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대륙대법제자
【명혜망 2009년 4월 12일】수련한 이후 ‘참음(忍)’과, 다른 사람을 관용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자비심을 수련해내고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그런 상화함을 수련해내고 싶었다. 하지만 마치 하나의 좁은 틈에 속박된 것처럼 내 몸은 전혀 움직일 수 없었다. 하물며 다른 사람을 너그럽게 받아들인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나의 ‘참음’은 비록 속인의 ‘눈물을 머금고 참는’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담담하게 버리며’ ‘참는’ 것도 아니었다.
내가 ‘참는다’고 하기보다는 ‘도피’하거나 아니면 ‘억지로 누르고’ 있다고 하는 편이 낫다. 나는 마치 사막의 타조가 폭풍이 오면 황급히 머리를 모래 언덕에 파묻고 폭풍이 지나가면 다시 머리를 빼드는 것과 같았다. 겉으로는 아무 일도 없는 듯 했지만 사실 자신은 이런 마음으로 인해 도리어 조금씩 위축되고 긴장되었다. 수련하면 할수록 용량이 커지거나 확 트이는 것이 아니었다. 일정 정도 나의 수련은 “이런 시끄러운 교란에서 벗어나 청정(淸淨)한 복을 누리고 싶은” 목적이었다.
이 시기에, 나는 동수들과 협력하는데 문제가 생겼다. 물론 여전히 말다툼은 없었고 심지어 표면상으로는 또 아주 “상서로운” 모습이었지만 마음속으로는 긴장했다. 이번에는 더 이상 도피하지 않고 이 모순을 마주하고 자신의 문제를 찾기로 결심했다.
나는 우선 협력이 잘 되지 않은 것은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이 한 점이 명확히 했을 때 나의 사상은 낡은 관념의 미친 듯한 교란을 받았다. “내게 무슨 문제가 있어? 그녀가 제출한 요구는 얼마나 지나친가! 그녀는 무엇 때문에 작은 일도 하지 못하는가? 이는 일부러 나를 난처하게 만든 것이 아닌가?….” 이런 종류의 억울함과 분노가 나왔다.
나는 더는 속박 받지 않기 위해 이런 말들은 종이에 써서 반복적으로 몇 번 읽어 보면서 이렇게 “억울하게 여겨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가졌다. 나는 가슴에 손을 얹고 물어보았다. 요만한 억울함도 감당하지 못하고 어떻게 “때려도 맞받아치지 않고, 욕을 해도 대꾸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는가? 동수에게 부족한 점이 있을 때 당신의 ‘참음’이 필요하며, 당신의 ‘원용’이 필요하다. 만약 다른 사람이 모두 신불(神佛)의 경지라면 당신에게 그 무슨 ‘참음’을 논할 것이 있는가? 오직 다른 사람이 부족할 때 당신이 논쟁하지 말고 쟁투하지 않아야지만 협력을 잘 할 수 있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잘할 수 있다. 이것이 관용이고 ‘참음’이 아닌가!
말하고 보니 남들의 웃음거리가 되는 것도 두렵지 않았다. 이것은 내 평생 처음으로 사람이 왜 ‘관용(宽容)’해야 하는지 알게 되었고, 우리의 수련은 왜 ‘참음’을 닦아야 하는지 알게 되었다.
곧이어 어떻게 해야 ‘참음’을 잘할 수 있을까? 생각했을 때 낡은 관념이 또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참음은 바로 양보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녀의 방법이 분명 불합리하지만 그녀의 말에 따르지 않고 협력하지 않으면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녀의 말에 따라야 하는가? 이는 원칙 없이 비위를 맞추는 것이 아닌가?”하고 생각했다. 나는 입을 악물고 바로 낡은 관념을 거슬려 그것을 타파했다. “일의 계획이 주도면밀한가 여부가 중요한 것이 아니며, 관건은 모두들 마음을 바르게 하고 자신을 내려놓으며 잘 협력한다면 하는 과정에서 아마 기적이 나타날 수 있을 것이다. 시험 삼아 생각해보자. 만약 그녀의 말에 따른다면 정말 문제가 없겠는가?” 사실 당시 내가 정말로 동수의 건의에 따라 생각해보니 놀랍게도 그것은 확실히 실행할 수 있는 것이었다. 모종의 각도에서 말하자면 심지어 동수의 건의가 아주 좋았다!
