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明慧网 2008년 9월 9일]
동수님:안녕하세요?
당신의 가족이 박해 받은 일에 대해 대체적인 정황을 알게 되었는데 저의 법에서의 일부 인식을 말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대법제자에 대한 낡은 세력의 박해를 부인합니다. 우리가 어떤 형식을 취해서도 박해를 폭로하는 이 자체도 긍정적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아래 몇 가지 부분에서 어떻게 법의 요구에 따라 하며 진정으로 낡은 세력의 배치를 타파할 수 있는지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인식합니다. 낡은 세력의 배치 속에는 박해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의 배치는 단지 박해뿐만이 아니라 수련과 정법의 일체 길을 안배하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반박해에만 착안해서는 여전히 부족합니다. 우리는 절대로 낡은 세력의 어떠한 배치도 인정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어떻게 하면 그것의 배치를 부정할 수 있는가?
나는 어떠한 일을 하든 출발점과 일의 전반 과정에서의 심태 그리고 일의 효과에서도 모두 대법 요구에 부합되면 바로 낡은 세력의 배치를 타파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박해를 폭로하는 자체는 우리 대법제자의 일을 하는 목적이 아닙니다. 사상이 단지 박해를 폭로하는데 국한된다면 낡은 세력에게 이용당할 수 있습니다. 중생을 구도하는 것이야말로 대법제자의 위대한 사명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개정해서 재판을 하려고 하든 아니면 해외의 힘을 빌리려고 하든지 출발점은 반드시 중생구도에 두어야 하며, 어떠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마음 하나를 섞어 넣어도 안 됩니다. 가족에 대한 걱정, 가족의 감당을 감소하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지만, 사람의 이런 정은 오히려 낡은 세력의 박해를 가중시킬 것입니다. 현재 가족이 이미 박해 받았으므로 어떠한 마음 하나도 다 위험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환경에서 반박해하는 것은 확실히 심성에 대한 고험은 모두 아주 엄격한 것입니다. 해외의 역량에 대해 의지 하는 것은 사람의 마음이 아닌가?
사악을 폭로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중 하나는 현지를 향해 진상을 똑똑히 밝히고 사악을 폭로하여 중생들이 명백해지게 함으로써 구도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현재 시급한 방식입니다. 동시에 네트워크를 통해 폭로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변의 대법제자들이 정체적으로 법에서 제고해 올라오는 문제이며, 모두 능히 중생을 자비로 대할 수 있고 박해를 폭로하는 기회를 빌어 사람을 구도한다면 이것이 비로소 효과에 달성된 것입니다. 사악을 폭로하기 위한 폭로는 법에서 누락이 있는 것입니다. 가족 동수의 고통은 마땅히 감소되어야 하지만 이것을 목적으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법의 요구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일을 해외에서 온 사람이 하는 것을 건의하지 않습니다. 2003년과 2004년에 해외에서 제자가 왔습니다. 국내에서 마중도 하기 전에 잡혀 갔는데 영향을 끼쳐 해외제자 두 명이 마의 손아귀로 떨어지게 했습니다! 우리는 현지의 대법제자의 정념정행에 의지해야 합니다. 장렬함은 속인 이 공간에서 펼쳐 보여지는 것이 아니며 평범할수록 오직 법의 요구에만 부합된다면 아마도 효과가 더욱 좋을 것입니다. 해외에서 사람이 와서 개입하게 한다면 시간과 공간 그리고 교섭 방면에서 수속이 더 많아질 것이며, 이 자체가 사악을 폭로하는 어려움을 더 크게 할 것입니다. 참여하는 매 대법제자가 법에서 다 따라올 수 있어야 하며, 일을 추진할 수 있는 가능성도 있어야 하고 또한 경제적인 비용과 달성할 실제적인 효과도 고려해야 합니다. 이 실제 효과는 첫째로 중생으로 하여금 진정으로 진상을 알게 하여 중생을 구도했는지, 그리고 얼마나 되는 인력과 재력을 투입했으며 실제적으로 사람을 구도한 효과에 도달했는지도 적당히 고려해야 합니다.
허베이[河北]를 포함한 각지에서 몇 가지 아주 큰 일을 하였는데 속인 공간에서 표현된 것도 매우 장렬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여러 방면의 요소를 고려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실제적인 효과가 도대체 어떤지, 투입은 많이 했는데 효과가 일반적이며 동수님들이 손실을 입었는데도 단지 표면의 영향만 큰 것인지? 아니면 확실히 많은 사람을 구도했고 동수님들도 손실이 없으며, 정상적인 기타의 사람을 구도하는 일이 이로 인해 지체되지 않았는지도 고려해야 합니다. 이것은 확실히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신은 일을 함에 있어서 일의 몇 개 방면, 여러 개 방면을 보지 단 한 방면만 보거나 모 한 방면의 효과로 장애받지 않습니다. 대법제자는 정법 후기에 더욱 이성적으로 문제를 사고해야 합니다.
