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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달픔 참고 정진해 서약을 실현하다

글/캐나다 대법제자

[밍후이왕] 나는 2008년 3월에 씬탕런(新唐人) TV 뉴스에 참여하기 시작했고 2009년 5월 속인의 직장을 그만두고 씬탕런TV방송국 토론토 보도부 정규 기자가 됐다.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나는 사부님께서 대법제자를 위해 준비하신 사람을 구하는 이 법기의 위력이 비할 바 없음을 체험하게 됐고 이 위대한 역사 노정에서 씬탕런, 이 대법을 실증하는 이 한 갈래의 길을 걸을 수 있음이 비할 바 없이 행운이고 영광임을 체험했다. 아래에 나는 사부님과 동수들에게 이 2년 동안의 수련 정황을 보고하려 한다.

신체적 고통과 정신적 괴로움(勞其筋骨 苦其心志)

나는 속인 시절에 TV 뉴스에 흥미를 느끼고 그것은 가장 유력한 사회적 공동 무기라고 인식했지만 내가 배운 것들은 TV와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내가 씬탕런에서 기자로 있으면서 돌진하는 과정에는 고생과 즐거움이 배어있었다.

내가 진정으로 마음이 움직여 씬탕런에 들어오게 된 것은 2007년 11월 미국 씬탕런 전세계 회의에서 사부님의 설법을 들은 이후다. 처음에 나는 단지 일주일에 한 두 번 정도 가서 CBC 뉴스 자료를 번역해 뉴스를 만들고 앵커로써 1, 2분 길이의 ‘북미뉴스’를 촬영했다. 그것은 토론토 보도부가 가장 불황하던 시기다. 원래 있던 기자들 중 일부는 미국으로 가고 일부는 다른 프로그램을 제작하고 일부는 다른 항목팀에 가서 뉴스는 반 정도 마비 상태에 처했다. 2008년초, 방송국 책임자가 나에게 기자로 다니라고 했다. 그 당시 나는 마침 일자리를 바꾸려는 시기였기에 승낙했다. 그래서 나는 다른 한 명의 촬영을 갓 배운 신수련생과 파트너가 되어 자주 나가 뉴스를 취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방송국은 마치 일반적인 곳이 아닌 것 같았다. 새로 들어온 사람에 대해 기계 조작조차 도와주지 않았다. 기계 여기저기에서 문제가 일어났다. 나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기계도 나를 깔보고 있구나. 아마도 나를 고험하며 내가 견지해 나가는가를 보는구나.” 한 동안 지나서 나는 뉴스를 만들 때 자주 사용하는 프로그램과 설비에 대해 익숙해졌다. 그것들은 더 이상 나를 힘들게 하지 않았는데 첫 번째 고험이 지나간 셈이었다.

