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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구세력을 초월한 대법도이다

글 / 후루도 대법제자

[명혜망 2008년 10월 8일] 2006년 말에 우리 지역에서는 대체포가 있을 것이라는 소문이 떠돌고 있었는데, 그것은 새로 부임한 파출소 소장이 자료점을 파괴하고 한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나의 마음에 파동이 있었는데, 나중에 나는 생각했다. 우리집 물건은 아무것도 건드리거나 가져가지 못한다. 누가 감히 건드리는지 보자! 그날 저녁 발정념을 한 후 매우 선명한 꿈을 꾸었다. 꿈에 녹색의 기다란 뱀이 동쪽 방향(파출소 위치)에서 우리쪽으로 덮쳐 오다가, 우리가 발정념하는 것을 보더니 겁에 질려 굴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이튿날 파출소에서는 모두 도박꾼들을 잡으러 갔고, 우리 대법제자들에 대해서는 어떠한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당시에는 그다지 깊이 생각하지 않았는데, 지나간 다음에 깨닫게 되었다. 왜냐하면 우리가 마음을 내려놓고 그들의 배치에 따라가지 않았기 때문에 사악도 아무런 방법이 없게 되었던 것이었다. 속인중의 표현으로는, 수련생을 체포하려 했던 것으로부터 도박꾼을 잡는 것으로 변했던 것이다.

구세력의 일체 배치를 부정한다는 것은, 바로 그것이 배치한 일체에 따라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들은 속인중에 일부 일들을 배치했는데, 이를테면 사당의 16대, 올림픽, 대체포 등등이다. 우리 대법제자는 이러한 표면 현상의 움직임에 영향을 받았는데, 이를테면 대회가 열리지 못하도록 대체포에 겨냥하여 발정념을 하였다. 표면적으로 보기에는 마치 박해를 제지하고 사악을 제거하는 것 같지만, 실질은 여전히 그것이 배치한 이 일에서 맴돌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 일을 잘하기 위하여 발정념하는 것 같지만 사실 이 틀에서 전혀 뛰쳐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올림픽이 열려도 좋고, 대체포 역시 마찬가지인데, 만약 그러한 구세력이 배치한 이런 일이 없었다면 우리는 세 가지 일을 더욱 온당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일이 발생하였지만 우리는 그래도 동요하지 말고 여전히 온당하게 세 가지 일을 잘해야 한다. 구세력이 배치한 일체는 다만 우리 대법제자에게 위덕을 수립해줄 뿐이며, 아울러 우리가 그들을 집중적으로 제거할 기회를 줄 뿐이며, 그것들은 스스로 멸망하고 있는데, 멸망을 다그치고 있을 뿐이다. 우리가 이렇게 하는 것이야말로 바로 그들을 부정하고 그들을 배제하는 것이 아닌가?

정법시기 대법제자는 마땅히 개인수련의 틀에서 뛰쳐나와야 하며, 정법과 사람을 구하는 기점에서 문제를 보아야 한다. 사부님께서는 “자욱한 안개에 광풍이 일테면 일거라, 산에 내리는 빗줄기는 정벌의 먼지를 씻어내네” (<<홍음 2 >>)라고 말씀하셨다. 형세가 어떻게 천변만화하든지, 속인사회에서 각종 표상을 만들어 내거나 혹은 동수간에 각종 모순이 제조되고 간격을 만들어진다 하더라도, 그런 것에 모두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동요 없이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체를 잘 한다면 아무도 가로막지 못한다. 무엇을 하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 대법제자는 반드시 그러해야 하며, 반드시 조사정법(助師正法)하면서 중생을 구도하는 신우주 각자(覺者)의 모습으로 세간에서 정행해야 하는데, 어찌 그렇게 낮은 낡은 생명에게 끌려갈 수 있겠는가?

