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옳고 그름을 가늠하는 표준은 결과에 있지 않다

글 / 대륙 대법제자

[명혜망 2008년 10월 14일] 최근에 나의 수련에 잘못된 영역이 존재한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늘 한 가지 일의 표면 결과로 옳고 그름을 가늠하기 좋아하였는데, 예전에는 이 결함이 줄곧 “대법의 아름다움을 실증”한다는 것에 덮어 감춰져 있었다. 곰곰히 분석해 보니 아래 몇 개 방면의 원인에 의해 야기된 것이었다.

1. 법공부가 깊지 못하였다

사부님께서는 <<전법륜>>에서 우리에게 알려 주셨다. “眞(쩐)∙善(싼)∙忍(런)은 좋고 나쁜 사람을 가늠하는 유일한 표준이다”, “한 사람으로서, 우주의 眞(쩐)∙善(싼)∙忍(런) 이 특성에 순응할 수 있어야만 비로소 좋은 사람이고, 이 특성을 위반하여 행하는 사람은 진정으로 나쁜 사람이다. 직장이나 사회에서 어떤 사람이 당신을 나쁘다고 말할 수 있는데 당신이 꼭 정말로 나쁜 것은 아니며, 어떤 사람이 당신을 좋다고 말했다 하여 당신이 꼭 정말로 좋은 것도 아니다. 한 수련자로서, 이 특성에 동화하면 당신은 바로 도(道)를 얻은 사람이다. 바로 이렇게 간단한 이치이다.”

사부님의 이 단락 법에서 나는 깨닫게 되었다. 좋고 나쁨을 가늠하는 표준은 유일한 것으로서 우주 특성이지 속인중의 표면 결과가 아니다. 어쩌면 당신이 한 일이 우주 대법에 맞는다 해도 인류 도덕이 크게 미끄러져 내려가고 있는 오늘, 사람들은 아마 당신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지지하지 않을 것이며 심지어는 당신을 나쁘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 외, 전세(前世)의 업력, 인연관계, 구세력의 지배 등 많은 요소의 영향으로 인해, 당신이 대법을 수련한다 하여 순풍에 돛단배 식으로 되지는 않을 것이다. 구세력은 당신이 법을 실증하는 일을 했다고 하여 모든 것들이 길을 내주게 하지는 않을 것이며, 더욱이 진상을 알려 중생을 구도하는 모든 일이 모두 원만히 성공하게 하지 않을 것이다. 사부님께서 보시는 것은 그 중에서의 우리의 표현이며, 우리가 수련해야 할 것은 씬씽(心性)이다. 가령 좋지 못한 결과가 나타났다 하여 애초에 했던 일체를 모두 뒤엎어 버린다면 그것을 신사신법이라고 할 수 있는가? 바로 마난 앞에서라야만 한 사람의 씬씽을 고험할 수 있는 것이다.

2. 집착을 닦아 버리는 것과 박해를 부정하는 것을 혼동하여 분명치 못하였다

우리는 구세력의 박해를 승인하지 않는 것이지 속인의 일에서 “얻기만” 하고, “잃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 아니다. “잃는 것이 곧 박해이다”라는 이런 견해는 단편적이다. 필경 우리는 수련인이기 때문에 자신에게 갚아야 할 업력이 있고, 자신이 닦아 버려야 할 집착이 있다. 만일 우리의 대법을 실증하는 일을 매우 엄중하게 영향주지 않는다면 내가 생각하건대, 우리는 더욱 마땅히 수련의 각도에서 생각해 보아야 한다. 명리는 얻기만 해야지 잃어서는 안 되며, 잃는 것이 곧 “박해 당하는것”이라고 한다면 그것 또한 집착이 된 것이 아닌가? 박해를 부정하는 것이 집착심의 보호산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3. 근본상에서 집착심을 닦아 버리지 않았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여러분 알다시피, 나한(羅漢) 그 층차에 도달하면 어떤 일과 마주쳐도 다 마음에 두지 않고, 속인 중의 일체 일을 전혀 마음에 두지 않으며, 언제나 싱글벙글하면서 얼마나 큰 손해를 보아도 싱글벙글하며 개의치 않는다. 정말로 해낼 수 있다면 당신은 이미 나한의 초급과위에 도달한 것이다.” (<<전법륜>>)

