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북미 대법제자
【명혜망 2009년 8월 4일】 하루는 집에서 만두를 빚는데 아내는 만두피를 밀고 나는 만두를 빚었다. 만두를 빚는 과정에 나는 아내에게 만두피를 작게 밀었다고 탓했다. 아내는 나에게 “당신이 빚은 만두소가 너무 큰 거에요.” 라고 대답했다. 비록 몇 년 전의 일이지만 간단한 두 마디 말이 나에게 아주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것은 본래 생활 속에서 온 아주 흔한 대화에 불과하지만 수련의 각도에서 본다면 도리어 아주 큰 문제를 반영하는데 바로 모순이 있을 때 밖으로 찾으며 자신을 보지 않고 상대방의 잘못을 보는 사유가 아주 자연스럽게 형성되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입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수련하기 전에 영국 소설『걸리버 여행기』를 본 적이 있는데 그 안에 ‘대두당(大頭黨)’, ‘소두당(小頭黨)’ 이란 것이 있었다. 바로 계란을 먹을 때 어떤 방식으로 알을 부술 것인가 하는 것이다. 대두당은 계란을 먹을 때 응당 계란이 큰 쪽을 깨야 한다고 여겼고 소두당은 작은 쪽을 깨야 한다고 여겼다. 쌍방은 의견이 같지 않아 서로 양보하지 않았고 다툼이 그치지 않았다. 수련한 후 속인은 자신의 조그마한 관념을 위해 서로 불복하고 서로 양보하지 않으며 다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위의 만두를 빚는 일에서 모순이 있을 때 다른 사람의 잘못을 찾으려는 이런 것은 현대 인류의 일반적인 폐단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의 수련 중에서, 법을 실증하는 항목에서 모두 이런 속인의 사유 현상에 대해 응당 생소하지 않을 것이다. 어떤 대법제자는 항목 협조를 잘하지 않는데 배후의 원인은 모두 자아에 집착하고 자아를 수호하기 때문이다.
수련하기 전에 나는 비교적 세상만사에 무관심했으며 명(名)에 대해서도 좀 담담했다. 그러나 지식인들의 일부 ‘고결(高潔)’한 심태가 있었다. 수련한 후 점차적으로 고결과 오만, 자신이 대단하다고 여기는 것은 모두 유사한 점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바로 이것들의 배후에 모두 자아를 집착하고 모두 자아가 비교적 강한 표현들이며 잠재의식에서조차 자신도 모르게 자아를 수호하고 있다. ‘고결’에는 또 한 가지 문제가 있는데 쉽게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고 눈에 거슬려하며 쉽게 다른 수련생의 부족한 점을 본다. 다른 수련생의 부족을 그다지 너그럽게 대하지 않으며 자신의 부족을 안으로 찾지 않고 자신의 건드려진 사람 마음을 버리지 않는다. 나는 이전에 이렇게 수련하여 제고할 기회를 적지 않게 놓쳤다.
착실한 수련은 무조건 안으로 찾아야한다. 착실하게 수련 제고하는 기회는 방방면면에서 표현되는데 가정에서, 직장에서, 사회에서는 물론이고 동수들과 함께 법을 실증하는 과정도 당연히 포함한다. 어떤 환경에서나 자신을 수련인으로 간주하고 자신의 일사일념을 법에서 떠나지 않도록 지켜야 한다. 한번은 우리 지역의 한 진상항목 협조인을 바꾼 적이 있다. 당시 나는 새로운 협조인이 사람마음이 많아 감당할 수 있을까 의심하는 사람의 염두가 나타났는데 사실 수련생을 업신여긴 것이다. 그러나 아주 빨리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인식했다.
사부님께서는 매 하나의 대법제자가 성취를 이루게 하려고 하시는데 새로운 협조인의 상태가 어떠하던지 막론하고 자신의 이 일념은 이미 이 항목에 어려움을 증가시켰다. 왜냐하면 이 일념이 다른 공간에서 좋지 않은 물질이 되어 앞을 가로막고 교란하는 작용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만약 더욱 많은 동수들이 모두 나처럼 이 협조인(혹은 기타 항목의 성원)에 대해 견해가 있다면 그럼 그 항목을 아직 하기도 전에 이미 다른 공간에 아주 큰 어려움을 설치한다. 이 어려움과 관은 완전히 우리들의 사람 마음으로 조성한 것이다.
이 일에 대한 반성을 통해 나는 일사일념을 수련하는 중요성을 진일보로 인식했으며 또 자신이 이전에 의식하지 못했던 한 가지 병을 발견했다. 즉, 입으로는 말하지 않지만 속으로 동수에 대해 평가하고 판단하는 것이다. 만약 법으로 대조해본다면 자신의 평가나 혹은 판단이 종종 사람의 관념이고 정체배합에 영향을 끼치며 법을 실증하는 효과를 깎아 내릴 수 있다.
사부님께서는 일찍이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大法의 전통을 유지하고 大法의 수련원칙을 수호하며 착실한 수련을 견지함은 매 한 大法弟子의 장기적인 고험이다.”(『정진요지』「속인의 마음을 내려놓고 착실히 수련을 견지하자」)
착실한 수련은 우리에 대한 법의 요구이다. 단지 시간이 긴박하고 일이 많을 때면 쉽사리 자신을 느슨히 하거나 혹은 법을 실증하는 일을 한다고 여기고 착실한 수련의 의식을 늦춘다. 일부 동수들과의 교류를 통해 이것이 현재 비교적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일종 현상임을 발견했다. 각종 진상 항목을 하느라 바쁘다는 이유로 자신의 수련제고를 느슨히 한다면 마치 일하는 것으로 마음수련을 대체하는 것과 같고 착실한 수련을 남의 일로 간주하는 것과 같다.
사부님의 신경문『축사』의 발표는 정법이 “사악이 끝장나고, 환경이 변한” 새로운 단계로 진입했음을 표시한다. 새로운 환경에 직면하여 우리는 자신을 더욱 잘 수련하여 더욱 강한 정념으로 우리의 사명을 완성하도록 하자.
문장발표: 2009년 8월 4일
문장분류: 수련 마당
문장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09/8/4/205879p.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