简体 | 正體 | 대법서적

자비와 선해(善解)에 대한 깨달음

글 / 광주 대법제자

【명혜망 2009년 11월 7일】 사부님의 《2004년 뉴욕 국제 법회 설법》을 통해 병업가상에서 벗어났다는 동수들의 여러 편 문장을 읽고 나도 자신의 공간장에 대하여 청리를 진행하였는데, 결과적으로 즉시 효과를 보아 줄곧 나를 일년 가까이 곤혹케 하던 “상초열” 병업이 깨끗이 사라졌다. 이전에 나는 머리가 고무공처럼 부풀어나고, 눈이 뿌옇게 되어 보이지 않았으며, 입안은 쓰고 텁텁하면서 괴상한 냄새가 났었다.

최초에는 광동(广东)이란 이곳의 물이 뜨겁고 풍토가 맞지 않아 이렇다고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남편도 상초열로 머리에 부스럼이 나서 약을 다리고 바르느라 야단법석이었기 때문이다. 얼마 후에 나는 부정하였다. 연공인이 마음을 깨끗이 하고 욕심을 제거하면 어찌 열이 날 수 있겠는가? 다시 말해서 열이 나는 것 역시 속인에게 존재하는 병의 일종이다. 어릴 때 나는 늘 머리가 아팠는데, 어떤 때는 막 생각만 해도 병이 곧 도지고는 하였다. 그럴때면, 연공인은 속인의 병을 얻지 않는다 하고 부정하기도 하였다. 사부님께서 진작 청리하셨는데 이것은 꼭 교란일 것이다. 하지만 이 정념도 두뇌가 청성하지 못하면 그렇듯 약소하였다. 이틀이 지나 또 생각하였다. 나의 심성문제가 아닐까?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머리에서 기가 맴돌면서 내려오지 못하는 그런 상황이 아닐까? 하지만 대법제자는 응당 진작부터 기의 층차에 있지 말아야 하는 것인데. 세 가지 일도 줄곧 잘하지 못하여 아주 어쩔 수 없는 모양이 되어 버렸다. 책을 많이 보자 해도, 보기만 하면 졸리고 발정념으로 청리하자 해도 5분도 안 되어 자버리고, 나중에는 네 개 정각 발정념도 완수할 수 없어 정념이 강한 상태는 갈수록 적어지고 마음속은 갈수록 착실해지지 못하게 되었다. 어떤 때는 또 자신은 젊은 사람인데 하루 3~4시간만 자면 잠을 너무 적게 자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더 많이 잤다. 자고나도 머리는 그냥 맑지 못하였다. 그리고 또 늘 일을 쉽게 잊어버렸는데 머리가 말을 들어주지 않아 사업상에서도 몇 번이나 오차가 생겼다. 정상적인 생활마저 피로하여 대충 대처하였다. 앉기만 하면 두 눈이 맞붙어 흐리멍덩하여 잠들곤 하였다.

원래 집안 식구들은 내가 수련하는 것을 줄곧 반대하였으므로 그들 앞에서는 그래도 정신이 나는 모습을 나타내야 하였다. 나는 몹시 고생스럽게 느껴졌다. 몸은 천근같이 무거웠고, 길을 걸으면 날것 같은 수련인의 그런 정신이 충만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 부분에 대한 설법에 따라 발정념을 해도 효과는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왜 이렇게도 효과가 좋은 것인가? 나는 생각하였다.

1. 동수의 깨달음을 보고 신심을 증강할 수 있었고, 교란에 대해 보다 분명한 인식이 있게 되었고, 법리가 똑똑해졌다

2. 최근 한 차례 자비에 대한 이해와 깨달음이 깊어져, 교란요소를 선해할 때의 힘이 더 순수하고 더 커졌다. 나는 70년대에 태어난 대륙 대법제자로서 어려서부터 생명을 무시하는 자사(自私)적인 당문화의 관념속에서 생활하였으므로 모순에 부딪치기만 하면 우선 사람을 다스릴 생각부터 하던 습관을 대법에서 분명한 인식과 귀정을 얻지 못하였던 것이다. 이 이전의 아주 긴 시간 동안, 사부님 정법(비록 사부님께서는 아주 분명히 말씀 하셨지만)을 이해하지 못하고, 생명은 언제나 신진대사를 하게 마련이므로 도태할 것은 도태해야 한다고 여겼던 것이다. 비록 매번마다 사부님은 정말로 너무너무 자비하시다고 느끼긴 했지만 악한 짓을 자꾸 하는 그런 사악에 대해 사존께서는 그렇듯 많은 것을 지불하는 것이 너무도 값없다고 늘 여겨왔으므로 그래서 자신은 태만해졌던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사실은 자신이 안일을 추구하고 현황에 만족하면서 더 많이 지불하고 싶지 않은 생각으로부터 나온 원망하는 마음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이는 무서운 사심이 작간을 부린 것이다. 이 사심은 이렇듯 크고 이렇듯 깊었는데 이번에는 끄집어내게 되었고, 사부님의 무사박대하신 흉금을, 대법제자는 실로 아직도 완전히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더 느끼게 되었다.

