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우한 (武漢)대법제자 원위(文玉)
[밍후이왕〕우리 지역 몇 명 대법제자들이 병업 가상의 박해를 비교적 엄중히 받고 있는 상황에 근거해 나는 개인이 전면적으로 병업 가상 박해를 부정한 약간의 체험을 말하려 한다. 마난 중에 있는 동수들에게 약간의 계시가 있기를 희망한다.
나는 10여년 수련한 노제자다. 법을 얻기 전에 몸에는 위장병, 심장병, 장염, 관절염 등 여러 가지 질병이 있었는데, 수련 후 신체는 병이 없이 온 몸이 가벼워졌다.
정법 수련에 진입한 후 갑자기 어느 날 나는 가슴이 몹시 아팠다. 매일 오전 11시가 되면 배고픈 느낌이 있었으나 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면서 배가 고파서 그렇겠다고 생각했다. 이후에는 10시가 되면, 마지막에는 밥을 금방 먹었는데도 배가 고파 무엇을 또 먹고 싶었다. 가슴은 갈수록 불편했는데 밤에 진상자료를 배포할 때면 가슴이 더욱 아팠고, 때로는 허리도 펼 수 없었고 걷기도 힘들었는데 내가 법을 실증하고 중생을 구도하는 것을 심하게 교란했다. 이때 나는 비로소 내가 법을 실증하는 것을 직접 교란하는 것은 구세력이 안배한 것으로 전면 부정해야겠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그리하여 나는 안을 향해 찾았다: 무엇 때문에 사악이 나의 ‘병업’이란 이 가상의 틈을 타고 들어올 수 있는가? ‘병업’에 대한 법리가 똑똑하지 못해서 인가? 수련인으로서 법에 따라 참답게 수련하지 않아서가 아닌가?
1. 자신의 근본 집착을 정확히 인식하고 수련의 기점을 바로 잡아
처음 가슴이 아플 때 나는 “모두 자신이 법공부를 잘하지 않은 탓이다. 특히는 연공을 제대로 하지 못했는데 연공을 잘하면 가슴이 아프지 않을 것이다”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생각은 사실 간접적으로 연공을 질병 제거로 간주한 것이 아닌가? 표면에서 안을 향해 찾는 것은 정진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사실 정진은 병을 제거하기 위해서다. 이러한 생각은 사실 간접적으로 연공을 질병 제거로 간주한 것이 아닌가? 이것은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그 마음속에는 ‘내가 연공만 하면 사부님께서 반드시 나의 병을 제거해 줄 것이다’라고 여전히 생각하고 있다. 당신은 보라. 그의 마음속에 깊이 숨어있는 그 조그마한 것이 여전히 있다. 그는 아직도 나에게 그의 병을 관여해 달라고 생각하는데, 다시 말한다면 아직도 그의 병에 집착하고 있는 것이다.”(스위스 법회설법)
사존께서는 『원만을 향해 나가자』에서 말씀하셨다. “집착을 갖고 법을 배우는 것은 진정한 수련이 아니다. 하지만 수련 중에서 자신의 근본적인 집착을 점차적으로 인식하고 그것을 제거할 수 있다. 그리하여 수련인의 표준에 도달할 수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근본 집착인가? 사부님께서는 경문에서 또 이야기 하셨다. “이후에 책을 보고 법을 배우며 정진하는 중에서 자신이 입문 시에는 어떤 생각으로 대법에 들어 왔는지 똑똑히 인식해야 한다. 한 동안 수련을 했는데도 아직도 당초 생각인지, 사람의 이 한 마음이 비로소 자신을 여기에 남아 있도록 한 것이 아닌지? 만약 이렇다면 나의 제자로 여길 수 없다. 이것이 바로 근본적인 집착심을 제거하지 않은 것이며 법에서 법을 인식하지 못함이다.” 법으로 대조하면서 나는 가슴에 손을 얹고 자문했다. 나는 연공하면 병을 제거할 수 있다는 마음을 가지고 수련에 들어 왔다. 그런데 수련을 이렇게 오래 했는데도 아직도 근본 집착을 제거하지 못했으니 그래도 진수제자인가? 사부님께서는 수련인을 관여하신다. 이렇게 엄숙한 문제를 나는 반드시 바로 고쳐야 한다. 대법이 비록 병을 제거하고 신체를 건강하게 하는 신기한 효과가 있지만 대법은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수불수도하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매번 신체에 좋지 않은 상태가 나타날 때면 여전히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법공부와 연공을 질병 치료 형식으로 간주했다. 그리하여 나는 즉시 자신의 법공부와 수련 기점을 바로 잡았다.
