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대륙 대법제자 영진
【밍후이왕 2010년 3월 2일】밍후이왕에 발표된 《왜 어떤 지역은 박해가 끊임없는가》라는 문장을 보고 깊은 공감이 간다. 문장에서 말한 문제는 나에게도 존재하는데 예를 들어 동수사이의 간격이라든지, 서로 질책하거나 원망하고, 수구하지 않는 등등이다. 여러 수련생들이 안에서 찾는 중에서 발견한 두드러진 점은 비교적 강렬한 의뢰심으로서 이 역시 박해가 끊임없이 발생함을 조성한 주요 원인중의 하나이다.
우리 지역에서 몇 년 동안 사악에게 박해받은 대부분은 앞에서 일하는 동수들이다. 정체적인 전반 국면에서 보면 각지에서 박해받은 동수들은 자료를 만들고, 자료를 배포하며, 직접 만나서 진상을 알려주고, 협조를 하며, 기술을 하는 사람들이다. 우리 시 동수들이 몇 차례 박해에 견주어 안으로 찾을 때 모두 의뢰심이라는 그림자를 발견하였다. 의뢰심은 자료 만드는 수련생을 바빠서 쩔쩔매게 하고, 협조인의 집을 문전시장이 되게 하고 지치도록 바쁘게 하며, 기술 동수들이 바빠서 법공부 할 시간이 없게 한다. 적지 않은 동수들의 법공부, 연공, 진상 알리기는 전부 다른 사람에게 의거하여 이끌린다. 큰 일, 작은 일 등은 협조인이 안배하고, 대법책, 전자책, mp3, 진상자료는 전부 동수에게 의지하여 만들고 있다. 문제에 부딪칠 때면 법 공부를 통해 답안을 찾을 줄 모르거나 찾기 싫어하는데, 수련생이 도와주기를 기다리는 등등이다.
박해가 시작된 후 적지 않은 동수들은 사부님께서 언제쯤 박해를 종료해 주시겠는가만 바랐고, 후에는 속인이 대법의 ‘억울한 모자’를 벗겨 주기를 기대하였다. 사부님께서 끊임없이 설법에서 우리 대법제자의 책임과 사명을 명시하신 후 장기적으로 존재하던 의뢰심은 또 다른 모습으로 바뀌었다. 적지 않은 해외 대법제자들은 문제가 있으면 사부님을 찾는데, 표현이 돌출하여 사부님께서는 설법에서 반복적으로 이 집착을 지적하셨다. “많은 일은 모두 이러한 것으로, 해결할 수 없을 때가 되면 사부를 찾는다. 많은 때 내가 수련생을 만나고 싶지 않은 데는 원인이 있다. 사실 나는 당신들과 함께 있기를 몹시 원한다. (박수) 오늘날 이 사회 속에서 여러분이 보았다시피 이 사회의 사람들은 어떤 모양으로 변했는가? 나는 그들의 그 더러운 마음과 행위를 전혀 보고 싶지 않으며 나는 대법제자들과 접촉하고 싶다. 그러나 내가 일단 당신들과 접촉하기만 하면 당신들은 즉시 많은 문제들을 다 가져오는데, (뭇 사람 웃음) 당신들이 수련 중에서 마땅히 수련해야 할 많은 것들을 모두 나에게 밀어주고 있다. 그러므로 방법이 없기에 또한 감히 당신들과 만나지 못하는 것이다. (뭇 사람 웃음)”(《미국 수도법회설법》)
우리 가슴에 손을 얹고 자신에게 물어보자. 대법제자의 의뢰심은 사부님의 정법을 교란하고 있지 않는지? 우리가 문제를 사부님께 밀어 줄 때, 우리는 마땅히 더는 사부님께 불필요한 걱정을 끼쳐 드리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사부님께서는 법을 완정하게 우리에게 남겨 주셨으므로 우리가 어떻게 실천하고 실증하는가를 보아야 한다. 문제가 있으면 사부님을 찾는 것이 마치 아주 자연스런 일인 것 같지만, 제자는 사부님을 위해 생각해야 할 본분이 있는 것이다! 또한 사부님께 걱정을 더해 주지 않고 공경하는 마음이 있어야 할 것이다!
