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밍후이왕 2010년 1월 31일】 ‘위사(爲私)’와 ‘무아(無我)’는 상반되는 경지이고 역시 신구 우주의 부동한 특성이다. 사부님의 정법은 곧 홍대한 우주의 근본대법 ‘진, 선, 인(真, 善, 忍)’을 원칙으로, 낡은 우주의 ‘위사’의 특성을 신 우주의 남을 위하고(爲他) 무아의 특성으로 변환시켜 무량한 중생을 구도하고 층층의 우주 천체가 영생 불멸하게 만든다. 대법제자가 감당하는 무수한 우주천체는 자연히 거대한 신 우주의 조성부분이다. 그럼 우리의 수련기점의 전변은 역시 우리자신의 우주 천체의 전변을 결정하는 것이 아닌가? 전체 홍대한 우주의 신구 전변 과정을 떠미는 것이 아닌가?
수련을 여러 해 한 대법제자가 여전히 수련의 기점을 생사와 윤회를 해탈하고 원만하여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위사를 위한 기초라면 곧 수련이 간난하다고 감각할 것이고 곧 정진하지 못하고 심지어 시끄러움이나 마난에 부딪힐 것이다. 왜냐하면 낡은 세력은 모두 마난을 만들어 대법제자의 심성을 고험한다는 구실로 소위 사부님을 도와 대법제자를 성장시킨다고 한다. 낡은 세력이 대법제자의 틈을 탈 수 있는 것은 우리들이 너무도 많은 자아를 내려놓지 못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수련생을 훼멸하더라도 자기를 보존하려고 한다. 이는 최대의 위사이기 때문에 역시 낡은 세력이 검은 손을 내밀어 우리를 박해하는 제일 큰 구실인 것이다.
‘위사’는 안으로 찾는 용기가 없고 ‘위사’는 감히 자기의 잘못과 부족한 점을 상대하지 못한다. 근본적인 사심을 버리지 못하면 사실 대법의 일을 조금한다고 하여도 역시 자신이 원만하지 못할까 봐 걱정하는 것이다. 역시 최대한도로 자기를 보존하는 득실에 맴돌고 배회하는 것이다. 어떻게 신성한 상태에 도달할 수 있겠는가? 사람을 구하는 효과도 이상적이 못 된다. 반대로 위타(为他)와 무아의 기점에서 수련하면 정황은 곧 같지 않을 수 있다. 여러 가지 집착심을 놓고 말하면 두려운 마음은 일을 잘못할 수 있고 심지어 대법의 대립면으로 갈 수 있으며, 수련인이 신으로 향하는 생사관인 것이다. 질투심은 사람으로 하여금 불만이 가득하여 노기충천해하고 악념을 생기게 한다. 동수에 대해서도 선하게 대하지 못하고 질투심을 버리지 못하면 사람이 수련하였던 모든 것은 모두 취약하고 수련자로 하여금 정과를 얻지 못하게 한다. 만약 ‘위타’와 ‘무아’의 기점에서 두려움과 질투심을 제거하면 쉽지 않겠는가? 긍정적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신우주의 도리를 수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우주의 특성은 곧 ‘위타’인 것이다. 천의를 따르는데 수월하지 않겠는가?
사실 모든 좋지 못한 마음의 근원은 모두 ‘사(私)’인 것이다. 대법제자는 용기 백배하여 마음을 굳게 먹고 근본적으로 자기가 아닌 ‘사’를 제거해야 한다. 대법제자의 일체는 대법으로 구성된 것이다. 무슨 일을 하여도 먼저 남을 생각한다면 낡은 세력이 우리를 박해하려는 핑계가 있을까? 또 감히 우리를 박해할 수 있겠는가? 또 우리의 틈을 탈수 있겠는가? 그럼 전체 대법제자는 곧 혈맥이 없는 백맥이 모두 통하는 정체가 되지 않겠는가? 우주의 바른 역량은 갈수록 커지고 구도되는 중생은 갈수록 많아지며 사부님의 정법노정은 갈수록 빨라질 것이다. 더욱 많은 ‘나’를 내려놓으면 비로소 더욱 많은 ‘타인(他)’이 생기는 것이다. 진정으로 중생을 생각하고 중생을 위해 책임지면 곧 무아한 생명은 제일 행복한 것을 느낄 것이다. 오직 무아한 생명만이 불은호탕의 더욱 깊은 내포를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얕은 견해이므로 동수들이 자비로 지적해주기 바란다. 허스
문장발표: 2010년 01월 31일
문장위치: 수련마당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0/1/31/217271p.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