만일 우리가 무엇을 잃기만 하면 곧 사람 마음이 들뜨면서 반드시 그렇지 말아야 한다고 여긴다면, 우리는 근본상에서 아직도 속인의 물건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지 못한 것이 아닌가? 삼계속에 미혹되고 속인의 명리정에 미혹되어 있다면, 수련은 말할 여지조차 없는 것이다.

4. 수련의 기점을 잃었다

“한 수련자로서 속인 중에서 만나는 일체 고뇌는 다 고비를 넘는 것이고, 만나는 일체 표창(表彰)은 다 고험이다.” (<<정진요지>> <수련자는 자연히 그 중에 있다[修者自在其中]>)

사부님께서는 일찍이 우리에게 이 법리를 알려 주셨다. 좋은 일을 만나든 나쁜 일을 만나든 모두 수련이고 모두 안으로 찾아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놀랍게도 잊었다. 남이 자기를 칭찬하기만 하면, 혹은 조그마한 좋은 점을 얻었다면 곧 “그래도 대법제자니까, 역시 초상적이야” 하고 여긴다. 조그마한 나쁜 일에 부딪히면 곧 “합리적”이 못된다고 여기면서 밖으로 구하는데, 실은 속인의 마음을 자양한 것이며, 심지어는 좋고 나쁨의 표준을 속인중의 “얻음”으로 가늠한다. 이것은 곧 우주대법을 떠난 것이 아닌가? 그 “좋고”와 “나쁨”이 바로 속인중의 이익의 득실이 아닌가? 수련을 하고 또 해도 여전히 사람속에서 맴돌고 있지 않는가?

우리는 진상을 알려줄 때 속인에게 자신의 수련후에 좋아진 상태를 말해줄 수 있다. 이를테면 병이 나았다던가 혹은 무슨 복을 얻었다던가 하는 것이다. 이는 물론 틀리지 않는다. 왜냐 하면 대법수련을 하면 복이 있기 때문에 속인생활 가운데 확실히 초상적인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 아울러 이렇게 말하면 중생구도도 잘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은 복을 얻는 자체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대법을 수련하는 것은 복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반대로 더 빨리, 더 많이 업력을 갚기 위해서이다. 수련인은 나쁜 일을 좋은 일로 간주하는데 이 근본적인 관념을 우리는 반드시 철저하게 개변시켜야 한다.

5. 자신을 실증하는 마음을 버려야 한다

수련 중에 자신이 무엇을 얻었다던가 하면 곧 과시하고 싶어 하고, 무엇을 잃었다던가 하면 곧 덮어 감추면서 공개적으로 내놓고 담론하기를 꺼려 한다. 실제상 대법제자가 하는 것은 법을 실증하고 개인 이익을 잃는 것으로서 대법의 아름다움에 전혀 영향을 주지 않는다. 가령 우리가 무엇을 잃었다면 그 가운데서 자신의 부족점을 찾아내고 씬씽을 제고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상에서의 ” 얻음”이 아니겠는가? 진정으로 법을 실증한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대법제자로서 자신이 한 것이 옳은지 아닌지 알려면 사부님의 법을 유일한 가늠표준으로 삼아야 한다. 법으로 가늠해야만 비로소 진정한 옳고 그름, 좋고 나쁨을 가늠해낼 수 있다.

법에 부합되지 않는곳이 있다면 동수들께서 자비로 지적해주기 바란다.

문장발표 : 2008년 10월 14일
문장분류 : [수련마당]
원문위치 : http://search.minghui.org/mh/articles/2008/10/14/18767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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