없다, 고압선이기 때문에) 사면팔방 개들이 짖어 대고 악인들은 손전등을 켜고 쫓아오고 있었다. 나는 급히 낚싯대를 거두어 변소 옆 풀숲에 감추고 변소 벽에 붙어 서서 꼼짝하지 않았다. 마음속으로는 ‘사부님께 악인들이 나를 보지 못 하게 해주세요’라고 청했다. 악인들의 손전등 불빛이 내 얼굴을 몇 번 스쳐 지났으나 나를 발견 하지 못했다.
악인들이 간 후 나는 또 출발했다. 한 길에서 진상표어를 분사하면서 되돌아와 번화 지역의 한 학교 문 앞에까지 표어를 쓰면서 왔다. 나는 또 거리를 지나가는 전선대에 ‘파룬따파 하오’라는 족자를 걸어 놓았다. 나는 멀지 않은 곳의 홍록색 불이 있는 곳에 당직 경찰차가 서 있는 것을 보았다. 나는 발정념하고 『두려울 것 뭐냐』를 암송하면서 사부님께 가지를 청해 모두 순리롭게 완성한 후 한 바퀴 돌고는 집으로 돌아왔다. 그 주요 도로 십자가 전선대에 걸려 있는 포스터는 반짝반짝 빛났는데 사람들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악인들은 놀라 허둥대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여러 날이 지나서야 사악은 승강기를 가지고 와서 길을 막고, 안간힘을 다해 겨우 그 포스터를 내렸다.
산을 넘고 언덕을 넘으면서 사람을 구하느라 바쁘다
나는 늘 두세 명 동수들과 동반해 차에 앉아 향(鄕)과 진(鎭)가서 차에서 내려 다시 걸어간다. 길을 따라가면서 매우 많은 동수들이 진상을 알렸기 때문에 우리는 인적이 적은 시골마을과 골짜기에 있는 마을에 가서 진상을 알리고 『9평 공산당』과 진상 소책자를 배포했고, 설날 전에는 진상 춘련(春聯)을 주고 마주하고 3퇴를 권했다. 마을 입구 석반과 전선대, 속도랑 입구에는 진상 포스터를 분사했고 진상 족자를 걸어 놓았다. 목이 마르면 산속의 샘물을 한 모금 마셨고, 배고프면 찐빵을 먹곤 했다. 몇 년이 지났으나 매우 많은 포스터는 여전히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는데 어떤 포스터는 유람하는 사람들의 사진에 찍히곤 했다. 이처럼 양호한 환경을 개창했다.
때로는 산꼭대기에 매우 크고 평평한 돌이 놓여 있는 것을 보면 나는 꼭 나뭇가지를 휘어잡고 올라가서 표어를 분사 했고, 때로는 산에서 내려오다가 발을 잘못 디뎌 아래로 굴러 떨어진 적도 있다. 어느 날 날이 어두워지자 이미 보아 두었던 길가의 한 전선대에 포스터를 걸려고 했다. 공교롭게 사람이 오고 있었다. 나는 급하게 옆에 있는 제방 둑에 엎드려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는데 발이 흙탕물 속에 잠겼다. 사람이 지나가기를 기다려 나는 또 일어나서 하던 일을 계속했다.
나는 길을 걸으면서 길옆에 있는 화초나무에게 ‘대법이 좋다(大法好)’라고 알려 주었기에, 우리를 보고 짖어대는 개는 극히 적었다. 어느 날 밤에 나는 전단지를 배포하다가 길을 잃었다. 개 한 마리가 줄곧 우리들을 큰 길까지 데려다 주었다. 또 한 번은 내가 안간힘을 다해 산봉우리에 올라가보니 한 사람도 보이지 않고 소 한 마리가 보일 뿐이었다. 나는 매우 기뻐하면서 헛되게 오지는 않았구나 라고 생각했다. 나는 걸어가서 소에게 진상을 알려 주었더니 소는 ‘음매 음매’하고 우는 것이었다. 나는 “빨리 너의 주인을 불러와 진상을 듣게 하라, 우리는 그를 구도해야겠다”고 말했더니 소는 정말 길게 울었다. 조금 후 주인이 왔다. 나는 그에게 반나절이나 이야기 했으나 그는 믿지 않았다. 사람을 구도하기란 정말 어렵구나, 어떤 사람은 정말 소보다 못하다! 나는 다음번에 그 누가 이 사람을 구도하기를 간절히 희망했다.
