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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제자는 무조건 안을 향해 찾아야한다

글/ 대륙 대법제자

【밍후이왕 2010년 4월 16일】최근 우리 지역의 동수 간에 있는 모순으로 인해 협조할 수 없는 상황이 아주 많아, 이에 대해 나의 인식을 말하고자 한다. 합당하지 못한 곳이 있으면 동수들의 자비한 시정이 있기를 희망 한다.

오로지 우리가 의연하게 수련하고 있다면, 우리 주변에 발생하는 일체 모든 것은 우리에게 안을 향해 자신의 집착을 찾도록 하려는 것이다. 나는 이에 대해서는 동수들 모두 의의( 疑义)가 없다고 생각 한다. 그렇다면 어떤 문제에 부딪치던지 대법제자는 무조건 안을 향해 찾아야 한다.

동수간의 의견 차이로 인해 모순이 발생하는 것은 아래 몇 가지 상황에 해당한다.

1, “나”는 법에 있지 않고 상대방이 법에 있을 때

2. “내”가 법에 있지 않고, 상대방도 법에 있지 않을 때

3, “내”가 법에 있고, 상대가 법에 있지 않을 때

4, “내 “가 법에 있고, 상대도 법에 있을 때 등등 상황이다.

첫 번째 상황은 처리하기가 가장 쉽다. 모순이 발생했을 때 자신의 안을 향해 찾으면 원래 상대는 법에 부합되었고, 자신에게 사람 마음이 있거나 부족한 면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렇다면 필연적으로 진심으로 믿고 따르면서 자신을 개정하고 제고 한다. 두 번째 상황은 쌍방 모두 사람 마음이 있기 때문에 안을 향해 찾게 되면 자신도 틀린 면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어, 자연적으로 대법에 대조하여 자신을 개변할 수 있어서 역시 쉽게 마음이 평형 된다.

세 번째와 네 번째 상황은 모두 안을 향해 찾는 과정에서 “내”가 법에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은 동수사이에 모순이 발생할 수 있는 가장 주된 원인이다. 상대방이 틀린 것이 분명하지만 그처럼 당당해 하며 “내”가 확실히 옳은데도 상대는 오히려 승인하지 않는다. 이때 매우 많은 사람 마음이 생겨나게 된다. 억울, 분개, 조급, 원망, 자신을 실증하려는 마음이 갈수록 강해지며, 다른 사람을 설복하려하고, 다른 사람을 개변시키려는 마음도 갈수록 강해지고, 모순도 갈수록 커진다. 우리가 자신이 “옳다”는 것을 강조할 때는 오히려 이 “옳다”는 배후에 하나의 강대한 “자아”가 있고, “위사위아” 라는 구 우주 생명의 근본 속성이 이 모순을 조성했음을 발견하지 못한다. 만약 “집아(执我)”를 “무아(无我)로 개변 하지 않고, 상대의 입장(처지)을 바꾸어 고려하고 상대의 각도에 서서 가늠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안을 향해 찾아도 상대방의 부족함을 자비로 포용할 수 없다. 만약 자아를 완전히 내려놓지 못하고, 순정하게 법에 서서 생각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안을 향해 찾아도 의연히 자신이 “옳다”고 인정하면서 “부동한 층차에 부동한 법이 있다”의 홍대한 법리를 이해할 수 없다. “이리보면 고개요, 저리보면 봉우리라, 멀고 가깝고 높고 낮음이 한결같지 않네[( 횡간성령측성봉, 원근 고저 각불동(横看成岭侧成峰,远近高低各不同)]” 고인이 일찍 이미 꿰뚫어 본 이 진리를, 나는 대법제자는 더욱 응당 투철히 보아야 한다고 생각 한다.

흔히 동수 사이에 분열이 생길 때면, 모두 법에서 자아를 실증할 수 있는 것을 찾아 자신을 위해 변명 하고, 말도 매우 분명하게 한다. 그러나 이는 대법은 원용하며, 부동한 상황을 견주어 부동한 층차의 법이 있다는 것을 망각하고, 오히려 다른 일면의 법을 보지 못한 것이다. 자아를 견지하는 와중에 자신이 “옳다”는 것만 집착하면서 상대방을 지적하고, 상대방을 개변하려고 힘쓰지만, 유독 자신을 개변하려 하지 않는다. 마치 우리는 대법수련은 안을 향해 찾는 것이라는 것을 이미 완전히 잊은 것 같고, 대법이 우리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자비하게 일체를 포용하는 것임을 잊은 것 같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질책하고, 다른 사람을 간섭 할 때, 자신은 대법을 위해 책임지고, 수련생을 위해 책임진다고 생각 하지만 오히려 이 “책임”이란 배후에 자아에 집착하는 강대한 사심이 있음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이다. 자신이 인식한 법리로 다른 사람을 가늠하고 요구하면서, 상대의 부족한 점을 자비로 포용 하고 묵묵히 원용하지 못하고, 오히려 자기의 능력을 다해 상대를 개변시키려고만 한다. 이것이 곧바로 구우주 생명의 근본 속성의 돌출한 표현이며, 역시 구세력이 자신의 안배를 집착하면서 그것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 대법제자를 박해하는 근본 구실이다.

우리는 자신이 “옳다”고 느낄 때에도 무조건 안을 향해 찾아야 한다. 즉 자아에 집착하는 근본 속성을 개변해야 한다. 우리가 “옳다”하더라도 능히 상대방의 “옳지 않다”에 대하여 자비로 포용할 수 있어야 하고 우리가 “옳다” 하더라도 역시 자아를 내려놓아야 하며, 상대방의 각도에 서서 상대방의 방법도 능히 대법을 실증할 수 있지 않는가를 보아야 한다. 다만 법을 실증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무조건 자신을 내려놓고, 적극적으로 동수와 협조하여야하고, 상대에게 부족한 점이 있더라도 자신의 가장 좋은 방법으로 묵묵히 잘 원용 하여야 한다.

대법은 일체를 포용한다. 나는 우리가 진정으로 무사무아 한 정각으로 수련되고, 완전히 법에 동화 되었을 때면, 응당 선의로 다른 사람을 이해 할 수 있는 상태가 된다고 생각 한다. 다만 속인 사회에서 발생한 일체를 허허하면서 마음에 두지 않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생명의 만상(万象)에 대하여 모두 이해할 수 있고, 모두 자비하게 포용할 수 있다. 그 누구와 함께 있던 지를 막론하고, 모두 남과 입장(처지)을 바꾸어서 고려하고 상대의 입장에 서서, 상대를 위해 생각하고, 진정 상대를 좋게 하기 위함일 뿐, 추호의 사념도 없게 된다. 법을 실증하는 일을 할 때, 완전히 자신에 집착하지 않고, 완전히 법을 실증하기 위하여 한다면, 그 어떤 상황에 마주쳐도 모두 원용할 수 있고, 동수들과 잘 협조할 수 있으며, 일체 모순은 모두 나 자신 여기에서부터 자생(滋生)하지 않을 것이며, 우리 여기에 구세력은 기여 들어 올 틈이 없게 될 것이다.

문장 완성: 2010년 4월 16일

문장 분류: 수련마당문장 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0/4/16/22147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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