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혜망 2009년 5월 13일】 작년 올림픽 전야에, 나는 많은 집착심을 내려놓지 못하여 사악이 틈을 타고 들어와 나를 납치해 노교소로 보냈다. 약 5개월 동안 불법으로 감금되어 잔혹한 박해앞에서 심성을 지켰으며 사악에게 추호의 협조도 하지 않았다. 그 후 병업의 형식으로 마귀굴에서 탈출하게 되었다. 그러나 나중에 안에서 다시 찾아보았을 때 반박해 중에서 많은 생각과 행위가 정념이 아주 강한 것 같이 표현되었지만 사실상 법에 입각하지 못했고 사람마음이 움직였다는 것을 발견했다. 구체적인 표현은 불법으로 납치되어 집도 수색당하고, 간수소, 노교소로 이동했는데 매 하나의 박해 마디에서 줄곧 발정념을 하고 법을 외웠다. 확실히 생사를 내려놓았으며 늘 자신에게 합격된 정법시기 대법제자의 표준을 일깨워 주었고, 사악의 어떠한 배치도 단호하게 승인하지 않으며 정념정행했다.
그러나 여기에 도리어 하나의 관건적인 문제가 존재한다는 것을 당시에는 깨닫지 못했다. 바로 정념정행의 목적이 아주 큰 정도상에서 박해를 면하기 위해서였다. 그 속에는 또 박해 받을까 두렵고, ‘전화(转化)’될까 두려우며 자신이 합격된 정법시기 대법제자가 되지 못할까 두려워한 등등 두려운 마음이 섞여 있었다. 전반 박해 과정에서 경찰을 사악 자체로 여겼으므로 표면적인 사람에 대한 자비심이 아주 적었다. “쩐, 싼, 런” 우주 특성으로 만들어진 위대한 생명으로서 마땅히 적이 없어야 하며 의심할 바 없는 홍대한 정념이 있어야 하는데, 이러한 정념에 위엄과 자비가 구비되었다는 것을 충분히 표현하지 못했다. 바로 사부님의 『뜻을 굽히지 말거라』중에 나오는 “사악이 발광해도 길을 잃지 않거니 사악을 제거함은 먼지 쓸 듯하여라” 구절처럼 태연하고 침착하며 비할 바 없는 자신감과 당당한 기세가 없었다.
나는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한 동수들은 반드시 이 문제에서 자신의 견해가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오늘 글로 써서 다함께 토론하고 교류하며 주의하기 바란다.
이러한 상태는 아래 몇 가지 반박해 형식을 택했을 때 가장 두드러진다.
1. “파룬따파 하오, 쩐싼런 하오”를 외침
불법으로 간수소에 감금된 기간, 줄곧 일체 기회를 이용해 복도를 향해 사부님의 시를 낭송하고, “파룬따파 하오, 쩐싼런 하오”, “파룬궁은 억울한 일을 당했다”, “불법으로 감금된 파룬궁 수련생들을 무조건 즉각 석방하라”고 외쳤다. 나는 당시 ‘만약 불법으로 감금된 다른 감방의 동수들이 모두 함께 외친다면 간수소의 악경을 진감할 수 있고, 다른 공간의 사악을 제거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20여 일이 지났지만 누구도 한 마디 응답하지 않았다. 나는 마음속으로 조금 불평했고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심지어 경멸하면서 원망했다. 속으로 이 사람들은 수련한 것이 왜 이렇게 차이가 나는가 하고 생각했다.