어떤 사람은 명백해져 3퇴를 하나 어떤 사람은 자신이 총명하다고 생각하면서 자신은 아무 조직에도 가입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또 어떤 사람은 듣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개를 부추겨 사람을 물게 하겠다거나 신고했다고 큰 소리를 친다. 한 번은 오솔길을 따라 산으로 올라가는데 우리를 추격하는 경찰차가 큰길에서 지나다녔다. 하지만 그 어떤 간난신고도 신의 길을 막지 못한다. 우리 대법제자는 곧 사람을 구도하는 신들이다.
인간과 신의 일념은 하늘과 땅 차이
나는 매일 아침 3시 반에 일어나 연공하고 7시 발정념을 마친 후 법공부를 한다. 매일 적어도 『전법륜』 두 강을 읽는다. 법공부를 하지 않고는 감히 진상하러 나가지 못하는데 두려워하는 마음도 있고 효과도 좋지 않았다.
또 한 번은 나는 표어를 분사할 것만 생각하다 전선대 옆에 있는 깊은 골짜기를 보지 못해 단번에 곤두박질했다. 동수들이 나를 집까지 데려다 주었는데 다리를 움직일 수 없었다. 이틀 간 침대에 누워있었는데, 법을 듣고 발정념했더니 좋아졌다!
작은 딸이 오토바이를 타다가 허리를 다쳐 병원에 입원하게 됐다. 매일 저녁 내가 가서 그 아이를 돌보아야 했다. 나는 늘 표어를 가지고 다녔다. 마음속에서 두 가지 일을 겸해 생각하다나니 사악이 틈을 타고 기어들어왔다. 내가 공안국 울안 벽에 표어를 분사하고 나서 평지에서 곤두박질을 하면서 ‘짝’소리가 났는데 마치 사탕수수 대를 쪼개는 소리 같았다. 나는 발을 삐었다. 나는 이 일체를 아랑곳 하지 않고 발정념하면서 집으로 돌아와 가부좌하고 발정념했다. 이튿날 다리가 크게 부어 바지도 잘 입을 수 없었다. 그러나 나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서 종전과 마찬가지로 병원에 밥을 갖고 갔다. 바짓가랑이를 걷어 올리면서 딸과 사위들에게 보여주었다. 그들은 몹시 놀라 나에게 병원에 가서 검사하라고 했다. 나는 금방 나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나는 사위에게 “그래도 대법이 좋지, 아니면 자네가 두 아이를 돌보아야 하겠는데 바쁜 자네가 되겠는가?”라고 말했다. 사위는 “파룬궁은 정말 신비합니다”라고 말했다. 이틀이 지나 부은 것이 다 나았다.
한 수련생이 골절이 아니냐고 물었다. 나는 말했다. “여하튼 대단히 심하게 넘어졌지만 나는 상관치 않았으며 골절 됐는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 내 머리 속에는 ‘나는 법을 실증하러 온 사람이다!‘라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젊어서는 온 몸이 병투성이였으나 늙어서는 오히려 온몸이 가볍고 무병했다. 젊었을 때는 몸 둘 곳이 없었으나 늙어서는 집도 있다. 비록 집은 작지만 대법이 있기 때문에 역시 반짝반짝 빛난다, 젊어서는 아들딸을 키워야 했으나 늙어서 일인 독거 한다. 마음이 중생과 이어졌으니 고난 속에 낙이 있다. 조사정법 하니 나는 갈수록 젊어지고 갈수록 행복하다!
사부님 감사합니다!
(밍후이왕 제7기 중국 대륙 대법제자 수련심득 교류회)
문장완성: 2010년 11월 6일
문장분류: 수련마당>7회법회
문장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0/11/5/明慧法会–助师正法-我越活越年轻-231943.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