왜 일부제자들은 두려운 마음이 아주 적은데도 여전히 박해를 받는가? 왜 일부 제자들은 목이 잘려나갈지언정 타협을 하지 않았지만 여전히 박해를 당하는가? 우리는 낡은 세력의 박해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결코 이 일념이 있으면 충분한 것이 아니며 또 자신의 집착심이 어디에 있는지 찾아야 하는데 집착심을 찾는 것이 낡은 세력을 인정한다는 것이 아니며 나는 이런 개념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대법이 없다면 우리는 사람의 마음을 찾아낼 수 있습니까? 우리는 법의 요구에 따라 찾고 있으며 낡은 세력의 표준에 따라 찾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안을 향해 찾는 것도 잠시 박해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가 아니며 이런 것이 아니고 대법수련 자체의 요구입니다. 찾았다면 사악도 자연적으로 박해할 수 없게 됩니다.
아주 확고한 수련생은 내가 생각하건데 두려운 마음의 문제가 아닐 수 있습니다. 저는 여전히 한 대법제자의 책임과 출발점과 심태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제자들은 감옥에서 박해 받은 시간이 길어지면 이러 박해를 사람이 사람에 대한 박해로 간주하기 쉬우며 반박해 하는 것도 사람이 독재정치기계를 반대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저항적인 심태가 형성하기 쉽습니다. 왜냐하면 사악의 전향적인 요구를 거절하려고 할 때 심태에서 사악의 조종을 당한 사람에 대해 저항적인 감정이 쉽게 형성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심태를 돌려야 합니다. 어디든 다 중생을 구도할 수 있는 좋은 장소입니다.
이왕 죽음도 내려놓았는데 왜 그 자리에서 차라리 사람을 구도하지 않는가? 명혜망에서는 한 동수님의 체험을 실었습니다. 노년 대법제자 한 분이 ‘구평(九評)’cd를 배포하다가 박해 받았습니다. 개정하여 재판하는데 많은 경찰들이 왔습니다. 노년 대법제자는 마음 속으로 ‘경찰들이 많이 올수록 좋다. 더 많이 올수록 구도되는 사람이 더 많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다음 그는 즐겁게 법정을 개정한 모든 사람들에게 진상을 했는데 마음 속에서 어떠한 사람에게도 저항하는 감정이 없었습니다. 결국 이 대법제자는 석방되었습니다. 이 석방된 결과는 구해서 온 것이 아니며 그가 사전에 설계한 것도 아니고 그의 경지로서 수련해낸 것입니다.
물론, 수련에는 본보기가 없으며 개인요소도 천차만별이므로 흉내내서도 안 되며 또한 흉내낼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어디서이든지 기쁜 모습으로 사람을 구도하는 이것은 변치 않습니다. 말하기는 쉽지만 해내기는 어렵습니다. 특히 안에서 법의 지도가 없다면, 어렵습니다. 주변의 동수님들께서도 이에 대해 청성(淸醒)한 인식이 있어야 합니다.
비교적 취할 수 있는 방법은, 저는 방법을 생각하여 안에 있는 동수로 하여금 법리를 명백하게 하는 것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가족과 주변의 대법제자 그리고 현지 대법제자들은 지속적으로 끊임없이 현지 민중들을 향해 박해를 폭로하고 동시에 인터넷으로 박해행위를 폭로하는 것입니다. 폭로할 때는 동수님의 안전과 감당능력도 고려해야 합니다.
위에 서술한 일을 잘 하는 외에 또 더 확대할 수 있지만 반드시 조건에 근거해야 합니다. 박해 증거를 수집하여 e카드와 그림으로 만들어 기술을 아는 동수님에게 명혜망으로 전달하게 하고 전자메일에 한 부 보내놓고 연후에 가족이 방법을 생각해서 출국하고, 외국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박해를 폭로하는 것입니다. 구제불능한 악인에 대해 외국에서 기소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하게 되면 연관된 면도 매우 넓어 추진할 수 있는지, 출국했다가 다시 돌아올 수 있는지, 출국을 할 수 있는지, 동수님이 감당할 수 있는지를 모두 고려해야 하며 신중하게 파악해야 합니다.
혹은 해외를 통하지 않고 바로 국내에서 상소하여 하급에서부터 상소하되
우선 법률을 한 번 연구해야 합니다. 상소가 목적이 아니라 과정 중에서 중생을 구도하는 것만이 목적입니다. 새로 개정할 수 있으면 개정하고 해외의 성원이 없어도 마찬가지로 진상을 밝히는 것입니다. 연후에 소식을 명혜로 전하는 것입니다. 물론 역시 감당능력에 따라 해야 합니다.
당신의 동수
문장완성:2008年09月08日
문장발표:2008年09月09日 문장수정 : 2008年09月11日 03:08:43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08/9/9/18557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