이런 상황과 심태는 나중에 불법으로 북경 노교인원 조견처에 감금된 기간과 외지 노교소에 감금된 기간에도 일찍이 여러 번 나타났다. 가장 두드러진 것은 불법으로 북경 노교인원 조견처에서 외지 노교소로 이송하는 차안에서였다. 당시 차안에는 모두 16명의 대법제자들이 있었다. 한 대법제자는 우리보다 먼저 압송되어 차 뒷부분에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차에 오른 후 다만 뒤에서 “파룬따파 하오, 쩐싼런 하오”하는 소리가 한마디씩 들려왔다. 그러나 오히려 사람은 볼 수 없었다. 나는 차에 오른 후 어떤 수련생이 이미 외치고 있는 것을 듣고 정말로 기뻤다. 자신도 큰 목소리로 『홍음』을 외우기 시작했고 또 한 수련생이 큰 목소리로 법을 외웠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침묵을 지켰다. 내가 옆에 있는 한 노년 동수에게 “우리 함께 외칩시다.”라고 말하자 그녀는 “무슨 소용이 있겠어?”하고 대답했다. 나는 불평하는 마음이 또 올라왔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당시에는 겉보기에 정념이 아주 강하게 보였지만 배후에는 사실 은폐된 과시심, 일을 하려는 마음이 있었다. 이런 좋지 못한 사람마음으로 인해 아주 순정하지 못했으며, 또 동수에 대한 관용과 이해가 부족했다.
나중에 불법으로 외지 노교소에 감금된 기간에, 나는 ‘전화(转化)’하지 않았고, 노교소의 노예노동을 하지 않아 줄곧 격리되어 있었다. 다른 대법제자들과 접촉하기가 아주 힘들었다. 단지 화장실에 갈 때 두 명의 노년 수련생을 만났는데 나에게 손을 흔들어 격려해주었다. 당시 상황에서 이런 격려는 아주 큰 의미가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무관심’한 표정이었다. 나는 무엇 때문에 격려를 그렇게 중하게 보았는가? 무엇 때문에 다른 사람의 표정이 ‘냉담’하다고 생각했는가? 나는 무엇 때문에 이런 ‘냉담’에 괴로워하는가? 사실 여전히 다른 사람이 긍정하는 마음을 얻으려는 바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파룬따파 하오, 쩐싼런 하오”를 이용해 반박해하는 방식의 문제에서 나는 자신의 다른 공간에 아주 큰 사람마음이 있는 것을 보았다. 작년에 처음 불법 노교당한 것이 내가 제일 처음 받은 박해였다. 간수소에 있을 때 나의 심태는 상대적으로 평온했다. 속으로 대법제자는 어디를 가든 법을 실증해야 한다고 여겼고 들어 왔으면 바로 나가야 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그러나 마음속에는 아직도 하나의 은근한 기대가 있었다. 내가 정념정행하면 사부님께서 반드시 나를 도와 정념으로 나가게 하실 것이며, 나는 노교와 판결를 받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불법 노교 통지를 받은 후 나는 단번에 마음이 불안해졌는데 마치 바다를 뒤덮는 듯했다. 나는 어디에 부족한 곳이 있었을까, 무엇 때문에 노교를 당했는가? 나를 마삼가로 보내지는 않겠지? 노교소는 대체 얼마나 사악할까? 나는 견결히 ‘전화(转化)’하지 않을 것이다. 누구도 나를 ‘전화(转化)’ 시키려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기껏해야 죽기밖에 더하겠어. 설사 죽더라도 나는 마찬가지로 원만할 수 있을 것이다.
한 무리 사람마음이 나타난 후 겉보기에는 정념이 아주 강한 결정으로 표현되었다. 나는 그들과 끝까지 대항해야 한다. 누구도 나의 파룬따파 수련을 포기시킬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한다. 동시에 사부님께서 『대뉴욕지역 법회 설법』에서 하신 한마디 말씀이 떠올랐다.
“명혜망에 한 편의 문장이 게재되었다. 어느 한 수련생이 줄곧 대법의 진상을 이야기하면서 “대법은 좋습니다”라고 외쳤다. 어디로 끌고 가든지 간에 악한 경찰이 무엇을 말하든지 나는 모두 듣지 않으며 네가 나를 모질게 때리고 욕해도 나는 여전히 이러하다. 그 노동교양소는 겁이 나서 우리는 그를 갖지 않겠다고 하면서 서둘러 되돌려 보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내가 그녀를 전향시키지 못한다면 또 많은 사람에게 영향 줄 것이며 (뭇사람 웃음) 그것들은 또 보너스도 받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맞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파룬따파 하오, 쩐,싼,런 하오”를 외치면 박해를 받지 않을 것이다. 노교소에서도 바로 나를 원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나는 바로 이렇게 해야 한다.
