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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련생이 나를 도와 마난에서 벗어나게 했다

글/ 산동 대법제자

【명혜망 2009년 8월 4일】 말하자면 아주 부끄러운 일이지만 나는 수련한 지 14년이 되지만, 약 10년간이나 가정관(家庭關) 속에 곤란에 처해 있었다. 남편은 늘 작은 일에도 성을 내고 나를 원망했으며 내가 하는 것이 너무 부족하다고 했다. 나는 마음속으로 불복하며 쟁투심을 갖고 그와 변론하여 해결하려 했다. 다투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또 원망하는 마음이 생겨 늘 남편이 일을 도발한다고 여겼다. 나는 자신의 어디가 잘못 되었는지 진지하게 안으로 찾은 것이 아니라 자신이 억울하다고 여겼다. 나는 또 늘 동수들에게 자신이 억울하다고 하소연하면서 불공평한 대우를 받는다고 했으며 내가 한 것이 좋고 모순이 나타나는 것은 모두 남편의 잘못이라고 했다.

나는 동수들과 관계가 좋았기 때문에 대부분 동수들은 나의 정서에 끌렸다. 나와 남편은 이렇게 맞섰으며 나는 소극적으로 감당하고 있었다. 우리는 재혼 가정이기에 딸은 나의 친딸이 아니다. 표면상 나는 ‘계모’ 역을 맡고 있지만 딸과의 심성 마찰은 체면 때문에 진심으로 동수들과 이야기하지 못했다. 이리하여 자신의 아주 많은 바르지 못한 염두를 폭로하지 못했고 아주 깊은 곳에 숨겨 덮어 감추었기에 쉽게 발견할 수 없었다.

이때 나를 아주 잘 아는 한 수련생이 나를 찾아와 교류했다. 나는 최근 몇 년간 당한 억울함과 감당한 고통을 그에게 하소연했다. 수련생은 조용히 마음을 써서 내 말을 들어 주었다. 그는 나의 감정적인 어조에 이끌리지 않았고 또 제때에 나의 각도에 서서 ‘계모’로서 나의 어려움을 이해해주었다. 나는 그의 이런 평온하고 상서로우며 포용하는 태도로부터 나에 대한 동수의 관심과 배려를 느낄 수 있었다. 그의 이런 정념장(正念场) 속에서 나의 경솔함, 우려감, 상심, 불평, 억울한 정서는 점차 약해졌고 하소연함과 동시에 나는 매우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의 완전히 나를 위한 그런 선의와 너그러움은 나로 하여금 자신의 부족한 점을 보게 하였고 또한 차이점을 찾게 했다. 나는 종래로 남편과 딸을 그처럼 자비롭고 선하게 대한 적이 없었고 완전히 다른 사람을 위한 적이 없었으며 그들의 각도에서 그들의 감수를 고려하고 그들을 위한 적은 더욱 없었다. 나는 남편과 딸에 대한 나의 태도가 표면으로만 좋은 것이지 내심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님을 보아냈다. 그리고 딸을 교육하는 기점이 위사(爲私)했기에 아이에게 나타나는 불량한 습관이 눈에 거슬려 빨리 고치라고 한 것이지 딸의 각도에 서서 진정으로 아이를 생각하고 아이를 위해 한 것이 아니었다.

딸에 대한 남편의 지나친 사랑은 나의 질투심을 유발했다. 내가 다른 사람을 눈에 거슬려하는 마음이 반대로 남편에게 표현되어 나를 거슬려하는 것이 나타났던 것이다. 사실 “다른 사람을 눈에 거슬려하는 것”은 바로 자신의 이익을 유지하려는 것이 아닌가? 나는 자신의 인식을 고집하고 자신의 사적인 관념을 수호하여 구세력처럼 다른 사람만 개변시키려 하고 자신은 개변하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대법에 비춰보고 무조건 안으로 찾아 자신을 수련한 것이 아니었으며, 더욱이 “백분의 백으로 그의 잘못이라고 여길 때면 백분의 백 자신을 보라”는 어떤 동수처럼 하지 않았다.

장기적으로 서로 맞서는 가정모순 속에서 본래 수련을 했던 남편은 수련을 포기했고 여섯 살에 법을 얻은 딸도 수련을 멀리하게 되었다. 그들의 이런 모습을 보면서 나는 응당 그들을 대신해 안타까워하고 조급해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자신이 상처를 받은 것 때문에 아주 냉담하게 대했으며 그들을 상관하려 하지 않았다.

