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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부님의 요구에 따라 해야만 낡은 세력의 안배를 부정할 수 있다

글/대륙대법제자

【밍후이왕 2010년 3월 9일】현재 나타나는 일부 현상을 살펴보면, 누군가 수련생을 도와 부족한 점을 찾는다고 하면 밖으로 찾는 것이라고 여긴다. 또 수련생을 도와 누락을 찾는다고 하면 낡은 세력과 함께 있다고 하는데, 이것은 일종 극단적인 논조이다.

사부님께서는 “교란 당함을 당신은 늘 누가 교란하면 나는 그것을 소멸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누가 교란해도 모두 안 된다고 여긴다.(뭇 사람들의 웃음) 그러나 당신은 왜 생각해 보지 않는가. 왜 당신을 교란 하는지를? 무엇 때문에 당신을 교란할 수 있는지? 자신에게 무슨 집착이 있는 것이 아닌가? 내려놓지 못한 것이 있는가? 무엇 때문에 자신을 보지 않는가? 진정한 원인은 자신의 이곳에 있기 때문에 그것이 비로소 틈을 탈 수 있다!”라고 이야기 하셨다.

사부님께서는 『아태지역수련생회의설법>>에서도』“낡은 세력의 배치이든지 아니면 업력이든지를 막론하고 우리는 우선 자신을 생각해야한다. 나는 당신들의 발정념마저도 당신들더러 자신을 우선 청리하라고 하였다. 먼저 자신을 보고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면 잘 처리하라. 그때엔 낡은 세력 그것도 방법이 없다. 그것이 당신의 약점을 잡지 못하면 자연히 후퇴하기 마련이다. 물론 지금 낡은 세력은 후퇴하여도 안 된다. 철저히 청리해야 한다. 발정념을 통해 자신을 청리한 후 그것을 청리하라.”라고 이야기 하셨다.

사부님께서는 설법에서 낡은 세력이 대법제자의 사람마음을 틈타 교란한 것임을 우리는 알게 되었다. 박해를 받고 있는 수련생이 낡은 세력의 안배를 부정하려면 반드시 재빨리 자신의 누락을 찾아야만 비로소 빨리 수련하여 올라갈 수 있으며 신속하게 낡은 세력의 안배를 근본적으로 부정할 수 있다. 이것은 사부님의 요구에 따라 안으로 찾는 것이며 법에서 수련하는 것이지 박해를 인정하는 게 아니다. 더구나 “박해에 도리가 있다.” 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더욱 아니다.

수련생이 납치되거나 “병업” 등의 나쁜 상태에 처했을 때, 종종 자신이 집착하고 있다는 인식이 부족하거나 엄숙하게 깨닫지 못한다. 하지만 항상 함께 있는 수련생은 아주 똑똑히 볼 수 있다. 만약 이때 주변 동수들이 도와서 그의 부족한 점을 찾아주어 그로 하여금 신속히 사람마음을 찾아 제고하게 하고, 혹은 기타 몇몇 동수들과 이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교류하면서 교훈을 삼는 이것은 모두 수련하는 것이다. 다만 우리가 질책, 원망, 자신을 실증하는 등 사람의 마음을 품지 않는다면 바로 대법제자 간의 정상적인 교류인 것이다. 당연히 다른 한 방면에서 보더라도 우리는 법리에 명확해야 한다. 동수에게 누락이 있더라도 박해를 허락하지 않고 인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수련생을 도와 부족한 것을 찾는 동시에 우리는 수련생을 도와 발정념을 하여 다른 공간의 사악한 생명과 요소를 제거하고 함께 법 공부를 많이 하고 대법으로 우리의 정념을 충실히 한다면 이것은 모두 낡은 세력의 안배를 부정하는 것이다.

