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대륙대법제자
[밍후이왕 2010년 6월 14일] 대법제자들의 교류는 법리를 교류하는 것이기에 나는 자신의 문장이 어떻다고 지적받는 것도 꺼리지 않는다. 아래에 자신이 경험한 일에 대해 반성해 보려고 하는데 만약 틀린 것이 있다면 동수들이 자비로 시정해 주기 바란다.
내 고향의 한 여성 수련생은 사악에게 납치되어 감옥에 갔었는데 정념으로 박해를 제지했다. 나중에는 병업 상태가 나타났는데 무엇을 먹기만 하면 토했고 더 악화되어 피를 토했으며 몸은 극도로 허약해져 석방되어 집에 돌아왔으나 여전히 상태가 변화되지 않았다. 많은 동수들이 늘 그의 집에 가서 발정념을 하고 법공부를 하였지만 장기간 개변되지 않았다. 후에 그 수련생은 심태가 나빠졌고 주의식이 약해져 누가 무슨 말을 하든지 다 들었는데 심지어 기발한 것을 내세워 자신을 과시하는 자들이 사부님께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등등을 하게 했다. 최후 그 수련생이 죽음에 이르렀을 때 다른 동수들은 그가 안 된다고 판단하고 소원을 들어준다며 그녀를 고향에 보냈는데 그곳의 환경은 대법제자가 없었고 결국 죽음을 재촉하는 결과가 되어 버려 그는 아주 빨리 세상을 떠났다.
반년이 지나 나는 고향을 떠나게 되었다. 당시 이 일에 대하여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사부님의 요구에 의하면 이 일을 보게 된 사람도 자신에게 대조하여 찾아봐야 한다고 하셨다. 때문에 나는 속으로 줄곧 사고했으며 그가 세상 떠난 지 일 년 후에야 법공부 중에서 완전히 이해하게 되었다.
아래에 내가 깨달은 것을 이야기하겠다. 당시 우리 주위의 동수들은 모두 그가 정념으로 구세력의 배치를 부정하고 감옥에서 걸어 나왔고 아주 잘했다고 여겼다. 후에 나는 깨닫게 되었는데 사실 우리들은 (그를 포함하여) 모두 속았던 것이다. 납치는 사악이 배치한 것인데 전부를 다 부정하는 것을 우리는 진정하게 해내지 못했던 것이다.
개인 수련의 단계에서 병업 상태가 나타나면 우리들은 그것을 마난魔難으로 인식한다. 법공부하고 안을 향해 찾으며 견정히 믿고 그것을 완전히 배척하며 완전히 없어 질 때까지 청리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1999년 7.20 이후 우리의 일부 수련생들은 도리어 ‘누구누구가 정념으로 박해를 해체하는 과정에서 휘황한 경력을 써냈다.’는 이런 관념에 집착하게 되었다. 당시 많은 동수들은 모두 누구누구가 정념으로 감옥, 노교소, 세뇌반에서 걸어 나온 행위에 고무되었다. 오직 앞당겨 나오기만 하면 곧 잘한 것으로 인정하였는데 사실은 미혹 중에서 수련하는 우리들에게 구세력의 요소가 속임수를 썼던 것이다. 예를 들자면 수련에 장기간 누락이 있어도 개변하지 않는 수련생을 감옥, 노교소 혹은 세뇌반에 감금시켰지만 우리들의 머릿속에는 응당 ‘걸어 나온다’거나 ‘뛰쳐 나온다’는 승리의 관념이 없어야했다. 왜냐하면 잡히고 감금되는 것은 우리들이 걸어가야 하는 길이 전혀 아니기 때문이다.
잡혀 들어간 것은 본래 구세력의 길을 걸은 것이고 걸어 나왔다는 것은 바른 길로 돌아온 시작일 뿐이며 단지 조건이 되어 (병보석) 구세력이 배치한 감옥의 재앙을 벗어나 막 사부님이 배치한 길로 돌아오기 시작한 것일 따름이다. 철저히 구세력의 배치를 벗어나 계속 사부님이 배치한 길을 걸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은 아직 앞으로의 표현을 봐야한다. 그러므로 반드시 이지적으로 대해야 한다.
다른 방면에서 말하면 이런 ‘휘황’이라는 경력을 만약 새로운 우주에서 인정할 수 있다면 속임수를 부린 것도 공로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과 같지 않은가? 누가 어떤 이유로 석방되었던지 모두 마음을 움직이는 사람이 없어야 하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마땅히 굽은 길을 걸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만약 당시 우리들이 이 점을 알았다면 사악의 박해 요소는 ‘석방 되었다’고 하는 결과 속에서 기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다른 대법제자들의 교류문장에서도 어떤 대법제자들은 검은 소굴에서 나와 집에 돌아온 후에도 여전히 병업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사람의 신체를 잃어버렸다고 언급한 것을 보았다. 사실 이것은 구세력의 배치를 완전히 부정하지 못한 결과이며 전화되지 않고 검은 소굴에서 나왔다는 것은 단지 구세력이 배치한 것 중의 작은 일부분을 타파한 데 불과하다. 앞으로의 수련의 길에서 진정 세 가지 일을 잘하는 것만이 비로소 유래가 깊고, 또 일의 대소를 가리지 않는 구세력의 배치를 더욱 잘 타파하는 것이다.
그밖에 나는 이치상에서 깨달았는데 불행하게 검은 소굴에 들어간 제자들이 정념정행하여 자신에게 응당 있어야 할 수련상태를 회복하고, 유지하게 되면 갇힌 제자로 하여금 검은 소굴에서 나갈 수 있도록 병업 상태가 나타나게 재촉할 것인데 우리들은 이 병업 상태 자체에 대하여 더 반성해 보고 배척해야 하지 않겠는가? 수련 중에서 우리들이 그것을 필요로 하는가? 반박해 중에서 그것이 필요한가? 수련 중에서 병업 상태가 나타날 때 우리들은 마땅히 어떤 태도를 지녀야 비로소 ‘정념’ 두 글자를 말할 수 있겠는가? 아마 어떤 수련생은 이것은 사부님께서 제자를 보호하려고 연화해 낸 것이 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데 그렇다면 거꾸로 생각해 보자. 나타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연화해 낸 병업의 가상을 계속 유지하여 사악의 무리에게 표면적인 이유를 만들어 주어 더는 자신을 잡아가지 못하게 하려는 것인가? 긍정적으로 아니다.
이 사건과 유사한 제자들의 구출행위를 본 사람들은 모두 자신을 찾아봐야 한다. 납치사건을 이용하여 진상을 알리고 중생을 구도하는 동시에 자신이 수련에서 부족한 점을 안을 향해 찾아야 한다. 만약 우리들이 ‘구출해 낸다’는 이 구체적인 결과에 너무 집착하게 되면 구세력의 배치를 완전히 부정할 수 없게 되며 사악은 결과에다 ‘독을 넣어’ 박해가 계속되게 할 것이다. 오직 어느 때나 대법의 요구에 따라 잘 하고 사부님이 배치한 길을 가야만이 비로소 구세력의 배치를 전면적으로 부정할 수 있는 것이다.
문장발표: 2010년 6월 14일
문장분류: [수련마당]
문장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0/6/14/225365.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