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대륙 대법제자
【밍후이왕 2009년 11월 2일】 밍후이왕에는 어린 대법제자의 교류문장이 많이 오른다. 집에도 어린 제자가 있기 때문에 나는 이런 방면의 문장을 눈 여겨 보곤 한다. 나는 한 가지 상황을 발견하였는데 바로 국내에서 일찍 부모를 따라 법을 얻었던 어린 제자들이 십여 년을 수련하였는데도 여전히 어린 제자의 신분으로 자처하기 좋아한다는 것이다. 어떤 제자는 이미 대학에 들어갔고, 21살 22살이 되었는데도 교류 문장에서는 여전히 자신을 대법 ‘소제자’라 칭하였다. 국외 동년배 대법제자들은 많은 신수련생을 포함하여 그들은 모두 자신을 ‘대법제자’ 혹은 ‘젊은 대법제자’라 부른다. 밍후이왕 2009년 10월 20일 문장 ‘젊었다고 수련의 표준 낮추어서는 안 된다’를 읽고 우리도 이 방면의 동감을 써내고자 한다.
우리 알다시피, 속인은 18세가 되면 성년이 되고, 공민의 권리와 의무를 이행해야 하며, 한 공민으로서의 법률적 책임을 감당해야 한다. 그런데 18세가 넘은 대법제자가 도리어 아직도 자신을 대법 ‘소제자’라 부르는데 여기에는 속인의 자라기를 바라지 않는, 사회 책임을 짊어지기 싫어하는 그런 마음이 있는 게 아닌가? 자신에 대한 요구를 느슨히 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는 게 아닌가? 그렇다면 대법제자로서 아직도 사부님더러 그물의 한 면을 열어놓았으면 하는 마음이 있는 게 아닌가? 사부님께서 수련의 표준을 낮추어 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있는 게 아닌가? 사부님께서 자신에게 정법에 대한 책임을 감소해 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있는 게 아닌가?
바로 ‘젊었다고 수련의 표준 낮추어서는 안 된다’ 란 문장에 쓴 것처럼:
“여태까지 나는 모두 ‘대법 소제자’로 자칭하였는데 교류문장에 이름을 쓸 때 ‘대법 소제자’의 ‘소’자를 마땅히 지워버려야 할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자신을 실증하려는 마음을 아직도 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의 나는 이미 소제자로부터 청년 대법제자로 성장했으므로 꼬마 동수와는 아주 큰 구별이 있다는 것을 아직도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가《색욕을 깊이 파헤치다》란 문장을 보고 나서야 심심한 창피와 탄식을 느끼게 되었다. 작자의 나이는 나와 비슷하였지만 그가 써낸 심득교류문장은 아주 성숙되었고, 심도가 깊었으며, 이름을 쓸 때마저도 ‘청년대법제자’라고 썼다. 그런데 나에게는 여전히 ‘자라고 싶지 않다’는 속인의 마음이 있었는데 그 근원을 파 보고 나서야 자신에게 고생을 두려워하고, 생활의 압력을 감당하기 싫어하며, 수련에서는 자신에 대한 요구를 느슨히 함으로서 집착을 덮어 감추고 자신의 역사적 책임을 회피하려 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수련은 엄숙한 것이며, 수련의 표준은 나이가 젊다 해서 낮추어 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 젊은 대법제자들은 반드시 이 한 점을 인식해야 한다.”
사실, 이 마음 ㅡ 나이 때문에 수련 표준을 낮추려는 이 마음은 젊은이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연세가 많은 분들에게도 있으며,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는 발견할 수 있다. 이를테면 7, 80세가 된 많은 동수들은 세 가지 일을 아주 잘하고 계시는데 그들은 연세가 많다고 해서 태만하지 않다. 그런데 어떤 수련생은 세 가지 일도 아주 잘하고 있지만 그들의 말 가운데는 수시로 “나 이 50이 넘은 할머니를 보라고”, “나 이 50살이 넘은 노인을 봐.” 하는 말을 늘 듣게 된다. 50살이 넘었으니 이젠 자기가 늙었다고 여기는데 이건 속인의 관념으로 자신에게 정의를 내리는 게 아닌가? 이건 우리 스스로 늙은 것을 구하는 게 아닌가? 사부님께서 ‘노인의 수련 표준’을 주시기를 바라는 것이 아닌가?!
수련의 표준은 젊었다고 낮추어 지는 게 아니며, 수련의 표준은 늙었다고 낮추어 지는 게 아니다. 우리의 칭호는 오직 하나 뿐이다. 그것은 바로 ‘정법시기 대법제자’이다.
이상은 개인 인식이므로 부당한 곳은 동수께서 자비로 지적해 주기 바란다. 허스
문장발표 : 2009년 11월 2일
문장분류 : 수련마당
문장위치 : http://minghui.org/mh/articles/2009/11/2/21171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