2. 안을 향해 찾으면서 씬씽(心性)을 제고
정법 수련 십 몇 년 간, 진상을 알리는 과정에서 형성된 습관성적인 설명, 해석으로 인해 나는 저도 모르게 자신을 참답게 수련해야 함을 소홀히 했다. 그리하여 생활 중에서도 해석하기 좋아했고, 상대가 오해할 때는 억울함을 당할까 봐 두려워 동수들을 향해 해석하곤 했다.
사부님께서는 『로스앤젤레스시 설법』에서 말씀하셨다. “수련이란 바로 안을 향해 찾는 것이라 맞든 맞지 않든 모두 자신을 찾아야 하며 닦음이란 바로 사람의 마음을 닦는 것이다. 늘 지적과 비평을 받아들이지 않고 늘 밖을 향해 지적하며 늘 다른 사람의 의견과 비평을 반박하는 그것이 수련인가? 그것이 어떻게 닦는 것인가?” 사부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이것은 우리 정체적인 형세 중에서 이미 상당히 두드러졌는바 어떤 사람은 이미 전혀 건드릴 수 없는 정도에 이르렀기에 내가 보건대 더 이야기하지 않아도 안 됐다. 어떤 사람은 바로 그 성냥처럼 긋기만 하면 불이 붙는다. 마치 그 지뢰와도 같아 밟기만 하면 소리가 난다. 당신은 나를 말할 수 없는데 나를 말한다면 안 된다. 어떤 의견도 듣지 않으며 선의(善意)적이든 악의(惡意)적이든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일률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며 더욱이 안을 향해 찾지 않는데 상당히 엄중해졌다.” “절대 주의해야 하는데, 지금부터 시작해서 누가 다시 남더러 말을 못하게 한다면 그가 바로 정진하지 않는 것이며, 누가 다시 남더러 말을 못하게 한다면 그는 바로 표현한 것이 수련인의 상태가 아닌데 최저한도로 이 한 점에서 말이다.”(로스앤젤레스시 설법)
사부님의 이 한 단락 법이 나에 대한 촉동은 매우 컸다. 평소 자신의 사업이 비교적 바빠 법공부가 비교적 적으며, 가족들이 나를 억울하게 대하면 나는 마음이 불쾌했다. 특히 가족들이 모종 일로 나를 오해 할 때면 마음이 아주 불쾌했고 큰 소리로 욕할 때면 내 마음은 뒤집어지는 것 같았다. 심지어 오랫동안 욕하게 되면 너무 화가 나서 그들과 대들면서 맞받아 욕을 하고 싶었다. 이것이 수련인의 상태인가? 나는 욕해도 대꾸하지 않고 때려도 맞받아치지 않음을 했는가? 비록 입으로는 대꾸하지 않았지만 마음은 평형되지 못했고, 때로는 이 때문에 눈물도 흘렸는데 이것이 수련인의 상태인가? 눈물을 머금고 참는 것은 우려하는 마음을 집착하는 참음이다. 전혀 화를 내고 원망하지 않으면서, 억울하다고 느끼지 않으면서 참는 것이야 말로 수련인의 참음이다. 이로 인해 나는 자신이 중생을 구도하는 정법 수련 중 얼마나 많은 일을 했던 지를 막론하고 만약 개인 수련의 제고를 소홀히 한다면 그 역시 다만 속인이 德을 쌓으면서 좋은 일을 하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만약 수련인의 기본 요구 “때려도 맞받아치지 않고 욕해도 대꾸하지 않는다”를 하지 못하면 그는 곧 속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됐다. 사부님께서는 수련인을 관여하는 것으로서 수련인이 사부님의 요구에 따라 하지 않는다면 곧 구세력의 안배한 길을 걷게 되며, 그렇게 되면 매우 위험할 것이다.
