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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공부를 교란하는 집착을 버리다

[명혜망 2009년 3월 6일] 오늘 《전법륜》을 읽을 때 마음이 안정되지 않아 부득불 정지하고 자기의 원인을 찾았다. 갑자기 마음이 섬뜩했다. 《전법륜》을 읽으면 몽롱하여 졸렸고 새로운 경문을 읽을 때는 그래도 간신히 정신을 가다듬고 읽었는데, 원인은 바로 사람이 학문을 하고 지식을 탐구하는 관념, 사상 업력이 작용하였기 때문이며, 결국에는 그래도 근본적으로 굳게 믿는가 하는 문제였다. 《전법륜》은 여러 번 읽었으니 다‘안다고’ 느꼈다. 그러므로 새로운 경문을 학습하는 것처럼 ‘흥미’를 느끼지 못하였고 ‘흥분’ 하지 않았다. 이것이 사람마음이고 사람이 학문을 학습하는 관념이 아닌가? 이렇게 여러 해를 수련하였는데 이런 물건이 아직도 존재하며 또 방해하고 있어 나로 하여금 대법 책을 읽으면 ‘흥미’가 없게 하였는데, 배후는 바로 호기심, 지식을 구하는 것으로 되어 조금만 주의하지 않으면 곧 사람마음으로 사람의 지식을 학습하는 것이 된다! 그러니 어찌 대법의 내포를 보아낼 수 있겠는가.

근본상에서 이는 사실 대법에 대해 굳게 믿는가 안 믿는가 하는 문제이며, 진정으로 대법은 초상적인 것인가를 믿는가 안 믿는가 하는 것으로서 일체는 모두 그 중에 있지 않은가? 정말 진정으로 확고한가? 만약 그렇다면 어찌 표면 문자 습관의 영향을 받을 수 있겠는가? 만약 아니라면 혹은 충분히 하지 못하였다면 집에서 법공부도 견고히 못하고 믿지 않으면서 관건적 시각에 생사 고비에 또 어찌 동요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설사 이런 시련이 발생하지 않는다 해도 어떻게 이런 법의 요구에 도달 하겠는가?

정념은 반드시 바르게 행하여야 하며 행동이 있어야 진정한 정념이다. 법공부는 하나의 구체적인 행동이다. 법을 잘 학습 하는가 못 하는가는 우선 견고한가 하지 않은가, 사부님이 안배하신 길을 걸어가는가 안 가는가, 대법제가 옳은가 아닌가, 원만 할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데서 체현된다.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이미 일체를 다 말씀해주셨으며 일체도 다 최후 결속 중에 있다. 근래 새로운 경문을 발표하시지 않는데, 사부님께서는 최후의 길을 바로 갈 기회를 우리에게 남겨 주시어 우리더러 가장 빠른 속도로 정진하게 하신다는 것을 나는 깨달았다.

우리는 사람이 학문을 학습하는 형식, 관념, 습관을 타파하고 이런 장애를 철저히 제거하여야 하며, 법 학습은 구도 중생과 원만의 보증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어느 한 면으로 말하자면 구도 중생과 원만은 기실 한 가지로서 오직 원만하여야 비로소 우리가 대표한 천체 체계의 무량 중생을 구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법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리이며 만사만물의 답안이고 우주가 존재하는 원인이며, 수련의 대조이고 일체이며 무한히 소중한 것이다. 시간 역시 매우 제한되어 있다!

개인 체득으로서 부당한 곳은 지적해 주기 바란다.

문장발표 : 2009년 3월 6일

문장분류 : 수련마당
문장위치 :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09/3/6/196557p.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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