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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수련할 줄 아는가?

【밍후이왕 2009년 10월 29일】아주 많은 수련생은 매일 법공부하고 있으며 어떤 수련생은 또 법을 외우고 있다. 그러나 일단 일에 봉착하면 무엇 때문에 수련인 답지 않은가? 나는 오랫동안 생각해왔고 하나의 문제를 발견했다. 어떤 수련생은 법을 공부하고 있으나 법은 법이고 그는 그이다. 양자는 연계되어 있지 않으며 마치 일종 물건이 간격을 이루고 있는 것 같다. 그의 생활 속에서 일에 부딪히면 법을 생각하지 못하며 안으로 찾는 것은 더욱 담론할 수 없다.

법공부하는 것은 법을 사용하고 법을 운용하여 봉착한 모든 일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다. 법을 운용하여 자신의 사상 속의 일체 미혹과 이해되지 않는 것을 해결하며 법을 운용하여 자신의 일체 번뇌와 고통에서 해탈되는데 이르기 위한 것이다. 어떤 수련생은 안을 향하여 찾아야 함을 알고 있으나 어떻게 안을 향하여 찾아야 할지 모른다. 내가 여기건대 안을 향하여 찾음에 우선은 법공부를 착실히 해야 하고 의거할 법이 있어야 한다. 또 하나의 관건적인 문제는 어떻게 법과 자신의 주의식을 연계시키는가 인데 이것이 가장 관건적인 ‘깨달음’이다.

나는 96년도에 법을 얻었다. 그때 나는 고등학교 일학년이었다. 나는 사부님의 전기에서 이런 하나의 이야기를 본적이 있다. 사존께서는 8세 때 눈가에 ‘真, 善, 忍’세 글자가 새겨졌고 시시각각 ‘真, 善, 忍’을 볼 수 있었으며 언제나 ‘真, 善, 忍’에 따라 자신의 일언일행을 지도할 수 있었다. 나는 하나의 방법을 생각해냈다. 바로 끊임없이 ‘真, 善, 忍’을 염했다. 길을 가면서도 ‘真, 善, 忍’을 염했고 가만히 있을 때에도 ‘真, 善, 忍’을 염했다. 이렇게 하기를 언제 어디서나 ‘真, 善, 忍’이 눈앞에 보일 정도로 염했다. 법을 외우는 목적은 바로 이런 하나의 목적이며 자신이 심성제고를 해야 할 일에 봉착해서 능히 법을 생각해내려는 것이다. 이것은 관건적인 일보이며 이 일보를 해내지 못하면 안을 향하여 찾는다는 것은 담론할 바가 못 된다. 나는 장시간 ‘真, 善, 忍’을 염했는데, 일에 봉착해서도 ‘真, 善, 忍’을 염했으며 그때가 되면 ‘真, 善, 忍’을 염하는 한편 능히 어떻게 ‘真, 善, 忍’에 따라 일을 할 것인가를 생각했다. 그러자 곧 능히 법에 따라 자신의 언행을 가늠할 수 있었고 능히 안을 향하여 찾을 수 있었다. 안을 향하여 찾을 수 있으니 법을 운용할 수 있었고 천천히 수련할 줄 알게 되었다.

먼저 법공부를 잘하고 법을 외우고 나면 일에 봉착해서 능히 법을 생각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능히 법으로 자신의 언행을 지도할 수 있으며 그 다음에야 능히 법을 운용하여 자신의 일사일념을 가늠할 수 있다. 자신의 일사일념을 모두 능히 법 속에서 바로잡을 수 있고 자신을 늘 법 속에 용해시킬 수 있다면 당신은 너무나 잘 수련할 줄 아는 것이다. 문을 나서던지 집에 있던지 일에 봉착하든지 아니든지 마찬가지로 신속히 제고할 수 있으며 이것이야말로 대법제자가 아니겠는가!

문장발표: 2009년 10월 29일

문장분류: 수련마당
문장위치: http://minghui.org/mh/articles/2009/10/29/21131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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