그러나 원고 쓰기 이 고비는 넘기 어려웠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작문을 쓰라고 시키면 연필만 만지작 거렸다. 처음에 2,3백자 좌우의 TV 뉴스 원고를 쓰는 것은 마치 내 목숨을 빼앗는 것 같았는데 몇 시간을 거기에 앉아 있어도 두서가 잡히지 않았다. 거의 매번 원고를 쓰노라면 머리에 녹이 쓸 지경이었고 생각이 나지 않아 괴로울 때는 영감도 오지 않았다. 그 시기에 뉴스를 만들면서 밤을 지새우는 것은 매우 자주 겪는 일이고 대낮에 취재가 끝나면 돌아와서 자판을 두드려 쓰고 수정하고 수정하고 또 쓰는데 또 취재 내용을 추가해 매우 어렵게 원고를 정한 후 더빙을 하고 또 한 컷 한 컷 잘라서 편집을 했다. 1분 30초짜리 뉴스는 8,9시간을 들여서 겨우 완성됐고 뉴스 한편을 완성하는 것이 마치 내 피부가죽을 한 꺼풀 벗기는 것 같았다. 나는 늘 공포심을 지니고 문을 나서 뉴스를 취재했는데 왜냐하면 또 한차례 고통스러운 과정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장 고달픈 것은 이런 ‘신체적 고통(劳其筋骨)’이 아니라 고독과 희망이 보이지 않는 속에서 ‘정신적 괴로움(苦其心志)’을 받으며 견지하는 것이었다. 그 시기 방송국에서 다른 몇 가지 프로그램은 큰 인기가 있었지만 뉴스팀은 나와 파트너 단 두 사람 뿐이었다. 중도에서 시작한 이 두 초보들이 힘들게 지탱하고 있었다. 나는 2008년에 기자직을 배워서 시작했는데 논의할 사람을 찾을 수 없었고 만들어낸 뉴스에 대해서 가르쳐주는 사람도 없이 스스로 생각해서 해야 했다. 가장 좋은 선생님은 바로 CBC, CTV 이런 주류 매체방송국 뉴스였다. 배우는 과정은 바로 열심히 그들의 언어와 그들의 촬영기업, 편집을 배우는 것이다. 어떠한 체계적인 훈련도 없었던 나는 천천히 뉴스에 대해 지혜가 열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자신이 제고하는 동시에 방송국 뉴스는 여전히 어떠한 방향도 보이지 않았다. 교류할 사람이 없었고 참여하려는 사람도 없었다. 동수들에게 한 바퀴 전화를 쭉 걸어도 뉴스를 할 사람을 찾지 못했다. 여러 번 나는 자신에게 물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가버렸는데 너는 왜 견지하고 있느냐.’ 이때 나는 사부님의 법 ‘누구를 위해 수련하는가’가 늘 떠올랐다. 고독하고 도움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느낄 때 나는 마음속으로 자신에게 말했다. ‘사부님께서 씬탕런에 참여하라고 점화해주셨는데 이는 사부님에 대한 서약이 아닌가? 어찌 쉽게 포기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씬탕런 뉴스를 견지하려고 맘을 먹었다.

배우면서 해내고 해내는 중에서 제고

2008년 9월은 씬탕런이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방송을 시작했으며 이는 토론토 보도부의 전환점이었다. 시청률을 올리기 위해 2009년 4월 방송국에서는 오랫동안 저조했던 뉴스팀을 전문 뉴스팀으로 만들고 매일 10분간 ‘캐나다뉴스’를 제작하기로 결심했다. 나는 속인 일을 그만두고 4명 정규직 직원 중 지역사회부 기자가 되어 새로운 어려움을 맞게 됐다.

만약 뉴스 제작을 자체적으로 즐기면서 한다면 외부 압력이 매우 적을 것이다. 당시는 매일 10분 뉴스 제작을 반드시 정말로 진짜 총칼을 들고 해야 했다. 이때 나는 자신이 보도도 할 줄 모른다는 것을 발견했다. 원래 취재하던 뉴스는 대법 행사가 아니면 진상을 알리는 일과 관련된 것들이라 조금이나마 아는 것이었지만 날마다 모두 속인 일을 보도해야 하고 나가서 사회와 접촉하자 비로소 자신이 사회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너무나 적고 배워야 할 것이 너무나 많음을 알게 됐다. 다른 중문TV 방송과 비교하자 자신의 뉴스가 주최측을 위해 선전을 하고 중점을 잡지 못하며 언어가 딱딱해 시청자들이 별로 보고 싶어 하지 않는 부류라는 것을 깨달았다. 다른 프로 뉴스와 거리가 크게 있음을 느끼고 내심은 정말 조급했다. ‘어떻게 해야 더 빨리 제고할 수 있을까? 다른 방법이 없다. 배우는 중에서 해내고 해내는 중에서 제고할 수 밖에. 우리는 전문 인재가 없지만 열심히 배우고 착실하게 가서 연마하면 우리는 전문 인재가 될 수 있다.’

매번 나가서 취재할 때 나는 다른 언론사는 어떻게 하는지 살펴봤다. 그들이 각종 뉴스 사건 장소에서 어떻게 시간을 배치하고 어떤 사람을 취재하고 어떤 문제를 물으며 기자와 카메라맨은 어떻게 협조하며 어떤 곳을 선택해 기자의 화면을 담는지 본다. 주류 언론과 함께 취재할 때 그들의 기자와 카메라맨들에게 프로 방식을 배울 수 있다. 돌아온 후 나는 다시 남들은 그 당시 왜 그렇게 처리하는지 생각하고 어떤 상황에서는 이렇게 처리할 수 있는지 생각했다. 뉴스를 만든 후 다른 중문 매체와 비교하며 다른 두 매체의 보도를 비교할 때는 그들이 취재를 받는 사람의 어떤 말을 인용하고 어떤 언어를 사용하고 어떤 각도로 이 일을 어떻게 잘 알렸는지를 보았다.