지금 나는 깨달았다. 우리 대법제자가 신우주 정법정각으로 수련성취 하려면 개인수련에만 머물러 있어서는 너무도 부족하다는 것을. 그렇게 하면 어떻게 수련을 하고, 어떻게 안으로 찾는다 해도 사(私)를 위한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내가 느끼건대, 병업관 중에서 마난을 엄중히 받고 있는 그러한 동수들은, 어떤 방면으로 말한다면 바로 개인수련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며, 안으로 자신의 집착을 찾을 때에도 역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강렬한 생각을 지닌 것이다. 명백히 말하면 여전히 자신을 위한 것인데, 그렇다면 난관을 넘길 수 없게 된다. 엄격히 안으로 찾는 것은 틀리지 않지만, 정법시기 대법제자가 안으로 찾는다는 것이 어찌 이렇듯 자사(自私)적이고 옅을 수 있는가? 우리가 안으로 찾는 것은 자동적으로 법에 동화되고 자동적으로 자신의 변이된 일체를 법중에서 귀정하여 반본귀진하는 것이지 그 무슨 상태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우리의 발정념은 법 중의 정신(正神)들이 대법을 수호하기 위하여,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신통으로 사악을 제거하는 것으로써 우주를 정화하고 박해를 감소시키며 대법을 보호하고 중생을 구도하기 위해서이지 자아보호나 그 누구를 도와주기 위해서가 아니다. 우리가 진상을 알려 중생을 구도하는 그것은 대법의 자비가 인간 세상에서 체현된 것이며, 대법중의 진수제자가 도태에 직면한 중생들을 가엽게 여긴 마음이 생겨남에 따라 대법에 의해 수련해낸 지혜와 정념으로 구도하는 것이지, 자아 원만, 임무 완성, 액수를 맞추고 수준을 비기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오늘에 와서도 우리는 바로 이 위대한 장거를 거행하고 있다. 그를 위대하다고 하는 것은, 바로 우리는 사부님의 무사무아(無私無我)한 대법도이고, 우리는 사부님께서 요구하신 것을 원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대법중에서 수련하는 생명은, 보고 있는 모든 문제, 하고 있는 모든 일을 바로 사부님께서 요구하신 일체를 원용하기 위한 기점에 서야 하고, 사람을 구하는 기점에 서야 하지, 개인수련의 기점에 서서는 안 된다. 우리가 이렇게 하면 바로 자신을 구세력을 초월한 위치에 놓은 것이고, 구세력이 배치한 일체의 바깥에 놓은 것이므로 우리의 기점은 맞는 것이고, 방향성이 있게 된 것이다. 구세력이 건드릴 수 있는 것은 다만 위사위아(爲私爲我)한 생명일 뿐이다. 진정으로 무사무아한 대법제자는 출발점마저 모두 정법으로 사람을 구하는 것을 중히 여기는 대법제자이며, 하고 있는 법을 실증하는 일들은 속인들이 보기에는 아무리 위험해보인다 해도, 우리는 그를 초월한 생명이기 때문에 구세력은 손이 닿을 수도 없을텐데 어떻게 박해할 수 있겠는가? 어떠한 위사위아한 일념이든 모두 우리를 가로막는 장애가 될 것이다. 더욱이 중대한 선택을 앞두고, 가령 대법을 중시하고 사부님께서 요구하신 일체를 원용하며, 중생구도를 중시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비로소 사부님께서 안배하신 길을 가는 것이고, 비로소 미혹되지 않는 것이며, 신우주의 정각(正覺)으로 성취할 수 있는 것이다. 가령 사심 때문에 자아를 중시한다면 그럼 곧 흐리멍텅해지고, 구세력이 제조한 가상중에서 진정한 나를 잃게 되며,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신 표준에 도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는 일은 표면적으로 얼마나 했는가에 그쳐서는 안 되는데, 우선 기점을 바로 놓아야 할 것이다. 오직 우리의 목표가 무사무아, 선타후아의 정법정각이며, 일체는 남을 위하는 것일 때라야만 우리는 비로소 “정법시기 대법제자” 자격이 있는 것이다.

개인적인 소견이므로, 법을 스승으로 모시고 자비로 시정해주길 바란다.

문장발표 : 2008년 10월 8일
문장분류 : [수련마당]
원문위치 : http://minghui.ca/mh/articles/20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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