그렇다면, 애초 나는 무엇 때문에 듣자마자 곧장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고, 심지어 수련생이 왜 이런 건의를 제출하는지 이상하게 생각했는가? 자세히 생각해보면 내가 동수의 건의에 따른다면 내가 더 많은 것을 지불해야 하고, 나의 습관을 개변해야 하며, 또 나의 일정을 새로 안배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문제의 초점이 폭로 되었다. 협력을 잘하지 않은 근본 원인은 바로 ‘자아 집착’이었다. 내 방법은 그리 합당한 것이 아니었으며, 그 ‘나’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또한 동수의 방법이 아주 불합리한 것은 아니었지만 동수의 방법은 그 ‘나’에 부합하지 않았다. 과거를 돌아보면 법을 실증하는 일이거나 혹은 속인의 일을 하거나 매번 다른 사람이 한 가지 방법을 제출하면 나는 모두 즉시 이 ‘나’로 가늠했다. 물론 완전히 마음에서 달통되지 않았기에 늘 다른 의견을 제출하면서 협력에 영향을 주었다. 상사의 말대로 하면 “이 사람은 능력은 아주 좋은데 지도력은 없다.”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법을 실증하는 일에서 잘 협력할 줄 알아야 하며 되도록 모순을 초래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자신은 그 마음을 버리지 못했다. 표면상 어떻게 하든지 막론하고 마음속에는 늘 매듭이 있어 편안하지 않았다. 이때 나는 이렇게 다년간 수련했음에도 어째 늘 수련하지 않은 것과 같을까! 하는 것을 발견했다.
사부님께서는『각 지역 설법 2』「2002년 필라델피아법회 설법」중에서 천상의 신들이 함께 일할 때의 심태를 말씀하셨다.
“그들은 어떠한 심태(心態)인가? 바로 관용(寬容)인바, 매우 홍대(洪大)한 관용(寬容)으로서, 다른 생명을 용납할 수 있고 진정으로 입장을 바꾸어서 다른 생명을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많은 사람들이 수련과정 중에서 아직 도달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당신들은 점차적으로 인식하고 있으며 도달하고 있다. 한 신(神)이 하나의 방법을 제출해내었을 때, 그들은 급급히 가서 부정하는 것이 아니고, 급급히 자신들의 것을 표현하지 않고, 자신의 방법이 좋다고 인정하지 않고, 그들은 다른 신(神)이 제출해낸 방법의 최후의 결과가 어떤 모양인지 가서 본다. 길은 같지 않으며 매 사람의 길은 모두 같지 않은바, 생명이 법 중에서 깨달은(證悟) 이치는 모두 같지 않으며, 그러나 결과는 아마 아주 같을 것이다. 때문에 그들은 그 결과를 보며, 그의 결과가 도달한 것, 정말로 도달하고자 하는 것에 도달할 수 있다면 여러분은 모두 동의하는데, 신(神)은 모두 이렇게 생각한다. 게다가 어디가 부족한 것이 있으면 또 무조건적으로 묵묵히 보완 해주며 그것이 더욱 원만하도록 한다. 그들은 모두 이렇게 문제를 처리한다.”
나는 이 짧은 단락의 법을 몇 번이나 읽었는지 모른다. 오늘에 와서야 겨우 진정으로 무엇이 ‘관용’인지 분명히 알게 되었고, 또 무엇이 “자아를 내려놓는” 것인지 알게 되었다. 과거를 회억하면 나는 마치 종래로 이 ‘나’란 것을 진정으로 내려놓은 적이 없었다. 마치 감히 내려놓지 못하는 것 같았는데 때로는 내려놓기가 아쉬웠다. 감히 내려놓지 못할 때는 사부님을 믿지 않고 법을 믿지 않은 것이다. 내려놓으려 하지 않을 때는 안일한 마음 등의 집착이 너무 강했다.
이것을 똑똑히 알게 된 후 나는 진심으로 내가 상처를 준 모든 동수들에게 “미안하고” 사부님께 미안하다! 또한 사부님의 고심한 점화에 감사드린다. 나는 앞으로 반드시 잘하여 다시는 자아를 견지하지 않고 동수들과 잘 협력하여 얼마 남지 않은 최후 시간에 법을 실증하는 일을 잘하여 서약을 실현할 것이다.
문장완성:2009년 4월 12일
문장분륜 : 수련마당
문장위치 :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09/4/12/198826p.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