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후난성 천저우(郴州)시 대법제자
[명혜망] 1994년 7월 15일부터 18일까지, 존경하는 리훙쯔(李洪志) 사부님께서 천저우에 오셔서 설법하시고 공을 전하셨는데, 이는 진정 만고의 기연(機緣)이었고 부처님의 자비였습니다.
93년에 사부님의 설법을 들었던 천저우의 4명의 수련생들은 너무나 좋다고 여겨 사부님을 천저우로 모셔 와 더 많은 선량한 사람들이 혜택을 받게 하려고 했습니다. 94년 1월 6일, 그들은 천저우 기공협회의 소개장을 갖고 광저우 학습반에 참가해 사부님께 천저우에 와주시기를 요청했습니다. 몇 차례 요청 끝에 사부님께서 동의하셨습니다.
며칠 후 벽에 94년 사부님의 전국 강연 일정표가 붙었는데, 그것은 연초부터 연말까지 빼곡히 짜여 있어 하루의 여유도 없었습니다. 천저우 일정은 처음에 7월 7~12일로 잡혔고, 그전에는 정저우, 지난(濟南)이, 그 후에는 광저우, 하얼빈이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그 표를 보니 사부님의 고단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중생을 위한 거대한 감당은 속인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천저우는 교통이 불편해서 사람이 너무 많으면 다녀오기 힘들어 사회에 부담을 주고 개인의 일과 생활에 영향을 줄 수 있었습니다. 사부님께서는 정저우 학습반에서 이미 책임자에게 천저우에는 너무 많은 사람이 가지 말라고 하셨고, 귀가 시간에 영향을 주어 일에 지장을 줄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천저우 학습반에는 900명만 참가했습니다. 수년이 지나서야 우리는 사부님의 이런 사회에 대한 책임감, 사람에 대한 책임감, 모든 것을 중생을 위해 생각하시는 홍대한 자비와 그 무한한 법력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천저우 파룬궁 학습반 직전에는 지난 학습반이 있었는데, 지난 학습반이 시작되기 전에 예상치 못한 변화가 생겨 원래 계획했던 한 반이 두 배로 늘어 1만 명이 넘게 됐습니다. 사부님께서는 한 사람도 법 얻는 기회를 놓치지 않게 하시려고 즉시 두 반을 동시에 진행하셨습니다.
그래서 천저우 파룬궁 학습반은 며칠 미뤄졌습니다. 지난 학습반이 끝나자마자 사부님께서는 휴식도 없이 비행기로 창사에 오셨고, 천저우 수련생들이 차로 모셔 왔습니다. 천저우 수련생들은 이미 다 모여 사부님의 학습반을 학수고대하고 있었습니다.
1994년 7월 15일, 사부님께서는 미소를 지으시며 풍채 넘치는 모습으로 천저우 학습반 강단에 올라 천저우에서 법을 전하기 시작하셨고, 불광이 천저우를 비추었습니다.
사부님께서 천저우에 계셨던 그날들을 우리는 영원히 잊을 수 없습니다. 사부님께서는 4일간 주야로 연속 강의하시어 9강 강의를 모두 마치셨습니다. 첫날 강의 때 제가 사부님의 설법 소리가 작다고 생각하자마자 사부님께서 바로 말씀하셨습니다. “소리가 너무 작나요? 잘 안 들리시나요?” 그러자 스피커 소리가 즉시 우렁차게 들렸습니다. 당시 저는 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사부님께서 아셔서 신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부님께서 천저우에 계신 며칠 동안, 우리는 원래 사부님의 생활을 돌보고 빨래를 해드릴 사람을 배치했지만 사부님께서는 누구에게도 이런 일을 부탁하지 않으셨습니다. 빨래를 해드리겠다고 여쭐 때마다 이미 다 했다고 하셨고, 식사하시겠냐고 여쭈면 항상 이미 드셨다고 하셨습니다. 수련생들이 보낸 물건들도 그대로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호텔 직원들조차 세상에 이렇게 좋은 사람이 어디 있느냐며 감탄했습니다. 사부님께서는 언제 어디서나 항상 남을 배려하셨고 방은 깨끗이 정돈되어 있었으며 이불도 반듯하게 개어 두셨습니다.
학습반 수강료도 가장 낮았습니다. 처음에는 50위안을 받았는데 사부님께서 책임자와 계속 상의하셔서 돈을 돌려주자고 하시다가 나중에는 겨우 25위안만 받았습니다. 제가 전에 다른 기공을 배웠을 때는 그 기공사들이 학습반을 열면 돈을 최대한 많이 받으려 했고, 선물도 적게 주면 안 되고 손님 대접도 해야 했으며, 떠날 때는 또 돈 봉투와 선물을 받아갔습니다.
사부님께서는 빈손으로 천저우에 오셨다가 빈손으로 떠나셨습니다. 학습반에서 받은 수강료로 장소 대여비와 기공협회에 낼 돈을 내고 나니 몇천 위안이 남았는데, 사부님께서는 천저우 보도소가 막 설립되었으니 이 돈을 천저우 보도소에 주겠다고 하시며 결국 한 푼도 가져가지 않으셨습니다.
1999년 7월 20일, 사악한 중국공산당이 파룬궁을 박해한 후 사부님께서 돈을 긁어모았다고 날조했습니다. 후난성 610 공안처의 한 처장이 사부님께서 돈을 긁어모았고 천저우에서 얼마를 가져갔다는 등의 말로 대중을 속였습니다. 우리 몇 명이 사부님을 배웅하러 갔을 때 우리는 빈손으로 갔는데도 사부님께서는 매우 기뻐하시며 수박 하나를 사서 손으로 깨서 한 사람당 한 조각씩 나눠주셨습니다. 신기하게도 깨진 수박 개수가 사람 수와 딱 맞았습니다.
천저우를 떠나는 기차에 오르시는 그날 저녁에도 사부님께서는 여전히 수련생들에게 동작을 가르치시며 손수 수련생들의 동작을 교정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4일간 사부님께서는 되도록 수련생들이 제기한 모든 요구를 들어주셨습니다. 수련생들이 사진을 찍고 싶어 하자 몇 개 조로 나눠서 모두 사부님과 단체 사진을 찍었습니다.
한 소규모 좌담회에서 한 수련생이 새로 산 카메라로 사부님 사진을 두 장 찍었습니다. 사부님께서 그만 찍으라고 하셨는데도 그 수련생은 계속 찍었고, 결국 한 장도 찍히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저는 이것이 우리의 환희심을 없애기 위함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수련생들이 사부님과 함께 식사하기를 원해서 사부님께서는 함께 식사하셨는데, 식사 중에 한 수련생이 밥이 좀 부족한 것 같다며 식당 직원을 시켜 큰 그릇에 국수를 더 가져오게 했습니다. 사부님께서는 매우 미안해하시며 사람들에게 너무 폐를 끼쳤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사부님께서는 기차에 오르신 후에는 그냥 서 계셨습니다. 좌석을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신 것입니다.
학습반 이후 천저우에서 파룬궁을 수련하는 사람 수가 급격히 늘어나 99년 초에는 천저우 시내에만 42개의 연공장이 있었고, 가장 큰 연공장에는 매일 100~200명이 연공했으며, 가장 많을 때는 300명이 넘었습니다. 천저우 전체 지역에는 거의 3만 명이 연공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좋은 사람이 되려 노력했고, 모두 건강해졌으며, 사회 전반적으로 사람들의 마음이 선(善)으로 향하고 도덕이 향상되었습니다!
원문발표: 2010년 7월 5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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