바로 이렇게 나는 조금 조금씩 누적되는 중에서 자신도 모르게 제고됐다. 어느 날 나는 자신이 뉴스현장에서 타이밍을 파악하는 능력이 다른 매체 기자보다 더 좋은 것을 발견했다. 수많은 기자들과 함께 취재할 때 자신이 질문을 주도하는 기자가 됐다. 현재 원고를 씀에 있어 머리를 쥐어짤 필요가 없고 많은 자신감이 생겼다. 지금은 뉴스를 만들면서 문제와 현상을 탐구할 수 있고 소식 보도만 하는 데에 그치지 않는다. 뉴스 시청률도 크게 올라갔다. 얼마 전에 한 수련생이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당신들 지금 뉴스는 정말 괜찮습니다. 주민들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도하는데 수련하지 않는 저의 부인도 늘 봅니다.” 동수의 격려는 우리를 뿌듯하게 한 동시에 더욱 잘해야 한다고 느끼게 만들었다.

방송국은 사부님께서 우리 대법제자에게 주신 법기이고 씬탕런을 속인이 즐겁게 볼 수 있는 방송국으로 만들어야 비로소 더 많은 중생을 구도할 수 있다. 우리는 ‘캐나다뉴스’를 더 잘 만드는 것이 이곳의 인연 있는 사람을 구도하는 것이다.

지역사회를 돌파해 처음으로 효과를 나타내

토론토에서 씬탕런을 설립한 지 몇 년 됐지만 2009년 이전에는 진정으로 지역사회와 접촉하지 않아서 우리를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았고 우리의 친구는 더 적었다. 50만 명의 화인들은 토론토 지역에 부평초처럼 떠있고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유일한 정규직 지역사회 기자로서 방송국에서는 내가 화인 지역사회의 문을 열 수 있기를 기대했으며 이 난이도는 뉴스를 만드는 난이도를 훨씬 초월했다. 그러나 방송국에서는 방향이 명확해 현재 팀에서 함께 노력하고 있으며 나 또한 아무 주저 없이 단번에 드넓고 생소한 지역사회로 들어갔다.

기초가 부족하고 갓 시작해 긴 시간 동안 우리는 어떠한 보도자료를 받지 못하고 유일한 소식 출처는 대기원이었다. 어떻게 시작할까? 다른 방법이 없으며 오로지 하나하나씩 시도하는 것이었다. 첫 몇 달 동안 나는 매일 14, 15시간 일을 하는데 그날 뉴스를 완성하는 것 외에 다른 대량의 시간은 인터넷에 접속해 토론토의 각종 중문매체에서 뉴스 단서를 발굴했다. 화인 지역사회의 크고 작은 일이 있는 것을 알아내기만 하면 나가서 취재했으며 과정 중에 더 많은 사람들을 알게 됐다. 가끔 나는 전화를 걸어 취재를 요청하면 상대방은 우리를 그의 매체 메일링 리스트에 올렸다. 그러나 가끔은 한차례 관계를 맺으려 해도 반복적인 시도가 필요했다. 예를 들어 작년 지역사회에서 이슈로 떠오른 사건이 있었다. 상대방은 여러 차례 보도자료를 내보내면서 씬탕런을 누락시켰다. 나는 매번 상대방에게 일깨워주어 신탕런을 언론사 명단에 가입시키도록 했으며 동시에 우리가 만든 뉴스를 상대방에게 보여주었다. 가끔 행사는 주말에 있었지만 우리는 계속 견지해 보도했다. 만나는 회수가 많아지자 상대는 결국 내 이름을 기억해냈고 또 끝내 우리를 그의 매체 명단에 가입시켰다. 가끔 또 교란이 있었는데 가장 이상했던 적은 상대방이 보낸 보도자료를 여러 차례 받지 못하는 것이었다. 이후에 발견했는데 상대방이 내 메일 주소에서 글자 하나를 빼먹은 것이었다.

