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란(屹然.중국대륙)
[밍후이왕] 두려운 마음은 진수제자마다 신으로 나아가는 길에서 막다른 고비다. 두려운 마음의 존재 여부는 사람과 신으로 갈라놓는 기준이다. 하지만 정법홍세가 쾌속으로 추진되는 오늘날, 아직도 적잖은 대법제자는 두려운 마음에 시달리면서 자신의 법실증의 길을 걸어내지 못했다. 이는 직접적으로 개인 수련의 상태에 영향 주며 사부님께서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원인이다. 이는 대법제자의 막대한 유감이 아니라 할 수 없다.
두려운 마음을 보류하는 가장 큰 구실은 자신이 박해를 당하게 될까 두려워하는 것이다. 박해를 당한 수련생은 두려운 마음이 있는데 그때 박해를 당하면서 어두운 그림자가 여전히 감싸 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림자 같이 형태 없이 따라다니며 떨쳐버리려 해도 방법이 없어 한다. 박해를 당하지 않은 수련생은 수련생이 박해를 당하는 것을 보고 두려운 마음이 생겨났다. 자신이 걸어 나와 법을 실증하면 박해를 당할까 두려워한다. 다른 한 가지 정황은 어떤 수련생은 박해를 당한 수련생을 ‘동정’하며 두려운 마음이 있는 것은 정상이라고 한다. 다른 사람이 박해를 당하는데 두려운 마음이 없을 수 없다고 한다. 당신이 그렇게 큰 박해를 당해보지 못했기에 당연히 두려움을 모를 것이라고 한다. 동수에게 두려운 마음이 있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다른 사람을 위해 생각하지 않는 것이며 선한 마음이 없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법에 서 볼 때 박해를 당한 것은 우리 개인 수련에서 부족점이 있어 구세력이 꼬투리를 잡게 된 것이며 이로써 박해 구실을 찾아낸 것이다. 그 중 가장 주요 원인은 역시 두려운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두려워할수록 구세력은 더욱 우리에게 두려워하는 물질과 요소를 강화시키며 두려운 마음을 버리게 한다는 구실로 박해를 가중한다. 우리는 마땅히 박해를 부정하는 과정에서 이지를 배워야 하며 성숙으로 걸어 나가야 한다. 엄밀하게 안을 향해 찾아야 하며 자신 수련에서의 부족함을 찾아서 주동적으로 법으로 그것을 귀정해야 한다. 동시에 정념으로 박해가 존재하는 것을 부정하며 우리는 사부님이 관계하시며 수련을 잘한다면 구세력은 어떤 관계도 없다. 사악의 박해는 곧 해체될 것이다.
그럼 우리는 마땅히 동수의 두려워하는 마음을 동정해야 할 것인가? 우리는 두려운 마음은 수련인의 큰 적임을 알고 있으며 우리가 인정할 수 없는 것이며 주동적으로 제거해야 할 것이다. 만일 동수에게 두려운 마음이 있는 것을 동정함이 정상이라면 ‘두려움’의 합리성을 승인하는 것이다. 수련생을 대신해 두려운 마음을 구하게 되는 것이며 그것은 곧 정당하게 동수에게 생존하게 된다. 어떠한 마음을 버리지 않아도 구세력은 곧 훼방하려 하며 그 ‘동정’은 간접적으로 수련생을 해치게 된다. 우리의 동정은 마땅히 수련생이 두려운 마음을 버릴 수 있도록 제고하는 과정이 있도록 허용하는데서 체현되어야 한다. 동수에게 두려운 마음이 있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정상이라고 여겨서는 안 된다. 수련인이 두려운 마음이 있음은 정상이라고 생각하거나 두려운 마음이 있는 것은 피면키 어렵다는 것은 사람의 이치이지 신의 이치가 아니다. 오직 법에서 수련생을 도와야만이 비로소 진정으로 수련생을 위하는 것이다. 수련생을 도와 두려운 마음을 제거해 더 이상 박해를 당하지 않게 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선이다.