내가 수련하는 것은 진(眞)․선(善)․인(忍)인데 나의 어디가 진(眞)․선(善)․인(忍)에 부합하는가? 나는 동수에게 자신이 자비심이 없다는 것을 보아냈다고 알려주었다.

내가 자신을 분석할 때 수련생은 줄곧 아주 평온하게 귀담아 들었으며 시시각각 선의적으로 나에게 “인식이 부족하기에 수련하며 당신은 당신이 응당 해야 할 일을 하되 상대방이 알아주는지 여부는 관계하지 말라.”고 했다.

이때 내 머릿속에는 사존의 법이 뚜렷이 비춰졌다.

“당신이 평소 늘 자비로운 마음과 상화(祥和)한 심태를 유지한다면, 문제와 마주쳐도 잘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완충적인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당신이 늘 자비롭고 선(善)으로 남을 대하며, 무슨 일을 하든지 언제나 다른 사람을 고려하여 매번 문제와 마주칠 때마다 이 일을 다른 사람이 감당해 낼 수 있는가 없는가, 다른 사람에게 해가 되는가 안 되는가를 우선 생각한다면 문제가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전법륜』)

“사실 당신들 이전의 본성(本性)은 위아위사(爲我爲私)의 기초 위에 세워진 것이다. 당신들이 앞으로 일을 함에 먼저 남을 생각해야 하고 무사무아(無私無我), 선타후아(先他後我)의 정각(正覺)으로 수련 성취해야 한다. 그러므로 당신들이 앞으로 어떠한 일을 하든지, 어떤 말을 하든지, 역시 남을 위하고 후세 사람을 위하는 데 이르기까지 고려해야 한다! 大法의 영세불변(永世不變)을 위해 고려해야 한다!”(『정진요지』「불성무루」)

사존의 가르침과 동수의 도움으로 나는 내심으로부터 나의 위사위아한 구우주의 관념이 자신의 심성 승화를 저애했음을 알게 되었다. 나의 내심으로부터 선념과 자비가 떠올라 타인을 선하게 대하고 자비롭게 가족과 중생을 대할 때 나는 그런 소위 마난이 아무것도 아님을 발견했다. 억울함과 원망은 연기처럼 사라져 심태가 평정하고 상화롭게 변했다. 되돌아 다시 남편을 보니 진심으로 그를 대신해 안타까웠고 정말로 그를 끌어올리고 싶었으며 그로 하여금 다시 수련 중에 되돌아와 만고의 기원을 잃지 않게 하고 싶었다.

자비롭고 위대하신 사존께 감사드립니다.

참되고 선량하며 그리고 포용해준 동수님 고맙습니다.

나는 수련생을 통해 어떻게 난(難) 속에 처한 수련생을 도와줄 것인지 알게 되었으며 또한 계발을 받았다. 평화롭고 자비하며 포용하는 마음으로 난에 처한 수련생을 선의로 대하고 그의 각도에 서서 그를 이해하고 그를 포용하며 그더러 당신이 진심으로 그를 위한다는 것을 느끼게 해야 하며 그를 원망하거나 질책하거나 혹은 간단하고 두루뭉술하게 안으로 찾으라고 해서는 안 된다. 더욱이 그의 정서에 휘말려 그의 말에 맞장구 쳐서는 안 된다. 차분하고 자상한 심태로 그의 어려움과 고통을 듣는다면 수련생은 당신을 신뢰할 수 있다고 느낄 것이다. 그러면 고려하는 마음이 사라져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내심의 진실한 감수를 말할 것이며 하소연하는 동시에 자연히 내심의 바르지 못한 관념을 폭로할 것이다. 수련생이 다 말하기를 기다리면 놀랍게도 수련생은 자신의 집착심을 찾아낼 수 있다!

당신의 이런 자비롭고 상화한 정념의 장은 수련생을 가지하여 올바르지 못한 사상요소를 해체한다. 수련생이 찾은 것이 그리 철저하지 않더라도 당신의 선의적인 일깨움을 아주 쉽게 받아들일 수 있으며 자신의 매듭이 어디에 있는지 찾게 되며 자신의 위사(爲私)한 관념을 틀어쥐고 그것을 제거하고 승화해 올라온다.

이상은 내가 직접 체험하고 인식한 것으로 부당한 곳이 있다면 동수들의 자비로운 지적과 시정을 바란다.

문장발표: 2009년 8월 4일

문장분류: 수련 마당
문장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09/8/4/205850p.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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