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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법시기 대법제자”라는 칭호에 대한 약간의 견해

[명혜망 2008년 9월 24일] 법을 얻은 지도 이젠 여러 해가 되었는데, 수련상태는 아직도 좋을 때가 있고 좋지 못할 때도 있다. 비록 집착심은 이전보다 많이 담담해졌다고 할 수 있지만 오늘날까지 아직도 뿌리를 뽑지 못하여 때때로 나타나 교란하곤 한다. 왜 집착심을 버리기가 이렇듯 어려운가? 왜 사람 마음을 내려놓기가 이렇듯 어려운가? 나는 오늘 깨닫게 되었는데, 그것은 사실 집착심이 바로 “나”의 뒤에 숨어 있기 때문이다. “나”에 대한 집착, 다시 말해서 자사(自私)야 말로 비로소 가장 근본적인 집착으로써 일체 집착의 근원이다. 모든 집착하는 일체는 그래 모두 “내가 좋아 하는 것”, “내가 가지고 싶은 것” 이런 따위의 “나”를 중심으로 한 것이 아닌가? 바로 마음속 깊은 곳에서 “자아”를 손해보기 싫어하고, “자아”를 내려놓기 싫어하기 때문에 근본상에서 집착심을 버리기 어려운 것이다.

이러할 뿐만 아니라, 깊이 따져 보면 자기 사상의 기점이 바로 “자아” 위에 놓여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생각하고 일하는 일체 모두가 “자아”를 위한 것이며, 심지어 지금 하고 있는 세 가지 일마저도 여전히 “자아”를 위해서이다. 오늘 비로소 자신이 이렇듯 자사자리(自私自利)한 사람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어 놀랍다.

장시기 동안, 개인수련을 잘하지 못하였고, 법을 실증하는 일도 잘하지 못하면서 자신은 오히려 이 일체를 줄곧 중시하지 않았고, 자신이 세 가지 일도 모두 하고 있으니 나중에 꼭 원만할 수 있다고 여겨왔다. 하지만 필경은 마음속으로 탐탁함을 느끼지 못하고 늘 허공에 걸린듯한 느낌이었다. 드디어 오늘 나는 가슴에 손을 얹고 자신에게 물어보게 되었다. 나 같은 사람도 원만할 수 있는가? 원만할 자격이 있는가? 가령 오늘 이 일체가 종결된다면 나를 마땅히 어느 곳에 놓아야 하는가? 나를 어느 곳에 놓을 수 있겠는가? 표면적으로 나의 표현이 어떠하든 간에 자신만은 속일 수 없다. 돌이켜 보면 예전에 한 일의 일체 출발점은 모두 자신을 위한 것이었고, 동기는 모두 불순하였다. 왜 대법을 위하고, 우주를 위하고 중생 만물을 위하지 못하는가? 무엇 때문에 마음속에 정법시기 대법제자가 반드시 갖추어야 할 책임감과 사명감이 없는가? 필경 매 한 사람의 정법시기 대법제자 저마다에게는 중생에 대해 모두 중대한 역사적 책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마음속에 왜 이러한 책임을 진다는 의식이 없는가? 자신의 일사일념은 왜 우주 중생을 중시하지 못하는가? 자신의 일언일행이 왜 대법을 실증하고 중생을 구도하는 것을 출발점으로 하지 못하는가? 표면상에서 우리가 하는 일이 어떠하든지를 막론하고 사상의 기점, 행위의 출발점이 나를 위하고 사(私)를 위한 것이면 곧 우주 특성을 빗나간 것이므로 대법의 위력을 구비하지 못한다. 반대로, 우리가 대법을 위하고, 우주 중생을 위해 한 일일 때면 사상이 순정하므로 우주법리에 부합되는 것이며, 그러면 우주 대법의 끝없는 법력을 구비할 수 있는 것이다. 사상이 순정할수록 우주의 법리에 더욱 부합되고, 더욱 대법의 힘을 구비할 수 있으며, 더욱 정신(正神)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바로 옛 사람이 말한 것처럼, “하늘이 도우면 모든 것이 순조롭다”이다.

일본 만화 “용자태랑(龍子太郎)”을 본 기억이 난다. 용자태랑(龍子太郎)은 어려서부터 장사였는데, 늘 남과 싸웠다. 나중에 한 신선을 만났는데 백 사람의 힘을 그에게 주었다. 하지만 오직 그가 남을 위해 좋은 일을 할 때만 비로소 백 사람의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후에 용자태랑(龍子太郎)은 이것으로 요괴를 물리쳐 백성들을 위해 해악을 제거하였고, 많고 많은 좋은 일들을 하였다. 이 이야기는 나에게 아주 큰 계발이 있었다. 가령 우리의 세 가지 일을 하는 출발점이 자신의 원만을 위한 것이라면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부여해주신 능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없다. 하지만 사상의 출발점이 참으로 우주 중생을 위한 것이라면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부여해주신 능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고, 진정으로 대법을 실증하고 중생을 구도하는 거대한 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 마음속으로 정말로 대법을 중시하고 우주중생을 중시한다면 사상의 기점은 귀정될 것이며, 생각하거나 하는 일도 필연코 많이는 대법을 실증하고 중생을 구도하는 일일 것이다. 이러한 생명이야말로 비로소 “정법시기 대법제자”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상은 개인의 조그마한 견해이니 부족한 곳은 동수들께서 바로 잡아주기 바란다.

문장발표 : 2008년 9월 24일
문장분류 : [수련마당]
문장위치 : http://search.minghui.org/mh/articles/2008/9/24/18639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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