또 한 가지는 남의 착오를 깔보는 것이었는데, 나쁜 사람을 원망하는 것이 마치 원수를 대하는 듯 하여 한바탕 교훈을 주지 않으면 내키지 않았다. 이는 아들이 말을 듣지 않고 잘못을 저지를 때 밉다 못해 내동댕이 치고 싶었던 그 마음에서 나타났다. 한 번은 다섯 살 된 아들이 나에게 혼난 후 눈물을 흘리며 말하였다. 엄마, 엄마는 왜 나한테 이렇게도 사나워? 나는 그만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그래, 내가 왜 이렇게 사납지? 나도 자신에게 물었다. 남의 착오를 지적할 때 언제나 목소리와 얼굴빛이 사납다. 마치 이렇게 하지 않으면 마음속 원한이 풀리지 않는 듯 하고 자기 감정을 충분히 표현하지 못하는 듯 하다. 그러고도 반나절씩 불평이 분분하다. 어떤 때는 틀렸다는 감도 느꼈지만 인식은 여전히 분명하지 못하였다.

이 일에서 나는 진정으로 우주 생명을 소중히 대하시는 사부님의 거대한 자비를 깨닫게 되었고, 자비와 선의 역량을 체득하게 되었다. 무엇 때문에 내가 예전에는 발정념으로 제거해 버릴 수 없던 것을 내가 진정으로 일체를 순수한 자비심으로 선해한 후에는 말끔히 사라졌는가? 한 방면으로는 중생은 참으로 구원받기 위해 왔으며, 다른 한 방면으로는 대법제자는 참으로 더 크고 진정한 대자비심을 수련해낼 것이 필요하다. 우리가 잘 수련하는가 못하는가는 참으로 중생의 미래를 결정한다.

생명은 법을 위해 왔다. 비슷한 곤혹이 있는 동수들은 마음을 조용히 하고 순수한 자비로 사부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자신 공간장의 교란요소를 선해해보는 것도 무방할 것이다. 천만년의 윤회속에서 필경 우리는 얼마나 많은 악연 (惡缘)을 맺었고, 또 구세력은 도태시키려 하지만 사부님께서는 구도하려 하시는, 우리가 자신을 귀정한 후 구도 받기를 기다리는 우주 요소가 아직도 얼마나 될 것인가.

오직 진정한 자비만이 악연을 선해할 수 있고, 교란을 선해 할 수 있다. 개인의 자그마한 깨달음로서 참고로 드릴 뿐이다.

주 : 사부님의 설법은 아래와 같다.

“만약 아주 나쁜 것이라면 당신은 그것을 깨끗이 제거해 버려라. 때론 다른 방법을 써도 효과가 아주 좋은데, 극단적 처리 방법이라고 할 수 없다. 당신은 이런 일념을 내보낼 수 있다 ── 우주는 정법(正法) 중에 있는데 내가 법을 실증하는 것을 교란하지 않는 것이라면, 나도 너희들에게 모두 합리적인 배치를 해주어 미래의 생명이 되게 할 것이다. 선해(善解)하려고 하는 자는 나를 떠나 나의 주위의 환경 중에서 기다려라. 만약 정말 나를 떠날 능력이 없는 자는 어떠한 작용을 발휘해서 나를 교란하려고 하지 말라. 장래에 내가 원만할 때면 내가 너희들을 선해(善解)시켜 줄 것이다. 완전히 나쁜 것들, 아직 나를 교란하고 있는 그런 것들은, 표준에 따라 남길 수 없는 것들은 제거할 수밖에 없다. 내가 제거하지 않아도 우주의 법 역시 너를 남겨두지 않는다 —— 만약 당신이 이런 일념을 내보낸다면 극히 낮은 일부 생명들에 대해 말하자면 너무나도 자비로운 것이다. 아직까지도 교란하고 있는 그런 것들을 제거하기도 쉬울 것이다.”(《2004년 뉴욕국제법회설법》)

 
문장발표 : 2009년 11월 14일
문장분류 : [수련마당]
문장위치 : http://minghui.org/mh/articles/2009/11/7/212046.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