그리하여 간수소에서 나를 불법으로 북경 노교 인원 조견처에 끌고갔을 때 나는 신체검사를 하는 곳에서 바로 외치기 시작했다. 사악한 10대대(十大队)에 도착한 후 나는 끊임없이 더욱 큰 소리로 외쳤다. 바로 이렇게 사람마음이 아주 중한 상황에서 나는 박해가 가장 엄중했던 처음 일주일을 넘겼다. 이 일주일 동안 여러 명의 마약 인원들이 뭇매를 가했다. 그 후 신발도 작은 것을 신기고 3일 동안 쭈그려 앉아 있게 했다. 화장실도 가지 못하게 하고 소변도 바지에 누어야 했으며 며칠 동안 잠도 자지 못하게 했다.
물론 이러한 박해의 원인에는 사람마음이 있었고, 더욱 중요한 것은 사악이 요구한 그 “보증”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중에 그래도 나는 깨달았다. 둘째 주가 되었을 때 사람마음을 내려놓고 단순히 “동수들을 일깨워 사악들을 진섭(震慑)”(‘동수들을 깨우치게’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또 꼭 옳다고 단언하지 못했다.)하려고 생각했다. 나는 악경에게 “언젠가는 당신들 이 복도에서 끊임없이 ‘파룬따파 하오, 쩐싼런 하오’의 목소리가 메아리칠 것이다.”하고 말했다. 기본적으로 일주일이 지난 후에는 엄중한 박해가 사라진다. 악경은 빨리 나를 보내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했고, 나는 또 계속 기회를 찾아 큰 목소리로 외쳤다.
나중에 나는 다른 곳에 있는 여자 노교소로 옮겨졌다. 박해 상황은 그리 엄혹하지 않았지만 위선적인 면모가 나타났다. 나는 격리되어 감금된 외에 기본적으로 신체에 대한 박해가 없었다. 사악은 주로 사오한 인원들을 시켜 법을 어지럽게 하는 수법을 택해 나의 집착심에서 구실을 찾아 나를 ‘전화(转化)’ 시키려는 목적이었다. 이런 경우에 나는 또 더욱 이지(理智)적이고 청성한 방식의 반박해가 더욱 효과가 있다고 생각했다. 더욱이 금방 왔을 때는 아직 구체적인 요해가 없이 맹목적으로 외치다보니 더 많은 박해를 조성해 실제적인 작용을 일으키지 못했고 다른 대법제자들도 진동시키지 못했다. 아울러 배후 출발점이 또 “박해를 반대하기 위하여 박해를 반대하는 것에” 머물게 되었다.
나는 그곳에서 한 달가량 감금된 기간에 각 방면의 상황을 모두 아주 요해한 느낌이었다. 불법으로 감금된 수련생들의 사상 상황도 일부 요해했다. 사악은 나의 ‘전화’에 대하여 희망을 품지 않고 마치 나태하게 나를 대했다. 나는 마땅히 기회를 보아 “파룬따파 하오, 쩐싼런 하오”를 외치면서 다른 동수들을 깨닫게 해야 한다. 우리는 이곳에 박해 받으러 온 것이 아니고, 중생을 구도하러 왔으며 대법과 사부님은 바로 내 신변에 있다는 것을 알려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이 떠오르자 나는 완곡하게 전문적으로 나를 ‘감시’하는 마약범 처녀에게 알려 주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그 처녀에게 준비가 있게끔 하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내가 이렇게 하면 나중에 그녀들이 나를 어쩌지는 못하겠지만 틀림없이 그녀를 욕할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이렇게 하여 그녀에게 처분이 내린다면 그녀는 대법을 미워하게 될 것이다. 내가 먼저 그녀에게 진상을 알리지 않는다면 그녀를 구하려는 노력이 모두 수포로 돌아간다. 그런데 나는 너무 천진했다. 이 처녀는 즉각 대장에게 신고했다. 이리하여 그들은 한사람을 더 늘려 나를 ‘감시’하게 했다. 이것은 나로 하여금 계획을 실행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왜냐하면 나는 나의 외침 소리를 다른 동수들이 들을 수 있도록 보증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울러 이 두 사람도 아직 구원할 희망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나중에 이러한 생각을 포기 하였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줄곧 이 일을 잘하지 못하여 아주 유감스러움 느낌이었다.
