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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 대법의 요구대로 해야만 법을 실증할 수 있다

글/ 츠펑(赤峰) 대법제자 징씬(靜心)

[밍후이왕2010d년 4월 21일] 어느 우연한 기회에 나는 한 대법제자와 만나게 됐는데 그의 상황이 아주 좋지 못했다. 겉으로 보면 눈길에 미끄러져 넘어지면서 손목을 다친 것 같았지만 이건 분명 골절된 기미였다. 비록 그녀는 정념이 아주 강하긴 했어도 두 달 넘도록 낫지 않았다. 그녀 언행 가운데서 그녀가 어찌할 방법이 없어하는 것을 볼 수 있었고, 그녀는 동수들이 그녀에게 발정념 해주지 않는다고 원망했다. 이는 나에게 깊은 자책감에 빠지게 했다. 나는 어떻게 구세력에게 박해당하는 수련생을 도와줘야 할까? 그들도 법공부 하고 있고 발정념을 하고 있는데 왜 작용이 없는 걸까??

이는 나로 하여금 『밍후이주간』에서 수련생이 쓴 한 단락 말이 떠오르게 했다. “우리가 구세력을 부정함에 어떤 기점에 섰고, 어느 층차 중에서 부정했는가, 가령 자신이 박해당하지 않기 위해, 자신의 안일을 위해, 일하는데 교란을 당하지 않기 위해, 건강을 얻기 위해 등등이라면 부정할 수 있겠는가? 부정하는 목적은 위사이며, 다 같이 구우주의 생명, 낡은 이치로 서로 간에는 제약작용이 없다. 그러나 구세력에게는 오히려 이유가 존재한다. ‘당신들 보라, 이 대법제자는 그의 사부님의 요구에 부합되지 않게 하고 있는데 그는 얼마나 이기적인가, 이번 시험을 배치한 것은 옳은 것이고 합리적인 것이다.’ 반대로 가령 우리가 진정 남을 위한 각도에 서서, 진정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모든 교란을 부정할 수 있고, 또한 사람을 구하는 것을 이기적인 목적을 위한 간판으로 쓰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으로부터 우러나온 염원으로 여겨야만 즉시 일체 교란을 부정할 수 있다. 왜냐하면 대법은 일체를 제약하고 대법의 원칙은 진정으로 선량한 생명이 박해당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며 사부님께서 사악이 대법제자가 사람을 구하는 사명을 완수하는 것을 교란하는 걸 허락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정법시기 대법제자인데 어느 곳이 낡은 이치에 부합되어서 그에게 틈탈 구멍을 주었는가?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법을 배우고 법을 얻어 배움을 비기고 수련을 비기나니 일마다 대조하여 할 수 있음이 수련이노라” (『홍음(洪吟)』「착실하게 수련」). 날마다 법공부 한다지만 진정을 법을 얻었는가, 자신이 처한 환경에서 일마다 자신의 행위를 대조하고 대법으로 가늠하고 표준에 부합했는가.

자신의 생활 환경속에서 오직 수련인답게 해야만 당신은 대법을 실증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대법의 한 입자이므로 잘 하지 못하면 대법에 부정적인 영향을 일으키게 된다. 우리는 중생을 구도하고 있는가 아니면 회멸하고 있나? 마땅히 우리의 동작 하나, 눈길 하나마저도 모두 대법을 대표하고 있다는 것을 의식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이 자신은 대법제자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날마다 모두 진상을 알리고 있으며 중생을 구도하고 있다. 내가 인식하건대 자신을 잘 수련한다는 것은 실제 행동으로 중생을 구도하는 것이라고 본다. 발정념 역시 중생을 구도하고 있다. 우리는 모두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물질과 정신은 일성이다”(『전법륜(轉法輪)』)를 믿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발하는 것은 정념으로서 그는 자비한 마당을 지녔고 그는 우리가 육안으로는 볼 수 없고 사유로도 상상할 수 없는 그런 무량무제한 중생을 구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정말로 했다면 정말로 사부님의 이 법을 믿은 것으로 그 가운데서 이 층의 법이 자신에게 펼쳐주는 아름다움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왜냐면 정말로 했다는 이것은 바로 정말로 되는 한 층의 표현이며 하는 과정에 자비심으로 대법을 실증하고 중생을 구도하게 되는데 그게 곧바로 선의 한 층 함의이며, 인(忍)으로부터 선으로 이른 것이며, 또한 일정한 버림(捨)도 해 속인의 집착을 버림으로서 씬씽(心性)의 승화를 얻게 된다. 사부님께서는 『정진요지』「원용」에서 말씀하셨다. “참음(忍) 속에 버림(捨)이 있으니, 깡그리 버리는 것만이 누락이 없는 더욱 높은 법리(法理)이다.” 『정진요지』「빠짐이 없게 하자」에서 말씀하셨다. “참음(忍) 속에 버림(捨)이 있는 것으로, 버릴 수 있음은 수련의 승화이다.“

우리 신변 중생 누군들 건강하기 싫어하며 누군들 아름다움을 싫어하겠는가? 우리가 자신의 실제 행동으로 대법의 아름다움과 자비로운 정보를 그들에게 전해줄 때면 그들은 꼭 대법에 감격할 것이고, 그리하여 법을 얻을 것인데 그건 바로 새로운 미래인 것이다.

내가 이 동수와 여기까지 교류했을 때 그녀는 자신의 사람마음이 너무도 중하다는 것을 깨닫게 됐고, 그녀가 예전에 한 일은 모두 사람마음으로 가늠한 것으로서 남편을 대하거나 가정의 화목 역시 속인의 기점에 섰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하여 그녀는 남편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 “전 앞으로 당신을 꼭 더 잘 대할 거예요! 대법제자의 표준으로 자신을 가늠하겠어요.” 그녀 남편은 놀란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 남편이 몹시 감동됐으며 아울러 그녀가 말한대로 하기를 바란다는 것을 보아낼 수 있었다.

이상은 내가 수련생을 도와준 후의 조그마한 체득인데 써내는 뜻은 마난 중에 있는 다른 동수들이 모두 수시로 곳곳에서 안에서 찾아보길 바라서이다, 오직 법의 표준에 부합돼야만 사악의 교란에서 벗어나 보다 빨리 자신을 귀정(歸正)할 수 있을 것이다.

문장발표 : 2010년 4월 21일
문장분류 : 수련마당
문장위치 : http://minghui.org/mh/articles/2010/4/21/22192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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