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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을 향하여 수련하고 안을 향하여 찾는 속에서 안전과 협조를 담론

글 / 대륙대법제자

동수의 글 >를 보고 깊은 감촉을 받았다. 이 화제를 빌어 다른 층면에서 현재 나 자신이 의식한 일부 정체적인 협조과정에서 반드시 주의해야 할 안전문제에 관해 몇 가지 말하고자 한다. 뜻은 벽돌을 던져 구슬을 끌어들이려는데 있으며 동수와 교류하여 수련에서의 최후의 한보를 더욱 온당하게 잘 걸어가고 싶어서이다.

1. 정체의 각도에서 안전을 담론

우리의 수련환경은 한 시에 한 현과 30여개 향진이 있다. 일정한 시간이 되면 협조인들은 서로 교류를 한다. 그다지 인원이 많지 않지만 모두 주요하게는 협조인들이기에 최근 이년간 비교적 괜찮게 운영해 왔으며 정체의 협조에 일정한 추동작용을 했다.

이어 우리 구역(내가 살고 있는 구역은 7,8개 향이 있음)을 기점으로 일정한 시간을 두고 한 번씩 교류를 하고 있다. 역시 비학비수하며 더 많은 동수들을 이끌어서 걸어 나와 세 가지 일을 잘 하는데 아주 좋은 협조 작용을 일으켰다. 그러나 우리는 수련 중에 안을 수련하고 안을 향해 끊임없이 찾아서 바로 잡아나가야 하며 빈틈을 미봉해야 하는 것으로 이것 역시 정체 수련의 한 부분인 것이다. 하지만 매번 교류회를 한 후 다음번 교류회의 시간과 지점을 정했는데, 비록 알려주는 수련생을 제한하고 있었지만 이미 하나의 특정된 규율처럼 되어 대도무형이라고 할 수 없는 것으로, 필경 안전방면에서 후환이 될 수 있기에 이것은 빈틈으로서 첫째문제이다.

두 번째, 여러 차례 교류를 한 곳은 자료점을 하는 동수집 이었다. 이는 더이상 홀시하거나 범해서는 안 되는 착오인 것이다. 환경이 어떻게 느슨하든지 우리는 영원히 피의 교훈과 사존님의 경고를 잊어서는 안 된다. 동수에 대해 책임지고 자료점에 대해 책임져야 하며 역시 정체에 대해서도 책임져야 하는 것이다. 만약 정말로 합당한 지점을 찾지 못했다면 교류회를 취소하면 취소했지 절대로 자료점에서는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교류하는 시간과 지점은 협조인이 정하는 것으로 어느 집이 합당한가? 왜 자료점 동수의 집으로 정하는가? 이는 현재 대륙에서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하나의 문제이며 정체적으로 제고해야 할 바이며 정체로 승화되어야 할 문제이다.

왜냐하면 지금에 이르기까지 많은 주요 협조인은 모두“겸직”을 하고 있는 상태로서, 다시 말하면 협조인은 한 향 혹은 한 지역의 정체협조를 책임지고 있고 자료를 만드는 것까지 책임지며 심지어 기술까지 배워주거나 혹은 더 많다. 이렇게 앞에서 가고 있는 동수들은 사악의 잔혹한 박해를 여러 차례 경력하였고, 겹겹한 마난 속에서 견정부동하게 걸어왔다. 그리하여 법을 실증하는 길에서 정법의 수요로 이 위치에 서게 된 것으로 그들 자신의 요구와 좋아하기 때문에 무엇을 하고 무엇을 안 하고를 선택한 게 아니다. 그것은 바로 사부님께서 어떻게 하라고 하셨으면 어떻게 한 것이며 법을 실증하는데 자신부터 무엇이 필요한지 깨달아서 그렇게 한 것이다. 모두 자신이 처한 환경 속에서 자신의 억만년전의 서약을 실천하고, 대법을 실증하고 중생을 구도하고 있으며 사부님을 도와 세간에서 행하며 정법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상응되는 문제라면 정체와 개인간의 협조가 필요할 때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예를 들어 법공부하는 곳을 어느 집으로 하면 합당한가? 교류회의 장소는 어느 집으로 하면 좋을까? 정체의 심성이 아직 따라오지 못해 동수들의 눈길이 모두 협조인을 바라보고 있을 때 협조인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정체의 제고를 위해 협조인인 수련생은 자신을 버리고 정체에 원용할 것이다. 그러나 협조인인 수련생은 얼마나 큰 압력을 감당해야 하는지 당신들은 알고 있는가? 단지 이 공간에서 오는 것뿐만이 아니며 이 공간의 빈틈과 손잡이에 대응해 다른 공간의 사악이 호시탐탐하고 양(量)의 초점으로 된다! 비록 동수의 정념정행과 사존님의 자비로운 가호가 있다고는 하지만 우리는 정법시기의 대법제자로서 수련생을 위해 압력을 경감하도록 감당하여 사부님께서 노심초사하시는 근심을 덜어 드려야 하지 않겠는가? 동수들이여, 지적을 하는 것이 아니며 단지 사부님께서 우리를 위해 우리가 알지 못하는 더 많은 노사초심하심과 가호를 생각하게 되면 감동의 눈물이 조용히 떨어지는 것이다. 동수에게 하고 싶은 말은 동수여, 우리가 정진해서 법공부하고 수련하는 자신의 환경을 개척해 가정환경이 좋아진다면 그것 역시 동수 스스로 개척한 게 아닌가? 그것 역시 우리가 수련하는 과정이 아니겠는가? 누구의 집이 합당한가? 누구의 집이든 합당한 것이다! 맥이 없고 혈이 없는 상태에 도달한다면 그래도 사악이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2. 정체의 각도에서 협조를 담론