마음에 오직 정념만 품고 최대한도로 속인 형식에 부합해 일을 하면 일은 개변된다. 지역사회에서 일부 친공 인사와 단체는 씬탕런을 피했다. 씬탕런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한 화교 이민변호사는 내 취재를 받은 후 그의 조수가 씬탕런이 파룬궁과 관계가 있다는 말을 하자 취재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했다. 왜냐하면 그는 대륙에 많은 사업관계가 있어 번거로움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이후에 다른 한 장소에서 나는 또 이 변호사를 만났고 그는 그의 파트너인 연방 국회의원에 대한 나의 취재를 가로 막았다. 나는 예의 있게 이 의원의 결정을 기다리는 동시에 그에게 발정념 했다. 당신이 씬탕런의 취재를 받는 것은 당신의 복이며 대법제자 매체에 오를 수 있는 것은 구도될 희망을 더 가질 수 있으니 삼가 당신의 생명으로 하여금 후회할 결정을 하지 말라. 이후에 이 의원은 내 취재를 받았다.

또 한 젊은이가 있었다. 그에 관련된 이슈를 보도하려고 그와 연락했다. 그는 먼저 나에게 씬탕런은 파룬궁을 말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나는 직접 대답하지 않고 내가 만든 일부 지역사회 뉴스를 그에게 보여주어 그의 경계심을 없앴다. 이후에 그가 아이스하키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그가 경기에 참가한 것을 보도해주었다. 그는 뉴스를 보고 아주 잘 만들었다고 했다. 지금 이 젊은이는 이미 나를 친구로 여기고 있다. 물론 아직 진상을 알릴 기회를 가지지 못했지만 이후에 그가 진상을 알게 하는데 기초를 만들어놓았다. 일부 사람은 처음에는 씬탕런을 배척했지만 이후에 우리를 대하는 태도가 천천히 변화됐다.

씬탕런은 언론으로서 지역사회에 대해 관심을 가지면 지역사회와의 거리를 좁힐 수 있다. 우리의 프로정신과 전문적인 수준은 지역사회의 인정을 받을 수 있다. 차이나타운 상가와 경찰국장이 “도둑을 어떻게 방지할 것인가”란 주제의 세미나를 개최할 때 다른 매체는 취재하러 가지 않고 우리만 갔다. 또 그들에게 아이디어도 내주니 상가는 매우 감사해했고 우리의 방송 시청을 주문했다. 기자회견이 끝난 후 다른 매체는 모두 떠났지만 우리는 주최측에 가서 정황을 알아보았고 상대방은 우리가 매우 프로답다고 하면서 어떻게 씬탕런을 시청할 수 있는지 물었다. 또 한 화교 변호사는 자발적으로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어찌하든 간에 파룬궁은 신앙자유가 있어야 합니다. 중국 정부가 탄압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지요.”

원고를 쓰는 이 며칠 동안 토론토의 모든 중문매체에서 보도했던 불행한 처지의 한 대륙 새 이민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신의 최근 정황을 나에게만 알려주어 우리에게 보도하게 했다. 지금 우리와 연결을 맺은 단체는 점차 증가하고 있으며 우리 친구들도 하나하나 많아지기 시작했다. 우리가 접촉하는 지역사회가 여전히 제한되지만 거대한 사람들은 아직도 우리와 인연 맺기를 기다리고 있다. 방송국 다른 팀의 공동 노력으로 화인 지역사회라는 이 견고한 얼음덩이는 우리에 의해 조금씩 녹여지고 있었다.

우리가 지역사회에 갈수록 많이 나타남에 따라 씬탕런의 위력도 점차 드러났다. 우리가 사회의 일부 이슈를 발 빠르게 취재하면서 씬탕런의 마이크는 다른 매체 화면에도 여과 없이 나타났다. CTV 기자는 다른 매체에서 씬탕런 마이크를 보고 우리를 찾아 화인 지역사회 뉴스 화면을 요청했고 CTV는 우리 기자를 이 문제 전문가로 초빙해 그들 스튜디오에서 생방송 취재를 진행했다. 시청률이 가장 높은 시간에 씬탕런 기자는 캐나다에서 두 번째로 큰 방송국 화면에 나타났고 모든 캐나다 시청자들이 시청했는데 이 홍보 효과는 생각만 해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또한 우리가 지역사회를 견지하면서 돌파해 얻어온 성과였다.

