简体 | 正體 | 대법서적

대법제자의 심태

글/ 대륙 대법제자
[명혜망 2008년 11월 15일] 이전에 명혜망에 이런 소식을 보도한 적이 있다. 한 대법제가  사당의 심판에 직면하였다. 법정에서 그는 많은 공검법 경찰이 온 것을 보고 속으로 생각 하였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와서 모두 내가 구도해  주기를 기대하고 있구나. 연후에 그는 법정에서 유쾌한 기분으로 진상을 알려 주었고, 나중에 법관이 진상을 알게 되어 그를 법정에서 직접 석방 하였다.

이로부터 수련생은 심태가 아주 순수하고 중생을 구도하겠다는 생각 하나만  있었고, 진정 자아를 내려놓고 완전히 세인을 구원하겠다는 것만 생각했다는 갓을 어렵지 않게 보아낼 수 있다.  그의 마음 속에는 법정을 박해 당하는 마굴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중생을 구도하는 장소로 여겼던 것이다. 바꾸어 말한다면, 그의 마음 속에는 오직 사람을 구하려는 생각만 있을 뿐 박해 당하고 있다는 개념이 없었고, 어떻게 반 박해 하겠는가 하는 생각은 더구나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역사는 사악을 위해 펼쳐진 것이 아니라, 대법제자의 수련과 중생구도를 위해 펼쳐진 것이다. 우리와 그 경찰과의 관계는 박해 받는자와 박해하는자의 관계인 것이 아니라 구도자와 구도 되는 자와의 관계이다.  표면상으로는 법관이 대법제자를 심판하고 있는것 같지만 다른 공간에서는 그들 진정한 자신 ㅡㅡ명백한 일면이 모두 대법제자가 진상을 알려 구도 받기를 바라고 있다 . 그러므로, 근본상으로부터 말하면 이번 극은 사악의 박해를 위해 배치한 것이 아니라 대법제자의 중생구도를 위해 안배한 것이다. 우리야 말로 주연이 되기에 손색 없으며, 우리가 어디로 가든 그 곳은 바로 우리가 중생을 구도하는 장소이고, 그 곳의 중생이 바로 우리가 구도할 대상이다.

어느 때 어디라 없이 우리의 마음속에 오직 중생구도 생각만 있고 박해 당한다는 개념이 없다면 박해가 아직도 존재할 수 있겠는가? 아직도 어떻게 반박해 하겠는가 하는  것이 수요 되겠는가? 우리의 마음속에 박해 당한다는 개념이 있을때면 실질상 이미 자신을 박해 당하는 위치에 놓은 것이며, 세간의 표상을 인정한 것이고, 박해를 승인한 것이다. 우리의 마음속에 박해 당한다는 개념이 없고 중생구도만 생각할 때면, 실질상 곧 자신을 신으로 여기고, 중생구도의 사명을 완수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 극을 어떻게 연기하겠는가에는 두 가지 방향이 있다. 대법제자가 반박해만 돌보게 될 때면 사악이 바로 주연일 것이고, 대법제자가 박해당하는 극을 연기할 것이다. 대법제자가 진상을 알리고 중생을 구도할 때면 대법제자가 바로 주역이 되어 중생구도의 극을 연기할 것이다. 구경 어느 극을 연기하는가는 완전히 대법제자에게 달렸다. 단순한 반박해는  바로 변상적으로 박해를 승인하는 것과 같으며, 중생구도야 말로 비로소 박해를 부정하고 사명을 완수하는 것이다.

우리가 박해를 아주 중하게 볼 때면 이것이 하나의 집착심이 아닌가?우리가 반박해를 첫 자리에 놓고 중생구도를 부차적인 위치에 놓았을 때 이는 아주 강한 사심이 아니겠는가? 그 가운데에 박해 받을까 두려워 하는 마음, 자신 해탈을 구하려는 마음이 숨어 있는 게 아닌가?평소에 박해 당하지 않는 상황에서 우리는 모두 진상을 알리어 중생을 구도할 생각을 할 줄 안다. 박해가 발생한 후에는 우리의 심태에 흔히 변화가 발생하여 더 많은 염두 심지어 전부의 염두를 죄다 반박해에 쏟아 붓고, 중생구도는 홀시한다. 개인이익이 엄중하게 저촉될 때면, 사를 위하는 심태가 우세를 점하게 하는데 이는  사악에게 더욱 박해할 구실이 있게 하는 것이 아닌가?

사부님께서는 말씀 하셨다. “두려움이 없다면, 또한 당신으로 하여금 두려워할 요소가 존재하지 않는다.”(>기점을 바로 놓고, 심태를 단정히 하면 우리는 바로 신이다. 누구도 감히 박해하지 못하며 누구도 박해할 수  없다.

수련생을 구원하는데 참여한 우리 동수들 심태를 바로 놓았는가? 중생구도를 첫 자리에 놓았는가, 아니면 동수 구원을 첫 자리에 놓았는가? 세인의 구원을 위해 했는가, 아니면 동수의 해탈을 위해 했는가? 이 가운데로부터 우리 정체의 심태가 바르게 놓였는가를 반영한다. 대법제자는 수련하는 사람으로서 세간의 득실을 따지지 않는다. 우리는 중생을 구도하는 신이지 반박해 하는 사람이 절대 아니다. 중생구도야  말로 비로서 우리가 존재하는 목적이다. 박해는 다만 사악이 사람 구하는 것을 저애하는 연기일 뿐이다. 우리가 연기해야 할 극은 반드시 잘 연기해야 하고, 어떠한 외래 요소에게도 교란되거나 동요되지 말아야 하며, 중생구도 이 신성한 대작을 법정인간 까지 연기하여 대법제자의 무량한 자비를 남김없이 펼쳐 보이자. 개인의 보잘 것 없는 깨달음으로서 목적은 교류하자는데 있다, 여러 동수들께서 자비로 시정해 주기 바란다!

문장발표:    2008년 11월 15일
문장 분류 :  수련마당
문장위치  :  http://search.minghui.org/mh/articles/2008/11/15/189746.htm

ⓒ 2024 명혜망.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