사존님의 2005년 >에서 사존님께서는 수련생의 질문에 대해 다음과 같은 한 단락의 법을 말씀하셨다. “책임자는 실제상 협조인으로서 보다 많은 능력 있는 사람이 참여하도록 하는 이것이야말로 관건이다. 당신 자신 한 사람이 얼마나 큰 작용을 일으키겠는가? 정체적으로 모두 작용을 일으킬 수 있어야만 비로소 책임자가 잘 한 것이다. 책임자 자신이 아주 잘하였다면, 당신이 아주 잘한 것은 다만 한 수련생이 잘한 것이다. 그럼 한 보통 수련생으로 되는 것이 좋겠다. 관건은 책임자의 책임인데, 이 작용을 일으켜야 한다. 또 한 가지 문제를 말하겠다. 각지 책임자는 반드시 큰 일, 작은 일에 모두 관할하려는 작풍에서 손을 떼어야 한다. 각지에서 지역 수련생들이 충분히 발휘하여 주동적으로 법을 실증하는 일을 지지해야 하고 제한하지 말아야 한다. 늘 극단으로 가는 것 외에는 노(老) 대법제자들은 모두 성숙하였고 그들은 모두 자신의 원만의 길을 걷고 있음을 똑똑히 알아야 한다.” 사존님의 이 단락의 법을 공부하고 비로소 나자신이 너무 적게 법공부를 했음을 알 수 있었다. 협조인으로 활동한 것도 너무 많은 차이가 있는데 사부님께서 일찍이 2005년에 우리에게 어떻게 하라고 알려 주셨는데도 오늘에서야 비로소 조금이나마 법리를 알게 된 것이다. 며칠 전 한 협조인과 교류를 할 때 그 또한 우리가 이미 수련생을 장애하고 있음을 깨달았다는 말에 깊이 동감했다. 왜냐하면 우리가 큰 일 작은 일 모두 관할하고 있으면 동수의 숭배심, 의뢰심을 길러주게 되며 무의식적으로 개별적인 협조인들의 과시심과 독선, 동수의 위에 있다는 마음을 자양하게 되는 것이다. 그제서야 비로소 수련생이 잘하지 못한 게 아니라 우리 협조인이 아직 잘하지 못한 것으로 사부님의 큰 부탁과 동수의 기대에 어긋났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협조인이 반드시 무겁고 많은 일에 매이지 말아야 하며 반드시 손을 놓아야 한다. 물론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게 아니며 아무것도 관계하지 말라는 게 아니다. 관건은 자신을 잘 닦는 동시에 동수들을 이끌어 법공부를 많이 하는 것으로 능력있는 더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도록 하는 것이야말로 관건으로 이것이야말로 협조인의 책임인 것이다.

3. 안을 향해 수련하며 안을 향해 찾는 중에 수구를 담론

제378기 명혜주간에서 동수의 글 >중, 수련생은 이미 환경의 느슨함으로 인해 안전의식을 놓아버린 일을 담론하면서 자료점에 관한 일을 자연스레 언급하였다. 이 주간의 대륙종합에서도 >는 글이 실렸다. 나도 재차 이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사부님께서 정법노정을 추진하시고 동수들이 꾸준히 진상을 알리는 노력을 해 진상을 아는 사람도 많아지면서 우리도 환경이 정말로 느슨해진 것을 감수하게 된다. 그리하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안전의식을 소홀히 하게 되었다. 주의식이 느슨해지면서 수구도 단단하지 못해졌다. 어떤 동수들은 서로 가까이 지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서로 아주 익숙해 졌고 이심전심이 되면서 누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두 알게 되었다. 누가 기술상의 자문과 소통을 하는지 알게 되었는데, 그러나 절대로 공개된 장소에서 말하거나 담론해서는 안 되는 일도 있는 것이다. 특히 교류회에서 자료점에 관련된 어떠한 문제든지 절대로 입 밖에 내서는 안 된다.

