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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점이 바르지 않으면 교란이 끊임없다

글/ 대륙대법제자

밍후이왕 2010년 3월 21일 동수A는 소굴에서 나온 지 이미 반년이 되었다. 그가 처한 환경과 자신의 상태는 그리 좋지 않았다.

그날 A동수와 교류할 때 A수련생은 자신이 소굴에서 일 년 남짓 박해를 받은 기간에 남편하고 아이에게 매우 큰 고통과 타격을 주었다면서 미안해하고 또 그들에게 빚을 졌다며 미봉하고 싶어 하는 것을 발견했다.

내 보기에 이런 인식은 누락인 것으로서 하나는 법리에 분명하지 못한 것이다. 사악은 대법제자를 박해하는 동시에 가족도 박해하는데 이렇게 가족에게 고통과 타격을 가한 것은 사악의 박해가 조성한 것이다. 대법제자로서 원칙상에서 남편에게 미안할 것이 없으며 그 무슨 빚이요 미봉이라고 말할 것이 없다.

두 번째로 그 중에서 체현된 것은 남편에 대한 정이다. 무슨 고통, 타격, 미안, 빚지다, 미봉 등등 이 모든 것은 그래 정의 것이 아닌가? 삼계내의 이치는 모두 반대이다. 만약 고층의 바른 이치로 보면 이런 고통, 타격과 마난이 가족에게 준 것은 모두 좋은 일이 아닌가? 더욱 중요한 것은 기점 문제이다.

A동수의 이 일념으로 인하여 남편이 그에게 주는 교란은 끊임없었다. 우리는 대법제자이다. 우리는 어떤 환경이거나 어떤 일에 봉착하던지 응당 우선 법을 실증하는 것은 대법제자의 책임과 사명이라는 것을 생각해야한다. 이 점을 떠나서 가족, 친인을 제1위에 놓고 대법을 다음에 놓는다면 이것이 기점을 바로 놓지 못한 것이 아닌가? 여기에서 수련생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며 기실 수련생은 소굴에서 정정당당히 자신에게 오점을 남기지 않았는데 매우 대단하다. 이 일을 통해 동수와 함께 안으로 찾으려는 것이며 그것의 뿌리가 무엇인지 그로부터 제고하자는 것이다.

사실 이층의 이치를 깨닫게 된 것도 역시 자신이 격은 심각한 교훈에서부터 총결해낸 것이다. 몇 년 전 내가 노동수용소에서 나왔을 때 인식이 이 동수와 거의 같았는데 결국 자신에게 일련의 교란과 시끄러움을 가져다주었다. 그때 생질이 석탄을 경영했는데 나더러 가서 석탄을 팔아 달라고 했다. 당시 나는 자신이 난중에서 생질의 도움을 받았으니 바로 이것으로 보답하고자 몇 달 동안 석탄을 팔았다. 돌아온 후 아이의 외숙모가 암에 걸려 나더러 곁에서 간호해 달라고 했다. 이 몇 년 친척들에게 적지 않은 고통과 시끄러움을 가져다주었다고 생각하고 바로 미봉하자고 생각했다. 그의 후사를 처리하고서야 비로소 돌아왔다. 얼마 되지 않아 언니가 갑자기 입원했다. 핏줄이기에 또 가서 간호했다. 이렇게 반년 남짓 지나갔다. 세 가지 일을 얼마 하지 못하고 자신은 완전히 속인으로 변해버렸다. 그 기간 정말 정에 빠져 스스로 헤어날 수 없었으며 울타리에 갇혀 벗어날 수 없었는데 노동수용소 우리에서 또 인정의 울타리에 들어간 것과 같았다.

나는 하루 밤 꿈을 꾸었는데 꿈속에서 나의 엄마를 업고 품에는 아들을 안고 손에는 딸을 잡고 큰 산위로 한 발자국씩 간신이 내디디었다. 나는 이것이 자비하신 사부님께서 나를 점화하여 나더러 정을 놓으라고 하신 것임을 깨닫고 정을 놓아야만 비로소 쉽게 올라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2002년보스턴법회에서의설법』을 공부할 때 “대법제자(大法弟子)가 그 무슨 일을 할 때, 모두 법(法)을 가장 크게 보아야하며 그 어떠한 일을 처리할 때에도 당신은 모두 우선 법(法)을 생각하여야한다.”란 단락을 보고서야 나는 이렇게 많은 교란과 시끄러움을 만나게 되었으며 자신이 수련에서 기점을 바르게 놓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법을 가장 크게 ” 대하지 못했으며 역시 “우선 법을 생각”하지 못했다. 도리어 속인을 첫 자리에 놓고 대법과 수련을 뒷자리에 놓았다.

법에서 제고된 후 나는 매번 무슨 일에 봉착할 때 우선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이 단락을 생각했으며 또 법으로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를 가늠하여 매우 빨리 이런 교란의 국면을 돌려세웠다. 기실 자비하신 사부님께서 지적하시고 깨우쳐 주셔서야 비로소 바르게 걸었다.

그중에서 나는 “무엇이 대법제자인가? 대법제자는 대법의 한 개 입자이며 법중에서 특유(特有)한 것이다. 그렇다면 대법은 어디로부터 왔는가? 사부님께서 전한 것이다. 다시 말하여 사부님이 계시기에 비로소 대법이 있게 되었고 그러므로 비로소 대법제자가 있게 되었으며, 그러므로 우리는 비로소 사부님의 제자로 되었다. 우리가 대법제자의 칭호와 책임을 담당하게 되었다면 곧 사부님의 말씀을 들어야하고 법의 표준과 요구에 따라가서 무조건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당신은 누구의 부모인가? 누구의 아들·딸인가? 이것은 속인 중에서의 일종 존재 형식이며 속세에서의 수련환경이다. 하지만 당신 수련의 최종목적은 반본귀진하고 당신이 응당 가야할 곳으로 돌아가기 위해서이지 속인중의 누구를 위해 존재하고 수련하는 것이 아니다. 당신이 만약 속인중의 일체를 제1위에 놓고 수련을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위치에 놓았다면 우선 하나의 속인이지 또 어떻게 대법제자라고 할 수 있겠는가? 가능하게 어떤 수련생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사부님께서도 우리들에게 가정을 잘 원용하라고 하시지 않는가? 옳다. 가정을 잘 원용하는 것도 법의 요구이다. 그러나 가정을 잘 원용하는 목적은 법을 원용하기 위해서이다. 우리는 대법제자이지 속인이 아니기 때문에 이 점에 반드시 분명해야한다.

수련은 매우 엄숙한 것이다. 기점을 꼭 바르게 놓아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교란이 끊임없을 것이다. 또한 교란에 봉착했을 때 기억하라. 우선 안으로 자신을 찾고 어떤 사람의 마음과 집착인가를 보고 제때에 그것을 버리고 기점을 바로 잡아야 한다. “만사에 집착이 없으면 발아래 길은 스스로 열리노라”(『홍음2』「가로 막지 못하리」)

문장발표: 2010년 3월 21일

문장분류: 【수련마당】
문장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0/3/21/22011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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