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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을 향해 찾으면 막다른 곳에서도 길이 열려

글/ 흑룡강 대법제자

[명혜망 2009년 8월 10일] 십여 년간 수련을 하면서 매 번 관건적 시각에 이를 때마다 모두 사부님께서 나를 부축해 주셨기에 비로소 오늘까지 걸어올 수 있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의 나는 참으로 무슨 꼴이 되었을지 감히 생각조차 할 수 없다. 나는 안을 향해 찾는데 대한 인식을 말하고자 한다.

안을 향해 찾는 것은 수련 과정 중에 자신을 잘 수련할 수 있는 법보로서, 사부님께서 줄곧 강조하신 것이므로 대법제자마다 모두 마땅히 이렇게 해야 한다. 그런데 구체적인 문제에 직면했을 때 안으로 찾는 방법은 서로 같지 않다. 어떤 사람은 일에 부닥치면 우선 비자각적으로 밖을 향해 보고 그 다음에 자신을 찾아보는데, 완전히 안을 향해 찾지 않은 것이다. 이는 일종 형식적으로 안을 향해 찾는 것이므로 진정한 작용을 일으키지 못한다. 안을 향해 찾아야 하는 것으로 자신을 수련하는 것에는 그 어떤 조건이 없다. 우리가 법을 실증하는 중에 협조가 일치하지 못할 때, 당신이 마음을 내려놓지 못하고 지나가지 못할 때, 이는 안을 향해 찾아보는 가장 좋은 시기이다. 무슨 원인으로 이런 상태가 빚어졌는지 보면 사람마음이란 것을 당신은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당신을 가로막고, 당신을 지나가지 못하게 한다. 그러므로 그것을 찾아내고 뽑아 버리면 사람마음이 없어지고, 당신의 마음은 즉각 넓어지고 명랑해 질 것인바, 그 감각이란 그야말로 막다른 곳에서도 길이 열리는 기분이다.

세 가지 일을 하는 중에서 내가 체득한 것은 안을 향해 찾으면 동수간의 간격을 제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 세 수련생은 늘 함께 모여서 우리 지역의 일을 상의하곤 하는데, 나는 후에 그들에게 합류한 사람이다. 하지만 두 수련생은 오랫동안 함께 했고 평소에도 사이가 아주 좋았다. 어떤 일은 인식이 부동함으로 하여, 법리에 대한 이해가 부동함으로 인해 문제를 처리하는 방식이 부동하였는데, 어떤 땐 의견이 일치하지 못했다. 사실 그 모두가 정상적인 것인데 나에게 사람마음이 있어서 나는 아주 난처한 감을 느끼곤 하였다. 어느 한 쪽을 동의하면 다른 한 쪽에 이의가 있을까 두려워 나는 견해를 발표하지 않았고, 법을 실증하거나 개인 씬씽 제고에 영향이 조성될까봐 두려워하였다. 하지만 내가 그렇게 할수록 그녀들은 더 나에게 그렇게 해서 나는 마음이 산란해 조용할 수 없었고, 법 공부도 교란을 받았다.

법 공부를 하면서 나자신을 대조해 보니 자신에게 문제가 있음을 보아 냈다. 나에게는 남의 미움을 살까봐 두려워하는 마음, 자신이 상해를 받지 않도록 보호하려는 위사위아한 마음이 있었던 것이다. 법의 기점에 서서 원용하지 않았으며, 누가 말한 것이 법에 부합되고, 법 실증에 유리하면 누구의 것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눈치를 봐가며 했던 것이다. 나 자신의 이런 마음을 찾아낸 후 이런 현상은 갈수록 옅어졌고, 갈수록 적어졌다. 원래는 죄다 나의 이 마음이 촉성시킨 것이었다. 여러 사람은 세 가지 일을 잘하는 길에서 갈수록 견고해 졌다.

누군가 말하였다. “가정은 바로 작은 사회이며, 사회상의 일체는 모두 가정 중에 반영될 수 있다.” 나는 아들,딸을 두고 있고, 외손자, 손녀도 모두 있다. 식구 여럿이 함께 있으면 좋을 때는 아주 즐겁지만 모순이 오면 아주 짜증이 나곤 했다. 다른 가정과 마찬가지로 우리 집도 매 번 일요일에 식사가 끝나서 남은 음식은 모두 가지고 간다. 자식들이 오기만 하면 나는 반찬을 볶고 밥을 짓느라 반나절을 바삐 보내고, 그들이 돌아가면 또 집안을 정리하느라 반나절이 걸렸다. 이렇다 해도 나는 원망이 없었다. 나는 수련인이므로 누구나 좋게 대해야 하고, 될수록 이 가정을 잘 평형하고 그들이 모두 만족을 느끼게 해야 한다고 생각 했다.

하지만 어느 날 집에 손님이 왔을 때 손녀가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것이었다: 우리 집에서는 할아버지가 좋고 할머닌 나빠. 그 당시 나는 참을 수가 없었다. 마음속으로 무엇이든 내가 마련하고 내가 지불하고, 내가 했는데도 나쁘다고 하니, 나의 공헌, 나의 노동을 되찾아 와야겠다는 이런 생각이 났다. 따라서 다른 사람 앞에서 나의 체면이 깎였다고 말했고, 마음이 아프고, 속이 불편 하였다.

왜 이런가? 연공인이 만나는 무슨 일이던 모두 우연한 일이 아니고 연고가 없는 것이 아닌데, 내가 무슨 마음을 내려놓지 않아서인가? 원래 나는 자식 정에 너무 집착 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이며, 게다가 체면을 돌보는 허영심도 내려놓지 못했던 것이다. 자식에 대해 늘 안심하지 못해 이 자식 걱정을 하다가 잠시 후면 또 저 자식을 염려하면서 나를 떠나면 그들이 모두 살아가지 못할 것처럼 여겼다. 허영심이 아주 강하다보니 젊어서는 남에게 말하지 못하게 하였고, 자신이 고생할지언정 체면만을 잃지 않으려 하였다. 이는 얼마나 위험한 마음인가? 이런 마음을 지니고서야 어디로 갈 수 있겠는가? 어디도 갈수 없는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말씀 하셨다: “육친정(親情)에 집착함은, 기필코 그로 인해 지치고 얽매이며 마에 사로잡히게 됨이라, 그 정사(情絲)를 잡아 쥐어 일생토록 방해받으니, 나이가 들면 후회해도 이미 늦은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하자 나의 마음은 확 트이면서, 이 마음을 찾아내고 그것을 버릴 수 있다는 게 기뻤다. 그 때 아들이 손녀를 비평하는 소리가 들렸는데 아들은 내가 화를 낼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 나는 웃으면서 손녀가 나를 도와 집착심을 버리게 했으니 괜찮다고 말하였다. 내가 이렇게 말하자 모두들 웃었다.

이상은 내가 안을 향해 찾은 조그마한 체득이다. 나 자신을 잘 수련하려면 반드시 안을 향해 찾아야 한다는 것을 더욱 심각하게 인식 하였다. 이는 입으로 말해서 있거나 없는 것이 아니므로 실제적으로 행동해야 하지 그렇지 않다간 제자리 걸음이 될 것이고, 전진하지 않으면 후퇴해야 할 것이다.

처음으로 쓴 원고인 만큼, 부당한 곳이 있다면 지적해 주기 바란다.

문장분류 : 수련마당

문장위치 :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09/8/10/206219p.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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