재미 있는 것은 그 ‘감시’하던 처녀가 내 생각을 대장에게 알린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노교소 측에서 나를 내보내려 한다는 소식이 누설되었다. 대략 2달 후 나는 아무런 손상도 없이 이 노교소를 떠났다.
2. 단식
나는 두 차례 단식한 경력이 있다. 첫 번째는 간수소에서였다. 2008년 4월 하순 나는 불법으로 간수소에 감금된 후 처음에는 죄수복을 입지 않았고, 연공을 견지하면서 큰 목소리로 “파룬따파 하오, 쩐싼런 하오”를 외치는 등의 방식으로 박해에 반대했다. 원래 단식할 생각은 없었는데 나중에 같은 감방에 청원하러 갔다는 이유로 붙잡힌 한 여자가 있었는데 상소가 기각되자 아주 격분한 나머지 단식에 돌입했다. 나 역시 이것이 내게 점화해 주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고 따라서 단식하기 시작했다. 간수소 악경들은 나의 단식에 대한 반응이 아주 컸다. 왜냐하면 이곳 간수소에서 2달 전에 한 대법제자가 단식으로 박해에 반대하다가 아주 짧은 시간 내에 돌아간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겨우 3끼 밥을 먹지 않았을 때 악경은 6명의 형사범을 불러 나를 누르게 하고는 야만적인 음식물 주입을 실시했다. 연속 두 차례나 주입했다. 나는 이 과정 중에서 이 모든 것이 사람마음에서 움직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악에 대한 강렬한 증오심이 가득했으며, 주입에 대한 고통의 두려움으로 포기하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런 단식의 의의는 어디에 있는가?! 사실 처음부터 무엇 때문에 단식해야 하는지 똑똑히 생각해 보지 않았다. 이런 단식은 너무나 맹목적이라 아무 의미가 없었다. 수련인의 정념정행도 아니고, 여전히 사람의 방식으로 박해에 반대했으니 신기한 효과가 나타날 수 없었다. 사악을 진감시키지 못했을 뿐더러 자신의 신체만 아주 큰 손상을 입었다.
반면, 두 번째 단식은 목적이 명확했다. 북경 노교인원 조견처에 있을 때 이곳은 아주 사악했다. 나는 그것들에게 배합하지 않고, 그것들에게 “보증”을 쓰지 않은 관계로 다른 대법제자들과 격리되었다. 매번 먹고, 자고 화장실에 갈 때에도 모두 서면 “신청”을 써야 했다. 그 다음 한 글자 한 문구씩 악경에게 구두로 보고해야 했다. 이름하여 ‘구(求)’하는 것이다. 나는 절대로 당신들의 이러한 사악한 행위에 머리 숙이지 않으며, 당신들의 모욕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했다.(사실 이것 역시 사람의 대항 심리로 모욕을 당하지 않으려 한 것이다.)
이리하여 “밥을 먹겠다는 신청”, “자겠다는 신청”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었는데 도리어 에돌아 갈 수 없었다. 바로 화장실은 가야 했다. 밥은 잠시 먹지 않아도 될 수 있고, 잠을 자지 않는 것도 지탱할 수 있었지만, 화장실에 가지 않는 것은 어떻게 저항할 수 있는가? 이리하여 온갖 모욕을 당한다는 심태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화장실에 가는 신청”을 적었다.