사악을 폭로하고 진상을 알리다

지역사회에서 일부 뉴스를 취재할 때 사실상 다른 공간에서는 정사 대전이다. 우리는 씬탕런 방송국이란 위력이 거대한 법기를 빌어서 말 한마디도 하지 않지만 사악을 폭로하는 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 한번은 한 재단을 대신해 어느 한 기업회가 우리에게 공지를 보내 토론토 시정부 빌딩 회의실에서 기자회견을 가진다고 했다. 거기에 도착하자 행사 주최측 책임자는 무례하게 우리에게 떠나라고 요구했다. 나에게 공지를 보낸 기업회 비서는 이러한 일이 발생할 줄은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으며 그녀는 나에게 매우 미안해하면서 해석하기를 이 행사는 중국영사관에서 경비를 신청하고 대륙에서 사람을 초청해 참가한 행사라고 했다. 나는 이 내막을 안 후 그 책임자에게 경고했다. 나는 초청을 받아서 취재하러 온 것이므로 당신이 떠나라고 하는 것은 전혀 이치가 없다. 아울러 이곳은 시정부 회의실이고 공공장소이므로 그 누구도 언론사에게 떠나라고 할 권리가 없으니 왜 씬탕런을 환영하지 않는 그 이유를 대라고 했다. 상대방은 이치상으로 할 이야기가 없자 할 수 없이 기자회견을 취소시켰다. 그 당시 기자회견에 취재하러 온 많은 매체들이 모두 어리둥절했다. 한 백인 카메라기자는 나에게 정말 믿을 수 없지만 무슨 원인 때문인지는 알겠다고 했다. 우리는 파룬궁에 대해 한마디도 말하지 않았지만 우리가 그 곳에 존재할 때 사악은 이미 폭로가 된 셈이다.

유사한 일은 적지 않았으며 중국영사관에서 직접 참여한 행사에서 이런 일이 많았다. 씬탕런이 그 현장에 있는 것을 발견할 때 악인은 깜짝 놀라 어찌할 바를 모르거나 임시로 촬영 금지라는 명령을 내리거나 갖은 방법을 다해 우리가 하는 일을 막으려 했다. 이 또한 같은 업종에 종사하는 일부 매체로 하여금 이해할 수 없게 만들었다. 무형 중에 사악이 폭로된 것이다. 이는 사부님께서 하신 말씀과 같았다. “중공사당이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그래도 좀 낫지만, 그것들이 어떤 일을 하기만 하면 바로 추한 일이 되고 바로 실패한 일이 된다.”(『밍후이왕(明慧網) 10주년 법회에서의 설법』)

우리가 지역사회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은 우리와 인연이 있는 사람들이고 시기가 성숙되면 사부님께서는 그들을 배치해 진상을 듣게 하신다. 그 중에는 다른 매체 동업자들도 포함한다.

처음 지역사회에 나타났을 때 다른 중문 매체 기자들에 대해 나는 한 사람도 알지 못했고 누구도 나와 말을 건네지 않았다. 그러나 상관이 없었다. 그들이 나를 거들떠보지 않아도 내가 그들에게 다가가면 되므로 나는 자발적으로 그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수많은 눈빛이 나를 관찰하고 있음을 느꼈다. 그들은 이 파룬궁의 사람이 이곳에 와서 무엇을 하는지 보고 있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나는 사부님께서 당신들을 구도하라고 배치해 온 사람입니다”고 했다. 표면적으로 나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했고 그들과 같이 기록하고 취재를 했다. 잘 모르는 일이 있으면 나는 허심탄회하게 그들에게 가르침을 청했고 그들이 모르는 것이 있을 때 나 또한 열정적으로 그들을 도와주었다. 자주 이렇게 하면서 기자들과 친해졌다. 그들은 이 파룬궁 기자가 일부 일에 대해 꽤 잘 알고 있으며 심지어 일부 일에 대해서는 그들보다 더 똑똑히 알고 있음을 발견했다. 이때 그들의 눈빛에서 나를 대하는 것이 예전의 파룬궁을 대하는 눈빛이 아니라 동업자를 대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나는 자발적으로 그들에게 파룬궁을 제기한 적이 없었다.

