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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타(爲他)”의 정각(正覺)을 수련해내자

글 / 산동 더쩌우 대법제자

[명혜망 2009년 6월 8일] 수련에는 작은 일이 없으며 일사일념 일언일행 모두 수련해야 할 요소이다. 대법제자의 잘 수련되지 않은 부분은 낡은 우주의 법리에서 형성된 것이기에 사(私)를 위한 것이다. 새 우주의 특성은 “위타(爲他)”이다. 위사(爲私)한 부분은 정법이 결속됨에 따라 해체될 것이다. 미시적으로 보면 이 부분은 많은 생명과 대응되어 있으며 우주 자체의 원만 혹은 완전하지 못함에 대응되어 우리가 부단히 사(私)를 닦는 것은 바로 부단히 이 부분의 생명을 구도하는 것이며 자신을 원만시키는 것이다.

한 번은 동수의 집에서 교류했는데, 동수의 집 베란다는 소매점이었다. 우리 몇명은 안방에 앉고 주인 수련생은 소매점을 보면서 우리와 교류했다. 잠깐 후에 집주인의 딸이(파룬궁을 수련하지 않음) 문을 열면서 “문을 닫지 말아요. 사람들이 와서 물건을 사겠다고 해도 들을 수 없잖아요.”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내가 문을 닫은 것이 아니기에 나는 마음에 거리낌이 없었다. 그런데 어느새 누가 문을 닫았는지 문이 또 닫혀 있었다. 동수의 딸은 또 문을 열면서 “문을 닫으면 안 되요. 사람이 와서 물건을 사려 해도 듣지 못해요.”하고 말했다.

그래도 나는 “문을 닫다”라는 것이 나의 수련과 관계있다고 느끼지 못했다. 나는 화장실에 갔다 오면서 손을 내밀어 문을 닫으려는 그 순간에야 문득 이 “문을 닫다”가 작은 일 같지만 나의 수련과 중대한 관계가 있음을 느꼈다. 나는 손을 거두고 자리에 돌아와 앉았다. 내가 무엇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문을 닫으려 했는가? 나는 안을 향해 찾아보았다. 아, 두려워하는 마음, 우리의 대화를 다른 사람이 들을까봐 두려웠고 문을 닫으면 안전하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사람의 이치상의 안전은 법리의 안전에 부합되는 것이 아니다. 당연히 우리는 안전에 주의해야 한다. 기실 동수의 집에 다른 방도 있었는데, 교류하기에는 더욱 편리했다. 여기에서 나는 자신의 두려워하는 마음을 보았다. 더 찾으니 나는 하나의 숨겨져 있는, “대법제자의 안전은 중요하고 당신 속인의 장사는 부차적이다.”라는 사심을 발견했다. 장사하는 사람의 각도에서 어떻게 생각해야 하겠는가? 여기는 소매점인데 어떻게 소매점의 일을 신경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남이 대법제자를 어떻게 보겠는가? 만약 이로 인하여 구도받는데 영향이 있다면 우리들이 감당할 수 있겠는가? 이 일에서 내가 먼서 생각한 것은, 자신도 모르게 타인을 헤아리지 않고 자신을 보호하자는 일념이 있었던 것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또한 생각으로부터 행동에 이르기까지 사(私)에 이끌렸다. 나는 이 사(私)가 나 자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기 시작하였다. 나는 그것을 가지지 않겠다. 나는 대법제자이므로 “위타(爲他)”의 정각을 수련해내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교류가 끝난 후 한 수련생이 또 나에게 “가세요?” 하고 나에게 묻었다. 나는 “가지 않겠어요. 일이 있어요?”하고 대답했다. 말이 입에서 나오자 나는 창피하게 또 위사에 의해 좌우지 되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먼저 “가지 않겠다” 하고 나서 나중에 다시 “일이 있어요?” 라고 했으니 무엇 때문에 먼저 일이 있는지 없는지 묻지 않았는가 하는 것이었다. 기점은 나를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자신의 일사일념을 수련하는 것은 엄숙한 문제이며 입장을 바꾸어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동수와 교류하거나 진상을 알리는 중에 먼저 법에서 나를 어떻게 하라고 요구했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내가 말하자마자 되는 것이 아니며 상대방의 접수능력에 따라 말하고 해야 한다. 그가 진리와 구도되는 것을 인식하도록 해야 하며 선심(善心)에 따라 다른 사람의 좋은 점과 어려운 점을 많이 보고 자신을 안으로 많이 찾고 부족한 점을 닦아야 한다. 이래야 만이 일하는 것이 아니고 수련이라 할 수 있고, 홍대하고 너그럽게 참는 것을 닦아낼 수 있으며 낡은 우주 요소와의 간격을 제거할 수 있고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 일의 성공은 나의 마음이 표준에 도달하면 사부님께서는 전부 다 하시고 또 위덕을 우리에게 주신다.

마음을 조용히 하고 법공부를 하니, 나는 “안을 향해 수련하는 것”과 “밖에서 찾기”, “위타”와 “위아”의 정반 체현은 전혀 상반된 결과라는 것을 보았다.

기실 수련과정은 많은 것이 표면에서 체현되지 않으며 염두가 움직이면 법리로 짐작하고 귀정한다. 수련자 내심의 승화와 가지고 온 신체, 나아가서 대응한 천체의 거대한 변화를 사람은 모르고 수련자도 전부 볼 수 없으며 표면은 그 바른 언행만 보게 된다. 동수와의 교류는 법공부를 하고 실속 있는 수련의 “심득”과 마음을 닦아 가져온 외재적 변화에 대해 그 중점을 두어야 하며 다만 어떻게 일하는가에 제한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사람의 사적인 보고일 뿐이며 단지 기술적 교류이다.

이전에 교류할 때 나는 늘 일을 말했지 마음을 닦는 것을 말하지 않았다. 사부님께서는 수련생을 빌어 나에게 “당신은 수련할 줄 모른다.”고 방할하시어 나로 하여금 깨닫게 하셨다. 사부님 감사합니다! 동수님 감사합니다!

이상은 나의 현 단계에서의 조그마한 수련 심득이니 법에 부합되지 않는 점에 대해서는 동수들이 지적해주기 바란다.

문장발표 : 2009년 6월 8일
문장분류 : [수련마당]
원문위치 :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09/6/8/202250p.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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