연속 4일 단식에서 4차례 야만적인 음식물 주입을 당했다. 이번에는 오히려 더는 증오심과 두려운 마음이 없었다. 그런데 또 한 가지 새로운 문제가 나타났다. 매번 주입을 한 후에는 아주 빨리 설사를 했는데 이때 악경들은 나에게 핍박으로 “보증”서를 쓰게 하기 위하여 이미 화장실에 가는 모든 요구를 거절하면서 협박하기 시작했다. 이 관건적인 시각에 오직 사부님의 법만이 힘을 줄 수 있었다. 나는 『전법륜』에서 말씀하신 그 대뇌의 감각 기관을 막아놓은 사람이 “그는 더러움을 모르기 때문에 그는 대변도 감히 먹으며 그는 오줌도 감히 마신다.” 한 단락이 생각났다. 이것이 나에게 더러움의 마음을 버리게 한 것이 아닌가? 이때야말로 진정으로 강대한 정념이 있었다.
사악이 나에 대한 핍박으로 “보증”을 쓰게 하는 박해를 해체하기 위하여 나는 연속 30여 시간 화장실에 가지 않았으며, 소변을 직접 바지에 눴다. 동시에 단식을 중단했다. 나는 나를 비웃던 악경에게 정중하게 말했다. “나는 먹고, 자고, 화장실에 가는 것을 위해 당신들에게 신청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나의 치욕도 아니고 당신들의 치욕도 아니며 노교 제도의 치욕이자 이 나라의 치욕이다. 나는 이런 신청서가 세인들 앞에 공포되어 전 세계인들이 모두 와서 보게 하고 아직도 이런 일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리고 싶다.” 그때로부터 그들은 나에 대한 “보증”을 완전히 포기했다. 내게 화장실에 가게 했고 나중에는 얼마 지나지 않아 나를 다른 곳으로 옮겼다.
3. 악경 및 포협(包夹) 인원에 대한 관계를 정념으로 대해야
북경 노교인원 조견처에 있을 때 악경은 여러 번 포협(包夹 감시자)인 마약범을 사주해 나에게 주먹질과 발로 차게 했다. 당시 나는 이미 마비 상태에 가까워 때려도 그리 아픈 줄을 몰랐다. 나는 바로 당신들이 나에게 무슨 일을 하든지 나는 다만 한 무리의 개미, 한 무리의 야수로 생각했다. 사실 여전히 피동적으로 감당하면서 어쩔 수 없어했다. 발정념도 박해를 제지하지 못했다.
당시 사존의 말씀이 생각났다. “사악을 제거함은 먼지 쓸 듯 하여라.”
아! 그런데 나는 왜 제거하지 못할까? 박해 중에서 가장 큰 고험은 평소 법공부에 대한 심도(深度)로서 심성이 높고 낮음에서 능히 보아낼 수 있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다른 사람이 당신에게 욕을 한 마디 해도 당신은 대꾸하지 않았고 당신은 마음이 아주 태연하며, 당신을 주먹으로 한 방 쳐도 역시 대꾸하지 않으며 웃어 버리고 지난다.”(『전법륜』)
그러나 박해 받는 경우에서는 정말로 담담하게 한다는 것이 아주 어려웠다. 근본적으로 미소를 지을 수 없었으며 마음은 또 사악에 따라 움직였다. 설령 증오하는 마음이 없다고 해도 자비심이 나오지 않았으며 미워하는 마음이 더 많아졌다. 이런 정보가 상대방에게 전달될 때면 박해만 더욱 가중될 뿐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러한 국면을 조성한 원인은 자신이 속인보다 높은 생명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진정으로 “한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면 만 가지 움직임을 제약할 수 있다.”(『최후의 집착을 제거하자』)는 것을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중에 외지 노교소에 도착한 후에야 나는 이 문제를 의식했다. 바로 매 하나의 경찰을 놓고 볼 때 수련인의 시점에서는 마땅히 그들을 사악 자체로 보지 말아야 한다. 그들은 다만 하나의 사람이고, 하나의 썩 좋지 못한 사람이다. 비록 그들이 간혹 다른 공간 사악의 조종하에 표현이 아주 나쁘긴 하지만 대법제자의 정념 앞에서는 아무런 능력도 없다. 그들이 있는 힘을 다한다 해도 견정한 대법제자를 움직이지 못하며, 대법제자의 안중에 이런 사람들은 정말이지 아주 가련한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영혼을 마귀에게 팔아 미래가 없으며 사는 것이 아주 공허하다. 신체에는 무수한 병소가 잠복해 있으며 또 자손 후대에 까지 재앙이 미치게 된다. 대법제자가 이런 사람들을 증오할 가치가 있는가? 대법제자가 대항할 가치가 있단 말인가? 그들은 사실 너무나 나약하다. 우리가 진정으로 자신을 고층차의 생명으로 간주한다면 이런 나약한 생명과 직면하면 아마 다만 그들을 구하려는 염두만 존재하거나 실질적으로 구할 수 없다면 다만 탄식할 뿐이다.