어느 한번 법정에 가서 한 사건을 취재하는데 거기에서 한 시간을 기다렸다. 한 중문방송국 기자는 나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상대방이 나에게 물어보는 첫 문제가 바로 ‘씬탕런은 파룬궁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였다. 나는 마음속으로 사부님께서 이 기회를 배치하셔서 상대방에게 진상을 듣게 해 주신데 감사를 드렸다. 그리하여 나는 담담하게 파룬궁과 자신의 수련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이후에 사부님께서는 또 유사한 기회를 배치하셔서 다른 한 중문방송국 기자에게 진상을 듣게 하셨다. 지금 나는 이 중문 매체 기자들과 이미 아주 익숙해졌고 진상을 들은 이 두 명의 기자들과는 수시로 연락을 하고 있다. 그 중 한 기자는 나에게 중공은 희망이 없지만 당신들은 우리를 대신해서 더 많이 더 잘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1년 동안 나는 깊은 체험이 있는데 속인이 매체를 하는 것은 생계 혹은 흥미로 인해 하는 것으로써 프로정신이 있다고 해도 자신을 위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 대법제자가 매체를 하는 것은 자신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개인의 실과 득을 따지지 않고 진정으로 가서 헌신하며 우리는 마음으로 매체를 하기 때문에 우리는 아주 빠른 시일 내에 그들과 똑같이 아주 잘 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우리는 결국 그들보다 더 잘해야 하는데 왜냐하면 인류사회 이 무대는 우리 대법제자를 위해 준비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부님을 따라 정법하는 과정 중에서 반드시 이 한 갈래 길을 걸어가야 한다.

집착이 폭로되고 心性이 제고

이런 고달픔과 즐거움이 교차되는 과정 중에서 사부님께서는 한번 또 한번 나의 각종 닦이지 않은 집착들을 폭로해주셨으며 나에게 끊임없이 기회를 주시어 새로운 환경에서 자신의 경지를 높이도록 하셨다.

다른 일을 하며 기자직을 겸할 때는 단지 카메라맨과 파트너가 되어 수련환경이 비교적 간단하다. 마치 조금만 고생하고 견지하면 수련하는 셈이었다. 그러나 뉴스팀을 설립해 정규 기자가 된 후 매일 동수들과 밤낮으로 함께 있어야 하고 또한 사람 마음의 다스림도 나타났다. 이때 나의 평소에 깊이 숨겨둔 버릇도 차츰 드러나기 시작했다.

현지 방송을 시작한 후 방송국의 발전은 뉴스팀 프로화에 대한 요구가 무척 부각됐다. 뉴스 제작에서 프로화가 필요할 뿐만 아니라 업무 시스템, 관리에서도 프로로 나가야 했다. 팀에서 매 개인은 모두 노력하고 있었지만 프로화에 대한 이해와 요구는 달랐고 각자가 노력하고 열심히 하는 정도도 달랐다. 거기에 매 개인의 습관과 특성도 달라서 모순이 일어났다.

내 성격은 조금 고지식하고 직선적인 사유로서 원용하지를 못하고 쉽게 한 가지만 중하게 보면 다른 것은 고려하지 못하는 편이다. ‘캐나다뉴스’가 시작된 후 나는 모든 열정을 그 속에 투입했다. 식사하고 길을 걷고 심지어 잠을 자도 어떻게 좋은 뉴스를 만들 것인지를 생각하고 뉴스에 대한 품질을 매우 중하게 보면서 남에 대해서도 요구가 아주 높았다. 동수에게 착오가 생기면 용납을 못하고 자신이 맞다고 생각하면 다른 사람들이 이를 모두 수긍해야 한다고 요구했으며 그 일이 내 생각과 맞지 않으면 기분 나빠하고 원망했다. 가끔은 사람을 몰아세우듯 말을 하고 태도와 어투가 매우 좋지 못했다. 처음에 나는 이를 완전히 인식하지 못했고 자신이 업무에 대한 요구와 책임이 엄격하기 때문이라고 여겼다. 아주 빨리 동수들이 감당을 하지 못했고 나에게 교류하기를 당신이 이렇게 해나가면 우리는 모두 이곳에 있지 못하고 뉴스팀은 해산될 것이라고 했다. 나는 문제가 이렇게 심각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고 자신을 반성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형성된 습관을 단번에 고치기란 정말로 쉽지 않았다. 뉴스를 만드는 것은 매일 모두 새로운 것을 만들고 매일 압력과 도전을 마주하고 있는데 긴장된 업무로 인해 나는 늘 마음을 조용히 하고 법공부, 연공, 발정념을 할 수 없었으므로 수련인의 상태를 유지할 수 없어 자신에 대한 요구를 느슨히 했다. 한 동안 동수들과의 관계까지 긴장감이 흘렀다.