대륙에서는 사부님을 찾을 수 없으므로 많은 사람들은 바로 동수에게 의뢰한다. 몇 년 동안 가장 두드러진 표현은 자료점에 의지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자료점이 사악의 중점적인 박해를 받는 것은 보통현상으로 되었다. 그 몇 년 동안 각지의 자료점은 모두 큰 것으로부터 작은 것으로 변했다. 곳곳에 피어나자 자료점에 대한 의뢰는 또 각 곳, 각 지역, 각 시 협조인과 기술 동수에 대한 의뢰로 변하였다.
의뢰심을 꿰뚫어 보면 실은 사심이다. 왜 남에게 의뢰하려 하는가? 마땅히 자신이 당면해야 할 것을 당면하려 하지 않고, 감당해야 할 것을 감당하려 하지 않으며, 걸어가야 할 길을 한 발 한 발씩 걸어가려 하지 않으며, 넘어야 할 고비를 넘으려 하지 않으며, 번거로움, 힘든 것, 위험은 남에게 밀어주고, 편리하고, 좋은 점, 성적은 자기에게 남긴다. 까놓고 말해서 여전히 사부님, 대법, 동수에게서 얻으려고만 하고 감당하려고는 하지 않는 사심이다.
속인도 모두 다른 사람의 시간을 쓸데없이 소모하는 것은 실제로 재물을 탐하여 생명을 해치는 것과 다름없는 것이라고 한다. 그럼 대법제자가 무조건적으로 동수의 천금과도 같고 만금과도 같은 귀중한 시간과 정력을 점용하여 수련생을 대량의 시간동안 자신을 위해 뛰어다니고 일하게 하면서 자신은 편안하게 동수의 감당을 향수하고 자신의 게으름을 방임하는데 이는 대법제자의 법실증, 중생구도를 교란하는 것이 아닌가? 사부님이 안배한 길로 가는 수련생을 교란하는 것이 아닌가? 구세력과 마찬가지 작용을 하는 것이 아닌가? 수련생을 사악에게 박해당하도록 위험한 상태로 밀어주는 것이 아닌가? 구세력은 보고 있다. 이 대법제자들은 사심이 모두 이렇게 중하여 우리를 도와 수련생을 교란하고 있구나! 그들의 이 마음은 버려야 한다. 현실 중에서의 표현이란 바로 의뢰심으로서, 사악은 누가 교란하면 누구를 박해하는 것이다.
다른 한 방면에서 의뢰심은 의뢰받는 사람에게 압력과 부담을 조성해 주는 외에 아주 쉽사리 환희심, 일하는 마음, 과시심이 일게 하고, 동수 사이에서 중시 받게 하고, 칭찬을 들으며, 숭배받고, 의뢰받게 하여 극히 큰 심성 고험을 받게 하는데 이 고험은 오히려 뭇 동수들이 가해준 것이다. 만약 착실한 심성기초가 없고, 청성한 의지(理智)와 정념이 없다면 넘기가 어려운데, 교훈이 너무도 많다 !
“대법제자가 곧 정정당당하게 대법제자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며 의지하려는 어떠한 생각도 다 없다면, 사악도 감히 당신의 틈을 타지 못하며 나쁜 것은 당신을 보기만 해도 도망간다. 왜냐하면 당신은 그것이 잡고 틈을 탈 수 있는 어떠한 누락도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수련생을 박해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바로 수련생이 집착하는 틈을 타서 비로소 그것이 수련생에 대한 박해를 조성한 것이 아닌가?”(《2005년 샌프란시스코법회 설법》)
사부님께서는 매 대법제자마다 법을 실증하는 가운데서 자신의 길을 걷고, 매 사람마다 모두 단련 성숙되기를 기대하신다. 가령 우리가 여전히 자신을 이끌리고, 안배받고, 협조받는 위치에 놓고, 근본적으로 개변하지 못하고 있으며, 기다리고, 의지하고, 바라는 관념과 상태에 있다면 어찌 신우주의 왕과 주가 될 자격이 있겠는가? 어찌 하나의 세계를 독립적으로 주관할 수 있겠는가? 어찌 자기 세계의 중생을 책임진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의뢰심은 남을 해치고 자신을 해친다. 동수들께서 이 문제를 중시하고, 참답게 법으로 자신을 가늠할 것을 진심으로 바란다. 우리 청성할 때가 되었다!
인식에 제한이 있으므로 동수들께서 자비로 지적해 주기 바란다.
문장발표 : 2010년 3월 2일
문장분류 : 수련마당
원문위치 : http://minghui.org/mh/articles/2010/3/2/21907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