포협(包夹) 인원에 대해서는 더욱 이러하다. 대법제자를 감시하는데 이용당한 포협 인원 대다수는 모두 마약범이다. 개인적으로 인품이 비교적 나쁘다. 마약을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 다 하기에 사람의 양지(良知)가 아주 적다. 그러나 그녀들과 접촉하는 과정에서 나는 모든 사람들을 다 구할 수 없는 것은 아님을 깨달았다. 그녀들의 내심에도 사실 소박한 면이 있다는 것을 보아야 한다. 그녀들은 다른 사람을 상해(伤害)하는 일에 대하여 역시 마음속으로 망설임이 있다. 그리고 대다수 포협으로 이용당하는 마약범은 모두 습관적인 범인이다. 대법제자와 지낸 시간이 하루 이틀이 아니다. 그녀들도 마음속으로 모두 파룬궁을 하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똑똑히 알고 있다.
다만 노교소의 사악의 감형 제도의 유혹하에 악한 일면이 표현된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삼계내의 일체 생명은 모두 법을 위해 왔고 법을 위해 이루어 졌고 법을 위해 육성되었다.”(『각 지역 설법 4』「2003년 워싱턴 DC 법회설법」)라고 말씀하셨다. 그럼 내 생각에 노교소 역시 모두 이 법을 위해 온 것이며, 대법제자를 위해 온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포협 인원의 존재 역시 대법제자를 위하여 존재한다. 만약 우리가 진정으로 천지를 녹일 수 있는 자비에 도달할 수 있다면 이들은 우리를 박해하지 않을뿐더러 우리를 박해할 수 없으며 우리가 그들은 구원할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정법시기 대법제자에 대한 사부님의 요구가 아니겠는가!
결론
현재, 대법제자에 대한 박해는 아직도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다. 반박해는 우리 매 하나의 정법시기 대법제자가 미룰 수 없는 책임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반박해를 하는가, 어떤 마음과 염두로 반박해를 해야 하는가 하는 이것은 박해 속에 있는 모든 대법제자가 늘 직면하게 되는 문제이다. 이 문제에 대해 나는 하나의 제안이 있다.
우리가 어떠한 경우에도 모두 박해를 미소로 대할 수 있는가? 박해에 직면하여 우리가 놀라지 말고, 두려워하지 않으며, 담담하게 미소로 대해야 한다. 박해가 왔을 때 우리는 근본적으로 그것을 대단하게 생각하지 말아야 하며 또 그것이 우리를 해칠 수 있다고 인정하지 말아야 한다. 미친듯이 표현되는 경찰, 포협을 마주하고 부드러움으로 강한 것을 이겨야 하며, 마음속에는 오직 그를 위한다는 자비심만 있어야 한다. 조급하거나 노여워하지 말고, “얼굴에는 상서로은 빛을 띠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들이야말로 우주 중에서 가장 비참한 생명으로 그들이 하는 일은 모두 자신의 무덤을 파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당신이 보라, 모든 불상은 다 영원히 미소를 띠고 있는 표정이다. 장차 곧 신으로 성취될 생명으로서 우리는 마땅히 누구를 만나거나 어떤 상황이든지 막론하고 모두 미소를 유지하는 것을 배워야 하지 않겠는가?
이상은 나의 얕은 견해이니 분명 깨달음이 맞지 않는 곳이 많이 있을 수 있다. 동수들의 비평과 지적을 환영한다.
문장발표:2009년 5월 13일
문장분류 : 수련마당
문장위치 :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09/5/13/200570p.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