자비롭게 수련생을 도와 부족한 점을 찾는 것은 모순되지 않으며, 사람의 마음을 찾는 것 또한 우리가 포용해서는 안되는 게 아니다. 정법 수련에서는 동수 간에 포용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낡은 세력은 호시탐탐 우리를 노려보면서 틈만 있으면 틈을 뚫고 들어오려고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수련생을 도와 제고되게 한다면 곧 많은 손실을 피면할 수 있다. 이것이 비로소 동수에 대한 자비이다. 인정(人情)은 자비가 아니며 수련을 대처하지 못한다. 어떤 사람이 동수의 누락을 보고도 법으로 비교하지 않고 감정으로 형제지간이 좋고 자매지간이 좋아 상대방의 문제가 별일 아니라고 느끼거나, 혹은 늘 함께 있는 상대방이 접수하지 않고, 체면 때문에 다시는 왕래할 수 없을까봐 두려워, “서로 도움”에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해 소위 ‘묵인(容)’한다면 도리어 이 ‘묵인’은 법에서 요구하는 “포용”이 아니라 “방임”이며, 사람의 정임을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동수에게 누락이 있는 것을 보고도 말하지 않는다면, 그리하여 틈이 커져 박해 받을 정도라도 말하지 않고, 수련생을 도와 덮어 감추며 누가 말하면 누구에게 화를 낸다면, 생각해 보라 이것이 수련생을 돕는 것인가 아니면 수련생을 해하는 것인가?

사부님께서는 『전법륜』중에서 “한 연공인(煉功人)으로서는 마땅히 이래야한다. 무릇 연공(煉功) 중에 이런 교란, 저런 교란이 나타나면, 당신이 아직도 무엇을 내려놓지 못하고 있는지 당신 자신이 원인을 찾아야한다.”라고 우리들에게 가르치셨다. 대법은 일체를 제약하고 있다. 다년간 법을 실증하는 노정 중 매개 착실하게 수련하는 대법제자는 모두 이런 체험이 있을 것이라고 믿으며 문제에 봉착했을 때 만약 우리가 진정으로 즉시 빈틈을 찾고 자신을 잘 수련할 수 있으면 그 문제는 즉시 구름처럼 사라질 것이다. 소유의 교란, 박해는 바로 즉시 제거 될 것이며 막다른 곳에서도 길이 열릴 것이다. “조용히 생각해보니 집착한 일 얼마이더냐 사람마음을 덜면 악은 스스로 패하리라”(『홍음2』)

사부님께서는 『로스앤젤레스시법회설법』에서 이야기 하시기를 “물론 나는 모두 다른 사람을 지적하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다른 사람이 만일 문제가 있는 것을 보았거나 혹은 진상 알리기에 영향을 주거나 여러분의 협력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을 보았을 때는 말을 해야 하며 나의 법신도 어느 수련생의 입을 빌려 당신에게 점화 해줄 것이다.”라고 하셨다. 대법제자의 교류, 정체 제고는 사부님께서 남긴 수련 환경으로서 우리는 응당 사부님의 요구에 따라 해야 한다. 우리는 자신을 순수하게 하여 수련 환경이 순수해 지도록 해야 한다. 오직 수련생을 도와 자비롭게 수련생을 포용하는 심태로 지적할 때야만이 비로소 심태가 평온하게 격동하지 않을 수 있으며 사부님께서 요구하는 “어투, 선한마음, 게다가 도리(道理)는 사람의 마음을 개변 시킬 수 있으나 명령은 영원히 할 수 없다! ” (『정진요지』)란 말씀에 따라 두루 뭉실하게 형식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서 말을 들으면 “말하지 말자”는 마음을 견정히 닦아야하며 “반드시 누가 말해도 다 돼야하며 있으면 고치고 없으면 주의해야한다.”(『로스앤젤레스시법회설법』) 무조건 안으로 찾아야 한다. 만약 모두 이렇게 할 수 있어야만 비로소 우리의 교류는 가치가 있는 것이며 우리의 제고도 제일 빠를 것이다.

일부 동수들은 “나도 수련생을 돕는데 왜 효과가 나쁜가? 심지어 난 중에서 수련생이 크게 압력을 느껴 내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는가?”고 말한다. 내 생각에 우리가 수련생을 도울 때 “수련생이 접수할 수 있는가”를 제 1위에 놓아야 한다. 난 중에서 수련생은 직접 교란을 받으므로 사상이 맑지 않을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간단한 설교를 하기 보다는, 순서에 따라 깊이 들어가는 방식을 택해 자신이 몸소 겪은 체험을 교류한다면, 그리고 일 마다 선념으로 수련생을 위해 생각한다면 수련생은 진정으로 수련의 아름다움, 신성함과 위대함을 체험할 것이며 근본적으로 법을 갈망하고 단호하게 집착을 버리기가 더욱 쉬울 것이다.

저의 조그마한 체험이오니 부족한 점에 대해서는 동수들께서 자비로 시정하기 바란다.

문장발표: 2010년 3월 9일

문장분류: 수련마당
문장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0/3/9/219496.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