두려운 마음을 보류하는 수련생은 바로 두려워하는 마음을 자신으로 간주한 것인데 이는 크게 잘못된 것이다. 한 점은 반드시 명확해야 한다. 두려운 마음은 선천적인 ‘내’가 아니며 사람이 성장하는 과정에 쌓여진 낡은 관념이며 혹은 구세력이 억지로 부어넣은 나쁜 물질로서 우리는 절대로 인정할 수 없다. 반드시 제거해야 한다! 두려운 마음이 폭로됨은 바로 그것을 제거할 좋은 기회가 아닌가? 수련생이 두려운 마음을 보류하려는 생각은 구세력의 속임수에 명중됐다. 구세력은 대법제자가 정체를 이루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며 우리사이에 간격이 형성되는 것을 가장 기뻐한다. 그것은 동수의 두려운 마음을 이용해 정체에 간격을 조성하며 뒤돌아서서 다시 박해의 형식으로 수련생을 ‘도와’ 두려운 마음을 버리게 하려고 한다. 왜냐하면 사악은 곧 나쁜 것이며 독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줄곧 이렇게 해오지 않았던가? 우리는 그 험악한 마음 씀씀이를 간파해야 하며 오직 법의 요구에 따라야만 비로소 가장 안전할 수 있다.
사실 두려운 마음을 보류하고 있는 동수의 내심은 괴롭기 그지없다. 마치 사람이 머리가 아플 때 主意識가 아프면 副意識도 따라서 아파하는 것과 같으며 아프기 그지없는 것이다. 그럼 우리의 주체가 두려워하면 우리 미세한 세계 중에 무량무계한 생명은 모두 따라서 고생스럽고 두려워하게 된다. 그것은 하나의 거대한 천체가 모두 우리 사람의 이것을 버리지 못함으로 고생하게 되는 것이다!
두려워하는 마음은 우리의 수련에 큰 손실을 가져다준다. 두려운 마음은 우리에게 진상자료를 배부하지 못하게 하며 진상을 알려 사람을 구도하지 못하게 하고 동수와 접촉하지 못하게 한다. 심지어 편지함을 이용해 타지 동수와 연계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직접적으로 혹은 간접적으로 동수사이에 간격을 조성했으며 동수와 협력하지 못하게 한다. 굳건하며 무너뜨릴 수 없는 정체를 이루지 못하게 하며 오직 정체의 작용을 떨어뜨리는 역할을 한다.
두려운 마음은 우리에게 예상치 못한 위험을 가져다주며 두려운 마음을 보류하는 동시에 이미 무형의 박해를 당하고 있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당신이 두려워하면 그놈은 와서 붙잡을 것이요, 생각이 바르면 사악은 무너지리”(홍음 2-두려울 것 뭐냐) 개인의 체득으로 이 붙잡는다함은 정말로 붙잡히게 되는 것뿐이 아니라 사악이 수련생이 집착해 놓지 않는 사람 마음을 붙잡고 소위 고험을 진행해 끝없이 박해를 강화하는 것이다. 두려운 마음을 하루 버리지 못하면 사악은 곧 구실이 있어서 우리는 하루 더 교란할 것이다. 심지어는 교란이 더욱 심해질 것이며 악성순환을 형성하게 된다.
두려운 마음에 협력하는 동시에 이미 마난 속에 처하게 된다. 두려움 마음의 시달림을 인정함도 ‘사람’의 것을 너무 중하게 보는 것이며 사부님의 가르침은 그저 아름다운 신화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하루에 3~5강의씩 법공부하나 관건적인 시각에 사부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다면 어찌 대법의 무변의 법력을 실증할 수 있겠는가?
