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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운 마음을 갖고 두려움 마음을 버리려고 해서는 안된다

글/ 대륙 대법제자

[밍후이왕] ‘밍후이주간’ 제454기에서 한편 문장 ‘박해를 당하는 것이 두려운 마음이 있어서가 아니다’를 본 후 감수가 비교적 깊었다. “두려움이 나타남은 수련자의 수련 기점이 어디에 있는가에 달렸다. 수련의 기점이 이기심이였다면, 두려운 마음을 수련 중에서 마땅히 버려야 한다. 그것은 두려운 마음에서 박해를 인정한 것이므로 두려운 마음에 숨 돌릴 기회를 주었기 때문이다. 수련의 기점이 남을 위한 것이라면 두려운 마음은 전혀 존재할 수 없다. 그것은 수련의 기점이 바르면 정념이 강하기 때문에 사악은 곧 두려워 할 것이므로 두려움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생각해 볼 때 부처는 우주의 보위자로서 우주 중생을 위해 일체를 지불해야 하므로 그가 무엇을 두려워하겠는가? 새로운 우주의 각자는 새로운 우주의 이치를 수호해야 하므로 더욱 두려울 것이 없다. 여기에 또 그 무슨 박해의 개념이 있을 수 있는가?”

이 단락에서 동수들 중에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두려운 마음을 버리는 형상을 아주 잘 반영했다. 아주 많은 동수들은(나 자신을 포함)들은 두려운 마음을 갖고 두려운 마음을 버리려고 했지만 역시 없애 버리지 못하고 있다. (무의식중에 두려운 마음의 존재는 합리하다고 승인했으므로 두려운 마음이 생존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했다. 바로 자신이 구한 것으로 일부 없애 버렸지만 또 재차 나타난다) 늘 두려운 마음이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고 그 영(靈)은 없어지지 않는데 이것은 모두 우리 자신들이 두려운 마음을 꽉 붙잡고 놓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진정으로 정법 수련의 기점에서 두려운 마음에 대한 인식이 똑똑하지 못해 두려운 마음을 철저히 부정하지 못했으므로 두려운 마음을 생존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양성했다. 무의식중 사악에게 박해 구실을 조성했다. 두려운 마음을 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사악한 환경, 보증서를 쓰고, 세뇌반에 들어감, 노동교양을 당하는 등등의 조성은 모두 우리 자신들이 구하여 구성된 것이 아닌가? 정법의 기점에서 보아야만 진정으로 철저히 두려운 마음을 버릴 수 있다.

그렇다면 대법제자는 필경 사람이 수련하는 것이지 신이 수련하는 것이 아니다. 두려운 마음이 존재는 정상이 아닌가? 천천히 수련하면 되지 않는가? 사실 이것이 바로 두려운 마음에 대한 한 가지 인정이 된다. 두려운 마음은 사람의 관념이며, 구세력은 몇 십 년 동안 온갖 수단을 다해 우리들에게 자신을 보호해야 하고 상해를 받으면 안 된다는 사람의 관념을 주입시켰다. 이 관념은 대법제자 머릿속에 전혀 존재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대법제자는 신의 길로 가기 때문이다. 사람의 물건이 어떻게 능히 신의 일부분으로 될 수 있는가? 당신은 그것을 승인했고, 또 요구했으므로 이것이 바로 당신을 제약하고 통제할 수 있다.

우리의 수련은 반복이 많으므로 아주 힘든 것이다. 사실 종종 우리들 사상의 깊은 곳에는 늘 사람의 관념과 집착이 생존하는 공간이 보류되고 있다. 우리는 마땅히 “반드시 근본적으로 속인의 관념을 개변해야 한다.”(전법륜-논어)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다만 사람으로서 신이 될 수 없다.

개인의 최근 깨달음으로서 부당한 곳이 있으면 자비로운 지적을 부탁한다.

문장발표:2010년 10월 1일

문장분류: 수련마당
문장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0/10/1/23037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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