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평도(平度) 대법제자
【명혜망 2008년 10월 12일】 수련생이 쓴 『“대법이 좋다고 외우면 목숨을 보존할 수 있는가”로부터 생각한 것』이란 심득 체험을 보고 수련생이 제기한 견해가 아주 이지적이라고 여긴다. 우리 지역에서는 적지 않은 동수들에게 모두 부동한 정도로 “대법이 좋다고 외우면 목숨을 보존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부동한 집착이 존재한다.
어떤 수련생은 죽기 직전의 환자를 만나기만 하면 그에게 “파룬따파 하오”를 외우라고 권유한다. 사실 어떠한 사람이든 오직 성심으로 “대법이 좋다”고 외우기만 한다면 확실히 그에게 부동한 정도의 복을 줄 수 있다. 하지만 사람의 복이 부동하고 업력의 크기가 부동함에 따라 복을 받는 상태도 부동하게 결정된다. 바로 그 동수의 문장에서 서술한 것처럼 어떤 사람은 “현세에 복을 받고”, 어떤 사람은 오히려 뚜렷한 변화가 없을 수도 있으며, 혹은 큰 화(禍)가 작은 화로 변하거나, 또는 내세에 복을 받을 수도 있다. 이러할진대 이는 곧 우리가 “파룬따파 하오”를 이용하여 복음을 전할 때 반드시 적절한 한도를 파악하고 전후를 원용할 필요가 있으며 속인에게 어떤 절대적인 단언을 승낙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속인에게 “당신이 성심으로 외우기만 한다면 분명 좋은 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만일 당신이 성의가 없다면 효과가 없을 것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고 동시에 그에게 “대법이 좋다”고 외워 복을 받은 사례를 들려주어 그들의 인정을 얻을 수 있다. 또 이를 기회로 대법을 널리 전할 수 있다. 이렇게 하면 장차 결과가 어떠하든지 막론하고 그에게 존재하는 각종 상태로 인해 세인을 오도하지 않게 될 것이다.
내 생각에 지금 우리 지역에서 어떤 수련생은 이 방면에서 확실히 이지적이지 못한데, 말을 너무 절대적으로 한다. 예를 들어 “외우면, 아무리 큰 병이라도 분명히 나을 수 있고 암도 모두 나을 수 있다.”라고 하면서 대법을 속인의 재난을 없애고 업력을 버리는 ‘법보’로 여긴다.
이 문제를 우리는 더 이상 한가하게 보고만 있어서는 안 된다 느낀다. 우리는 일찍이 집착에 이끌려 절대적인 ‘예언’을 전파한 적이 있고 그래서 크게 넘어졌으며 오늘까지도 여전히 이 때문에 오도된 사람들은 대법에 의혹을 품고 있다. 그들은 우리의 어떠한 해석에 대해서도 모두 배척하게 되었는데 이는 하나의 엄중한 교훈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옛길을 걸어서는 안 된다. 생각해 보라, 당신이 다른 사람에게 미래에 복을 받는다고 승낙할 때, 이건 우리가 재난을 예언했던 것과 다를 바가 무엇인가? 큰 국면을 봐야 하고 자신이 들어갈 수도 나올 수도 있게 해야 하며 말썽거리를 남기지 말아야만 비로소 세인을 오도하지 않을 수 있다.
문장발표 : 2008년 10월 12일
문장분류 : 수련마당
문장위치 : http://minghui.org/mh/articles/2008/10/12/187478.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