대법제자로 놓고 말하면 두려운 마음은 사악이 우리를 박해할 때 가설한 일종 환상에 불과하다. 생각해보라, 신이 무엇을 두려워하겠는가? 오직 사람이라야 두려울 수 있다. 우리는 신으로 성취되려 하며 사람 마음을 버려야 한다. 두려운 마음에 견주어 우리는 전문적으로 발정념으로 그것을 제거할 수 있다. 매일 일정한 시간을 내어 자신의 사상 중에 신체 내와 공간마당에 존재하는 일체 두려워하는 물질과 요소를 깨끗이 제거하면 곧 자신의 변화를 느낄 수 있으며 수련상태가 호전되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두려운 마음은 곧 깨끗이 제거될 것이다. 정법수련 최후의 단계에 일체는 모두 중생구도에 길을 열어야 하는데 구세력이 강화한 두려운 마음은 아무것도 아니다. 두려운 마음을 버림은 물건 위에 쌓인 먼지를 털어버리듯이 쉬운 일이다.
두려운 마음이 있는 여부에서 수련자의 개인 수련의 기초와 기본기가 체현될 수 있다. 한 사람이 얼마만큼 대법에 동화되면 곧 착실히 수련하는 과정에 얼마만큼 다른 사람을 위하는지가 나타나게 된다. 마음속에 자신을 생각하는 비중이 많을수록 많게 적게 두려운 마음이 있게 된다. 왜냐하면 당신의 심념(心念)의 근원은 위사이기 때문이다. 마음속으로 다른 사람을 많이 생각할수록 새로운 우주의 특성과 새로운 우주의 이치에 더욱 부합된다. 생명에 더는 ‘두려움’이 설 자리가 없게 된다.
두려운 마음이 있는 여부는 수련자의 수련기점이 어디에 있는지 나타난다. 수련의 기점이 위사이면 두려운 마음은 수련과정에 천천히 닦아버려야 할 것으로 여긴다. 이는 두려운 마음과 박해를 승인하는 것이며 자연히 두려운 마음에게 숨을 부지할 기회를 주게 된다. 수련의 기점이 위타이면 두려운 마음은 근본적으로 존재하지 말아야 하는 것으로 여기게 된다. 수련 기점이 바르다면 정념은 곧 강해지며 사악은 곧 두려워한다. 자연히 두려운 마음을 보류할 문제가 존재하지 않는다. 생각해보라, 부처는 우주의 보위자이다. 능히 우주의 중생을 위해 일체를 지불할 수 있다. 그가 무엇을 두려워하겠는가? 새로운 우주의 각자는 새로운 우주의 이치를 지킨다. 더욱 두려워하는 것이 없다. 어디에 그러한 박해를 당할 개념이 있겠는가?
정법수련의 최후에 사악은 일찍이 깨끗이 제거되어 얼마 남지 않았다. 대법제자로서 독안에 든 것처럼 앞뒤를 재고 조심스러우며 이것저것 의심한다면 어찌 위대한 사존의 제자로 될 수 있겠는가? 어찌 천국을 주지하며 중생을 선화할 수 있겠는가? 만일 우리가 아직도 두려운 마음을 고수하고 놓지 않고 감히 걸어 나와 사부님의 정법을 돕지 않고 자신의 사전의 큰 소원을 실현하지 못하면 우리는 곧 이 만고의 기연을 잃게 되며 자신을 훼멸시킬 수 있다. 또 무량무계의 중생을 훼멸시킬 수 있으며 그것은 생명의 영원에 있어서 도저히 미봉할 수 없는 통한과 유감으로 남게 될 것이다!
박해를 당한 적이 있든지 없든지 두려운 마음을 보류하는 구실은 자신이 박해당할까 두려워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세상에서의 소위 행복과 아름다움을 생활을 잃을까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러나 박해를 당함은 절대 대법제자가 두려워하는 마음을 보류할 수 있는 정당한 이유와 구실로 될 수 없다!
문장발표: 2010년 9월 20일
문장분류: 수련마당
문장위치: http://minghui.org/mh/articles/2010/9/20/229875.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