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대륙대법제자
【명혜망 2008년 9월 16일】주변에 있는 한 수련생은 오랫동안 ‘병업’이란 가상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수련생을 도와주는 과정에서 나는 스스로 계속 사고했다. 마난 속에서 안을 향해 찾고 집착을 내려놓고 발정념을 하고 세가지 일을 잘 견지해야 함을 알고 있다. 동수들은 모두 아주 노력하고 있다. 가끔 매우 고생스럽지만 표면 변화는 항상 크지 못한데 이는 도대체 어찌된 일인가? 나는 매우 깊고 완고한 한가지 물질이 가장 근본적인 저애 작용을 하고 있음을 희미하게 느꼈다. 우리는 모두 그것의 표면 흙먼지를 털어내려고 노력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마음 속에서 끄덕하지 않고 고수하고 있다. 가끔 우리는 그것을 보지만 충분한 힘으로 그것을 제거하지 못한다. 단지 표면의 흙먼지를 털 듯이 그것을 움직이고는 그것이 제거되었다고 여기지만 사실 그것은 전혀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것은 우리 낡은 생명의 마음 전체를 점거하고 심지어 우리 신체의 매 하나의 세포를 팽창시키며 일사일념을 주재한다. 그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을 어떻게 철저히 제거할 수 있는가? 나는 고달프게 사색해 나갔다.
“법은 일체 집착을 타파할 수 있다”(《교란을 배제하다》). 나는 사부님께서 마난을 제거하는데 관한 설법을 진지하게 기억했다. 사부님께서는 나를 점화해 주셨는데 나의 머리 속에는 <<전법륜>>에서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두 가지 사례가 떠올랐다. 한 사람이 손에 책을 들고 큰 길에서 걸으면서 선생님께서 보호해 주시니 차에 부딪치는 것이 두렵지 않다고 말하는데 사부님께서는 이런 사람을 보호하지 않는다고 하셨다. 그리고 또 한 50여세 되는 노수련생은 차에 부딪친 후 “괜찮습니다” 라고 말했는데 그 결과 아무 일도 없었다. 뒤에서 말한 사례에 대해 많은 동수들은 자신이 깨달은 것을 말하기를 모두 사부님을 믿고 법을 믿는 각도에서 말했다. 나 역시 매우 동감이다. 그러나 첫 번째 사례의 수련생도 그가 사부님과 법을 믿지 않았다고 할 수 없다. 그가 감히 책을 들고 큰 길을 걸은 것은 비록 극단으로 나갔지만 이 역시 사부님에 대한, 법에 대한 믿음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양자의 근본적인 다른 점은 어디에 있는가?
‘심성 제고’란 이 한 단락의 설법을 열심히 읽었다. 사부님께서는 50여 세 되는 사람이 차에 끌려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이야기를 말씀하셨다. 읽고 또 읽다가 나는 확연히 크게 깨달았다. 사부님께서 여기서 말씀하신 그 관건적인 “일념”은 “내가 괜찮다”가 아니라 남에게 번거로움을 주지 않은 것이다. 선의적으로 상대방을 이해하고 상대방을 배려했다. 차에 힘껏 부딪쳐 생사의 기로에 서 있었지만 모두 남을 위해 고려하고 운전자에 대해서도 “괜찮습니다. 걱정 마세요. 저는 당신한테 일을 만들지 않을 것입니다!” 인즉 그것이 바로 정념이다! 이는 자신은 괜찮으면서 남에게 사기 치려는 속인과는 심성이 정말로 천양지차이다!