그 중에 나에게 큰 한차례 心性관은 올해 1월경에 있었던 션윈 보도 기간이었다. 그때는 처음 션윈 보도 편집업무를 맡게 되어 기자 배치, 원고 심사, 시효성 면에서 뜻대로 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나는 그 당시 자신에게 문제가 있음을 인식하고 즉시 동수들과 교류하고 소통해 나중에 모든 수련생들의 노력 하에 기사 품질을 보장하고 수량을 초과해 보도 임무를 완수했다. 그 당시 나는 프레스센터에서 발정념 하면서 온 얼굴에 눈물을 흘리며 사부님에게 자성과 과실을 미봉할 기회를 주신 데에 대해 감사를 드렸다. 그리고 다음에 더 잘하겠다고 다짐했다. 다음 도시에서 션윈 보도를 준비하고 있을 때 책임자가 갑자기 다른 사람이 대신할 것이라고 알려주었으며 내가 수긍할 수 있는 이유를 말하지 않았다. 나는 오랜 시간 동안 치른 모든 노력이 승인 받지 못하고 신임 받지 못함에 대해 방망이로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나는 이 일로 내심에서 평정을 이룰 수 없었으며 예전에 션윈 보도를 하던 때 한 동수의 몸에서 발생한 일이 생각나 하마터면 씬탕런을 탈퇴할 생각까지 했다. 그러나 마음속에 서약을 실현해야 한다는 생각이 또 한번 나로 하여금 압력을 견뎌낼 수 있게 했다. 나는 원망하는 마음을 내려놓으라고 자신에게 요구했다. 션윈 보도 자체는 아주 성공적이고 이는 가장 중요한 것으로써 누가 가서 보도하는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자신이 맞고 남이 틀려도 이 인간세상의 이치는 오히려 반대이다. 자신이 강한 집착을 안고 내려놓지 못하는 것이 과연 수련인인가? 그리고 수련인은 참음이 있어야 한다. 하늘같이 큰 억울함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모든 사람이 오해할지라도 역시 참아야 한다. 하물며 이 정도 일을 가지고 또 참지 못한단 말인가? 무엇을 따지고 있는가?

그 당시에 나는 억지로 이 관을 넘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자신이 상처를 입었다고 느끼는 마음 역시 자아를 너무 중하게 본 것이었다. 만약 무사무아의 경지로 닦아냈다면 이러한 일은 아마도 웃으면서 넘어갈 것이다. 아마도 그 마음이 없었을 것이고 또 그러한 일에 부딪히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사부님께서는 씬탕런 뉴스를 잘 하려고 하는 내 마음이 비교적 단호한 것을 보셨는지 계속 나에게 제고할 기회를 주셨다. 이 2년 동안 나는 거의 사부님의 정법노정에 의해 앞으로 떠밀려 돌진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서약을 실현할 수 있는 대법제자가 되어 미래인의 역사를 만든 이들 중의 한 사람이 되게 된데 대해 다행스럽다. 모든 동수들과 함께 사존의 가르침을 기억하려 한다. “비단 방송을 잘 운영해야 할 뿐만 아니라, 게다가 갈수록 정규적으로 운영해야 한다. 대법제자들이 원만해서, 당신들이 그것을 법이 인간세상을 바로잡을 때의 사람들에게 넘겨주고, 미래 인류의 문화로 되게 하려면, 그럼 당신들은 그것을 잘 해야 한다.”(『씬탕런TV 토론회의에서의 설법』)

(2010년 캐나다 법회 발언고)

문장완성: 2010년 05월 30일
문장분류: 수련마당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0/5/31/224635p.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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