이러한 것들을 명백히 한 후 나는 절대 개인 수련을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꼭 법을 스승으로 모시고 그 어떤 대법 일을 하던지 씬씽(心性)을 지켰다. 내가 파악한데 근거하면 엄중한 병업 박해를 받고 있는 많은 동수들은 개인 수련을 소홀히 하여 사악이 틈을 타고 기어들어 온 것이다.
3. 이른바 ‘병업’의 배후는 영체라는 것을 명확히 인식하고, 그것을 승인하지 말아야 하며 아울러 정념으로 그것을 해체해야 한다
처음 가슴이 불편할 때, 나는 심하지 않으니 신경쓰지 않았다. 그리하여 사악이 틈을 타고 기어들어 왔는데 이후에는 끝임없이 교란했다. 이 과정이 길어지자 내 머릿속에는 하나의 염두가 반영됐다. ‘내 심장병이 아직도 낫지 않았을까? 위장 어디에 문제가 나타나지 않았을까?’ 이후에 나는 다시 생각을 돌렸다. ‘나는 수련인이기에 병이 없다. 표현 되는 것은 가상이고, 병업 상태로 표현되는 배후는 영체가 있을 뿐이다.’ 사부님께서는 일찍 『전법륜』에서 말씀하셨다. “우리 가장 보편적인 것을 말하자. 사람이 어디에 종양이 자랐거나, 어디에 염증이 생겼거나, 어디에 골질증식이 생겼다는 등등이다. 다른 공간에는 바로 그곳에 한 영체가 엎드려 있고, 하나의 아주 깊은 공간 중에 한 영체가 있다.” 이로부터 나는 ‘병’ 그 자체도 ‘병’아니며, 다만 속인 이층 분자의 사람이 본 표현으로서 병업의 배후에는 하나의 깊은 공간 마당에 검은 영체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그리하여 나는 수불수도하는 사람으로서 절대 그 ‘영체’에 의해 좌우지 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이것은 ‘영체’이지 내가 아님을 명확히 했다. 그것은 가슴이 아플 때 나로 하여금 이전처럼 무엇을 먹게 하려고 망상했는데 나는 절대 협조하지 않았고 얼마나 아파도 그것을 배제했고, 그것은 또 나를 집에 가서 누어있게 하려고 했지만 나는 절대 눕지 않았으며, 내가 진상을 알리는 것을 교란하려 했지만 나는 오히려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하고 돌파했다.
사부님께서는 일찍 『2003년 정월 대보름 설법』에서 말씀하셨다. “그때 나를 얼게끔 하는데 대해 나는 별도의 방법이 있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당신이 춥게 하려는가. 당신이 나를 춥게 하려고 하고 당신이 나를 얼게끔 하려고 하지 않는가? 나는 당신보다 더 춥다. 내가 당신을 얼려 버리겠다.” 이로부터 나는 깨달았다. ‘네가 나를 먹게 하려 하지만 나는 절대 먹지 않고 너 영체를 굶어 죽이겠다. 나는 더는 이전처럼 네가 틈을 타고 기어드는 것을 중시하지 않거나 소극적으로 대응해서 인위적으로 너를 자양시켜 갈수록 창궐하게 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부터 나는 행위로부터 너를 제지할 것이다. 나는 또 자신은 수불수도 하는 사람이므로 우주의 일체사악을 때려 부수는 능력이 있고, 이 작은 영체는 손가락으로 비빌 나위에 불과하니 대단하지 않다.’ 이처럼 정념이 나오자 사악은 매우 빨리 해체됐고, 가슴 상태도 정상으로 회복돼 세 가지 일을 더욱 잘해 더욱 많은 중생을 구할 수 있었다.
이상은 제 자신이 구세력이 강요한 병업 박해를 돌파한 약간한 체험이다. 마난 중에 있는 동수들에게 약간한 도움이 되기를 희망한다. 본인의 층차 제한으로 부족한 면이 있을 수 있기에 동수들의 자비로운 시정이 있기를 희망한다.
문장 완성: 2010년 9월 21일
문장 분류: 수련 마당문장 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0/9/21/22988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