사부님께서는 ‘심성 제고’란 이 제목 하에 이런 사례를 말씀하셨고 나는 어떠한 정황에서도 진정한 수련인의 심태가 되어야 함을 깨달았다. 어떠한 이익 앞에서도 모두 타인을 위해 생각하고 담담하게 버릴 수 있어야 한다. 생사의 앞에서도 자신을 내려놓고 진정한 자비심으로 대해야 한다. 한 생명이 이러한 경지를 해낼 수 있으면 대법의 제약하는 힘이 곧 나타나고 고층차의 생명에게 저층차의 문제가 나타나지 않는데 신은 물론 차에 부딪쳐 다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대법서적을 들고 큰 길을 걸어가는 사람의 출발점은 자신에게 잘 하도록 주동적으로 요구하고 길가의 행인에게 번거로움을 주지 않겠다는 게 아니라 기사에게 번거로움을 주었다. 대법의 보호를 이용하여 자신을 과시하려고 했는데 남을 고려하는 마음이 추호도 없었고 심지어 속인사회 상태를 파괴하려고 했으며 대법을 파괴하려고 했다. 이러한 심성은 속인보다 더 못한데 대법이 또 어찌 그를 보호할 수 있겠는가?
한 순간에 많은 일들이 마음 속에 떠올랐다. 과거에는 복잡한 표면 현상에 미혹되었지만 지금은 문제의 실질이 단번에 명석해졌다. 표면의 움직이지 않음이 사람 마음의 요행 심리를 덮어 감추지 못하고, 행동상에서의 두려움이 없음이 대법을 이용하려는 사심을 덮어 감추지 못한다. 치장을 하지 않음이 색심을 깨끗이 제거했다는 것을 대표할 수 없고, 생활상의 어려움이 이익에 대한 집착을 버렸다는 것을 대표할 수 없다. 사부님을 믿고 법을 믿음은 표면의 산뜻함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내심의 이기주의란 근본 속성을 진정으로 개변해야 하고 진정한 심성의 제고만이 수련의 근본이다. “무사무아, 산타후아의 정각”(<<불성무루>>) 은 우리가 원만한 이후에 도달해야 할 경지가 아니라 수련의 매 한번의 고비와 매 한번의 난 앞에서 모두 반드시 갖춰야 할 심성이다! 오로지 이렇게 해야 만이 우리는 비로소 수련한다고 할 수 있고 비로소 구세력의 박해를 타파할 수 있으며 그 고비와 난을 지나서 우리의 조사정법과 중생구도의 사명을 완성할 수 있다!
지금 중생들은 구세력에게 도태될 대겁에 직면했다. 대법의 진상을 알아야 만이 사당에게서 탈퇴하여 구도를 받을 수 있다. 한 진정한 정법시기의 대법제자, 진정으로 사부님과 법을 믿는 대법도는 어떠한 험악함에 마주해도, 어떠한 박해에 마주해도, 어떠한 고통을 받아도 내보내는 매 하나의 일념은 모두 중생 구도이며, 매 하나의 행동은 모두 진상을 알리기 위함이다. 정말로 이렇게 해내면 이미 광염이 끝없는 신이다. 사부님의 법신은 그를 보호해 주시고 주위의 호법신들은 그를 보호해 주시는데 어떤 사악이 감히 그를 접근하겠는가? 그의 공간 마당 속에 숨어있는 완고하기 그지없는 구세력의 배치와 파괴를 일삼는 사악 역시 그의 강대한 정념의 작용 하에서 해체된다. 무슨 ‘병업’의 가상, 무슨 납치, 추적 모두 형체 없이 소멸될 것이 아닌가?
자신을 위하는가 아니면 그를 위하는가는 사람과 신의 일념지차이다. 우리는 오로지 내심의 이기적인 본성을 철저히 개변해야만 비로소 사람에서부터 신으로 걸어 나갈 수 있다. 타인을 위하는 각도에 서면 법리가 명석하게 나의 눈 앞에 펼쳐진다. 수련은 자신의 원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중생이 구도됨을 위한 것이다. 세가지 일을 하는 것은 나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고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중생이 구도되는데 무엇이 필요하다면 내가 행하는 것이다. 사악을 제거하는 것은 자신의 안일함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 신체 내외의 무량한 중생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박해를 부정함은 자신을 수호하는 것이 아니라 대법의 아름다음과 위엄을 실증하기 위함이다. 수련생을 도와주는 것은 동수의 생명 안위를 위한 것이 아니라 구세력의 배치를 부정하여 더 많은 동수들이 중생을 더 많이 구도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문장완성: 2008년 09월 14일
문장발표: 2008년 09월 16일
문장갱신: 2008년 09월 16일 15:06:55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08/9/16/185921p.html