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청진(程锦)
[밍후이왕 2010년 8월 15일] ‘병업’에 관한 이 화제는 정말 늘 하는 말이다. 그러나 정말 병마에 직면하면 상황은 다른데, 어떤 수련생은 잘 하여 병마를 모두 이길 수 있었고, 어떤 이는 관을 넘지 못해 생명을 잃었고, 또 어떤 이는 장기적인 병업 속에서 시달리고 있다.
오늘 내가 말하려는 것은 병업 문제에 대해 우리는 정말 소흘히 여길 수 없다는 것이다. 바로 나를 말해보자. 수련 전 피부병이 있었는데 많은 약을 사용 했어도 줄곧 좋았다, 나빴다 했다. 수련 후 비록 병업의 반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오성이 차하여 줄곧 얼굴, 목에만 나타나면 약물을 발랐으며, 속으로 수련하니 병이 아니다 약을 바르지 말아야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장기간 약물에 의지했기에 이미 습관이 되어 늘 그것을 떠날 수 없었다. 어느 날 농문을 열다가 부 주의로 약병을 쏟는 바람에 비로소 그 약을 쓰지 않기로 결정했다. 비록 약을 쓰지는 않으나 마음은 전부 놓지 못했다. 그러므로 피부에 돋은 발진(發疹)환부가 오늘은 가라앉았다 내일은 또 돋았다. 그렇게 아프지도 않고 가렵지도 않아 그대로 방치 하는 상태가 됐는데, 그렇게 되자 결국 피부 발진에게 생존의 공간과 환경을 준 꼴이 됐다.
2001년 주위 동수들은 내게, 집에 일이 너무 많고 시끄러움도 많다고 하면서, 모든 원인을 전부 나의 표면으로 밀어 넣는 언사를 했다. 그러나 나는 이를 부정하지 않고, 당시 그대로 동수들의 말을 묵인했던 것이다. 뒤늦게 깨달은 일이지만 그런 동수들의 바르지 못한 언사가 있으면 즉시 바로잡아 인정하지 말아야한다. 결국 동수들의 그 같은 언사가 나에 대한 교란과 시끄러움이 표면에로 밀려나와 온 몸 피부로 폭발하여 발진이 퍼졌다. 정말 몸은 온전한 피부가 없고, 면목이 없었다.
한 번은 언니의집에 갔는데, 당시 마음은 말할 수 없이 괴로웠다. 피부는 참을 수 없이 가렵고, 매 번 꿈에서 가려워 깨면 속옷은 핏자국으로 얼룩덜룩했다. 출근하면 직장 동료들의 의아한 눈길 앞에서 나는 몸 둘 바를 몰랐다. 사람을 만나는 것을 두려워 할 뿐만 아니라, 수련생을 만나기가 더 두려웠다. 자신의 나쁜 상태가 동수에게 영향을 끼칠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사실 이 같은 자신의 생각은 틀렸었다. 응당 주동적으로 수련생을 찾아 함께 법공부하고 발정념하여 동수들의 강대한 정념 장에서 그것을 해체하고, 소각해야 했던 것이다.
그 기간 나는 퇴근하여 집에 돌아가면 법공부하고 또 하면서 추호도 소홀하지 않았다. 매번 앉았다 설 때 피부는 갈라 터지는 것처럼 아팠다. 그러나 나는 시종 강경하게 사부님을 믿고 법을 믿었고 자신이 수련 인이라는 것을 믿었다.
사부님께서는 “진정한 겁난(劫難) 중에서 또는 관(關)을 넘는 중에서 당신은 시험해 보라. 참기 어려운 것을 당신은 참아 보고, 보기에 안 되고 행하기 어렵다고 하는 것을 그러면 당신이 한번 시험해 보라. 도대체 행할 수 있는가 없는가를. 만약 당신이 정말로 해낼 수 있다면, 당신은 정말로 고난 속에 광명이 있음(柳暗花明又一村)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고 말씀하셨다.《전법륜》 나는 매일 사부님의 이 단락 법을 생각하고 외우면서 약 먹지 않고 바르지 않았으며, 뼈에 사무치는 괴로움 속에서 걸어 나왔다. 그 때로부터 나는 약과 결연했고, 옹근 석 달간 경험으로 피부병은 드디어 나았다.
우리의 어떤 수련생은 늘 ‘병업’에 구속되어 병업이 오기만하면 그 때서야 자신의 누락을 찾기 시작하고, 새롭게 세가지일도 평시보다 더 잘한다. ‘그래, 우리들은 마난 속에서 관을 넘을 때에만 비로소 용맹정진 해야겠다고 생각하는가? 무엇 때문에 피동적으로 감당하고 낡은 세력에게 끌려가야 하는가? 그래 우리는 정말 피동을 주동으로 바꾸어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가?’
한 수련생은 겨우 30여세인데, 자신의 눈이 침침하여 바로 보이지 않는다고 말 하고, 또 어떤 수련생은 귀가 들리지 않는데도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을 보았다. 우리는 진정 정념으로 응당 그것을 부정하고 다시 그것에게 자양할 공간과 환경을 주지 말아야한다. 그래 우리는 병업에 직면했을 때 스스로 바로 잡지 못한단 말인가? 우리는 신의 길에서 걸어가는 대법제자라고 말하고 있지 않는가? 무엇 때문에 자신의 소소한 문제에 대해 이토록 나약하고 속수무책인가? 사부님께서는 “한 부처가 손을 한 번 휘저으면, 전 인류의 병이 모두 없어지는데, 이것은 보증하고 해낼 수 있다.” 《전법륜》 “사고 중에서 사람의 관념을 이용할 것인지 아니면 수련자의 정념을 이용할 것인지에 따라 해낸 일의 결과도 같지 않은 것이다.” 고 말씀 하셨다. 《》
병이 없을 때는 각종 구실을 찾아 산만하고 게으르며, 병이 있으면 병을 에워싸고 돈다. 우리는 오늘 수련하며 조사(助师)정법하여 사부님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자고 결정했으므로 운명은 개변되었다. 한 속인이 “파룬따파는 좋습니다.” 라고, 한 마디해도 병업이 전부 소멸되고, 난에 봉책하면 길상하게 된다. 그도 그가 가지려는 것을 선택했으므로 사부님께서 그를 도왔다. 그럼 무엇 때문에 ‘병업’에 직면했을 때 우리는 벌벌 떨면서 자신의 선택과 수요 하는 것을 감히 요구하지 못하고, 어쩔 수 없다고 나타내는가? 우리는 낡은 세력을 부정하는 동시에 응당 진정으로 자신의 몸 인 소우주를 주재해야한다.
우리는 응당 정신을 차려야한다. 어떤 부면적인 요소에 직면하든지 우리는 모두 정념으로 그것을 부정하고 소각하고 대법제자의 신통을 발휘하여, 병업의 속박에서 벗어나 용맹정진하고 세 가지 일을 잘해야 한다.
자신의 작은 경험이니 부당한 곳은 동수님께서 자비로 시정하기 바란다.
문장발표 : 2010년 8월 15일
문장분류 : 수련마당
문장위치 :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0/8/15/228366.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