한 협조인은 교류회에서 여러 차례 나를 지명하면서“당신은 어떠한 일을 인터넷에 올려 폭로했는가 … ”“어느 어느 일을 명혜망으로 보냈는가? … 답복이 있는가? …” 나는 대답하기도 그렇고 대답하지 않기도 그랬다. 마음 속으로 이렇게 하면 인터넷에 오르는 곳과 자료점을 공개화 시키는 게 아닌가? 교류회에 참가하는 수련생이 많고 심성은 부동한 층차에 있는데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정말이지 마음의 평형을 잡을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사건발생이 절대로 우연한 게 아님을 알았고, 특히 끊임없이 나에게 이런 일이 발생하는 것은 반드시 나에게 버려야 할 마음이 있다는 것으로, 여기까지 생각하자 불평형된 마음과 원망이 자취없이 소실되었다. 차츰 마음을 조용히 하고 법공부를 하면서 안을 향하여 찾았다. 응당 버려야 할 한 무더기 집착을 찾아냈다. 원래 나에게 안전에 주의하지 않는 마음이 있었으며 특히 내가 비교적 신임하는 동수 앞에서는 유무의적으로 하지 말아야 할 말들을 했는데 이는 작은 범위내의 문제였다. 더 안으로 찾았더니 교류회를 마치고 나는 이 협조인과 션윈VCD의 질량문제를 가지고 담론했는데, 옆에는 아직 일부 동수들이 있었다. 여기까지 생각하자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잔혹한 환경에서 우리는 안전이라는 한 가닥 현을 팽팽하게 했는데, 왜 환경이 느슨해 졌다하여 우리의 마음도 따라서 느슨해진 것일까? 유무의하게 수구함을 왜 주의하지 않았을까? 이 유무의함과 대수롭잖아 하는 마음을 왜 우리가 홀시했을까? 이는 곧바로 평소 자신의 일사일념을 닦는데 주의하지 않았던 것이며, 우리의 공간장에 그것이 존재할 수 있는 공간을 남겨 두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배후에서 지탱하고 있는 것은 수련상태가 느슨해진 것뿐만이 아니며 또한 과시심도 있는 것이다. 사존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우리 많은 수련생은 속인 중에서 수련하기 때문에 많은 마음을 내려놓지 못하는데, 많은 마음이 이미 자연적으로 형성되었으며 그 자신도 느끼지 못한다. 이런 과시심리는 곳곳마다 모두 체현될 수 있는지라, 좋은 일을 하면서도 과시심리를 체현할 수 있다.”(>)

제자는 사부님께 부끄럽다! 우리가 이지적이지 못함으로 인하여 사부님께 또 얼마나 많은 번거로움을 더했을까. 사부님께서 큰 파룬을 돌려 대궁을 바로잡는 동시에 우리가 수구에 부주의한 탓으로 가져오게 되는 다른 공간의 교란과 인간에서 표현되는 시끄러움을 모두 평형 잡아 주시는데 마음을 쓰게 하였다. 과시심! 나는 오늘 너를 찾아냈다! 즉각 너를 닦아 버려야 할 때이다! 뭘 더 과시하려 하는가! 한 수련인으로서 좋게 수련된 부분은 대법 중에서 용련되어 갱신된 생명이며 지혜는 사부님께서 주신 것으로, 당신이 법을 실증하려 하고 당신이 법을 실증할 수 있기에 주신 것으로 내원은 정법수련이다. 그리고 아직 깨끗이 수련되지 못한 것은 오래고 오래된 역사 중에서 남겨진 낡은 우주 생명들의 위사위아의 완고한 관념으로서 우리가 가서 바로 잡아야 할 것들이다. 나는 깊이깊이 깨달았는데 사부님께서 한길로의 가호가 계시지 않았더라면 제자의 오늘은 없는 것이다. 사부님의 은혜를 그 무엇으로 보답할 것인가! 제자는 오직 끊임없이 정진하여야만 사부님의 자비로운 고도와 중생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게 된다.

자신의 수련 층차에서 깨달은 옅은 인식으로서 편파적인 것은 동수님들이 보충하여 바로잡아주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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